Re: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7 (23세 문성왕 경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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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4 02:37 조회1,528회 댓글0건본문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신라 진지.★문성왕릉(新羅眞智.文聖王陵)
【관리번호】780-209-280-258
【지정사항】사적 제178호
【유적종류】능·원(역대왕과 비빈,세자,후궁의 능·원)
【소 재 지】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시 대】삼국시대(신라)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진흥왕릉 하단에 유존한다. 진지왕은 신라 제25대 왕으로 진흥왕의
차자(次子)이다. 업적으로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도모한
일이 있다. 왕릉은 봉분 저경이 17m, 높이 3m인 동-서 장축의 타원
형 봉토분이다. 봉분 저부에 인두대 할석이 노출된 것으로 보아 봉
분 내에 호석을 돌린 듯하며 봉분 주변에는 장식이나 석물은 한 점
도 없다. ★문성왕은 신라 제46대 왕으로 신무왕의 태자(太子)이다.
보위기간중 여러 가지 재난이 많았으나 백성을 위문하는 등 선정에
힘썼다. 왕릉은 장축 저경이 17m, 높이 2.5m 정도 되는 동-서 장축의
타원형 봉토분이다. 묘역 주위에 특별한 석물은 없고 호석도 보이
지 않는다. 다만, 능 앞에 세워진 표석에 사적번호가 없이 단순히
★문성왕릉이라고만 적혀 있다. 과거에는 진지왕과 ★문성왕을 합장했
다는 설에 다라 진지왕릉을 일명 ★문성왕릉이라 했으나 현재 왕릉을
별개로 지정해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71. ; 동해문화
사, 1995, <<경상북도문화재도록>> 1, 332. ; 경주문화재연구소, 1994, <<경
주서악지구지표조사보고서>>, 50-51.
【비 고】1969. 8. 27. 지정.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지례 향교 대성전(知禮鄕校大成殿)
【관리번호】740-930-250-194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118호
【유적종류】향교(향교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교리 739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기타(지례 향교)
【유적내용】
향교의 창건은 조선 성종 무렵이며 대체로 일읍일교(一邑一校)가 이
루어졌다. 지례향교도 이때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뒤쪽
높은 곳에 대지를 2단으로 구획하였다. 평면 배치는 동일축에 있지
않고 명륜당이 우측으로 비켜서 있다. 현감 정앙이 향교를 객사 동
북에 창건하여 성종 16년(1486) 현감 김수문이 명륜당을 증설하였다.
지례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는데 당시 재임을 맡았던 김여
권(金汝權)과 송천상(宋天祥)이 대성전에 들어가 성현들의 위패를
갖고나와 소실을 면했다고 한다. 숙종 16년(1690) 현감 유준광(柳俊
光)이 교궁을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
칸올 높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두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문틀은
온연귀맞춤하여 고식이나 문은 쌍여닫이고 창살에 무늬를 넣었다.
외1출목의 이익공계로 살미 끝이 날카롭고 초각을 하였다. 측면 벽
체는 격자살의 광창(光窓)을 내었다.
전내는 대량하부에 가는 기둥
을 배면쪽으로 세워 ★문성왕의 위패를 강조한 것이 특이하다.
겹처
마의 맞배지붕으로 하고 양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외 명
륜당과 활주를 세우고 초익공에 팔작지붕을 올린 사반루(思伴樓),
서재, 맞배지붕의 내삼문(內三問)이 남아있다.
【참고문헌】동해문화사, 1995, <<경상북도문화재도록>> 3, 346.
【비 고】1985. 8. 5. 지정.
▣ 문화재청 홈
종 목 사적 178호
명 칭 신라진지★문성왕릉 (新羅眞智文聖王陵)
분 류 능
면 적 사적177호에 포함
지정일 1969.08.27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시 대 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신라 25대 진지왕(재위 576∼579)과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같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높이 5.5m, 지름 20.6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지금은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진지왕과 ★문성왕은 시대적으로 278년의 시간차가 있어 두 왕의 합장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서악리 무덤들 중 아래에서 두 번째 무덤이 진지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문화재명 신라진지★문성왕릉(新羅眞智文聖王陵)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의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中古時期)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46대로, 하대(下代)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系譜)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王陵)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王陵)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진지왕(眞智王)(재위(在位) 576-579)은 본명이 김사윤(金舍輪)(혹은 김윤(金輪))으로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재위 기간이 짧아 치적은 거의 없으나 중국의 진(陳)나라와 통교한 기사가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9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릉(眞智王陵)이 애공사(哀公寺) 북(北)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릉(陵) 아래편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그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무열왕(武烈王)의 조부(祖父)로서 무열왕릉(武烈王陵) 뒤편에 도열한 4기(基)의 대형 고분 중 위에서 3번째 고분을 그의 릉(陵)으로, 그리고 그 아래 4번째 고분을 그의 아들이자 무열왕(武烈王)의 부(父)인 문흥대왕(文興大王)(용춘일추존(龍春一追尊))의 릉(陵)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문성왕(文聖王)(재위(在位) 839-857)은 본명이 김경응(金慶膺)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57년에 9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공작지(孔雀趾)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음 왕인 헌안왕(憲安王)의 장지도 공작지라고 하였다.
▣ 김윤만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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