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현풍곽씨와 우리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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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4 04:29 조회1,727회 댓글0건본문
현풍곽씨와 우리가문의 인연을 살펴 보았습니다.
○ 먼저 고려조에 곽원진 이라는 분은 영삼사사공(김천)의 장인이 되시는 분으로 안렴사공(김사렴), 익원공(김사형)의 외할아버지입니다.
○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는
(제학공파) 1592년 10월 6일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진주대첩을 지원하였고,
(서운관정공파) 임진왜란시 경상도 관찰사이셨던 몽촌공 김수와는 불화설과 사이좋은 일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고,
(도평의공파) 독수헌 김사형, 후송재 김사정 형제는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곽망우당 의진에서 적신성서(積薪成誓)의 피 끊는 시(詩)로서 전진을 격려하여 왜적을 격파하였고,
(안렴사공파) 김담(金淡, 1562-?)은 자淸叔, 호樂齋, 안렴사공 10세손으로서 임란을 당함에 古今島에서 倡義하여 곽재우와 더불어 도모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陣中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현풍곽씨로 백범선생을 올곧게 양육하시고, 평생 백범선생을 뒷바라지하신 생을 사신 분입니다.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곽원진(郭元振)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 호는 석천(石川).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돈효(敦孝)이며, 어머니는 조운경(趙雲卿)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1306년(충렬왕 32) 총랑(摠郎)으로서 원나라에 성절사로 파견되었다.
1310년(충선왕 2) 좌대언(左代言)을 거쳐 성균좨주 진현관제학(成均祭酒進賢館提學)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萬姓大同譜. 〈秦星圭〉
● 곽재우
<진주성 대첩>
② 1592년 10월 6일
저녁에 의병장 ★곽재우는 ★심대승으로 하여금 의병 2백여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가 호각을 불면서 횃불을 올려 성안과 호응하고 "이제 홍의장군의 대군이 구원하러 온다" 라고 크게 외쳤다.
<디지털한국학>
김수(金#수51){4}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국역 석릉세적 (1996)>
④ 荷堂공(휘瞻) 및 夢村공(휘수)의 기록과 필적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 임진왜란시 경상순찰사 金★수와 의병장 ★곽재우와의 불화내용이 전하여지고 있고,
[대동야승]에는 쌍방간에 오간 檄文 내용이 전하여지고 있는데, 당시의 전란에 따른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서
후일 ★몽촌공이 오위도총관이고 ★곽재우가 오위부총관일 때 운검을 상사인 몽촌공께서 메겠다고 자청하는 사이좋은 일화가 [청장관전서]에 전하여지고 있다.
<의성군지 1987>
●金士亨 1541-
자 士兼(사겸) 호 獨秀軒(독수헌) 송은 광수의 증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에 올랐다.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란때 아우 士貞과 더불어 火旺山에 들어가 곽망우당(=곽재우)과 같이 창의했다.
<의성군지 1987>
●金士貞 1552-1620
자 正叔 호 後松齋, 송은 광수의 증손이며 만취당 士元의 아우이다. 젊어서 재예와 총명이 과인했으며, 가훈에 따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퇴계를 사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때에는 중형 士亨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왜적에게 항전하여 크게 전과를 올린 바 있다.
창녕 火旺山城에서 섶을 깔아 맹서하되 "피로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몸은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 하였다.증직으로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고 文集과 溪門禮設이 전하여 道潭祠에 제항되었다.
<시군지순례 14-5.(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 후송재(後松齋) pp329 (사진있음)
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3리
---임란 때 화왕산의 곽망우당 의진에서 적신성서(積薪成誓)의 피 끊는 시(詩)로
서 전진을 격려한 후송재 김사정(後松齋 金士貞)의 거실로서,
<안렴사공파 문중자료>
● 김담(金淡)
1562(명종17)-? 자 淸叔, 호 樂齋, 안렴사공 10세손
공은 벼슬이 장락정에 이르렀다.
임란을 당함에 古今島에서 倡義하여 곽재우와 더불어 도모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陣中에서 전사하였는데 10여일이나 안색이 불변하였다 한다.
아들 孝明이 負屍還葬하였고, 선무2등공신으로 책훈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백범기념사업협회 홈페이지>
●백범 김구 (白凡 金九) / 어머니 곽낙원 (郭樂園)
김구 어머니 곽낙원 (윤정모)
곽낙원 씨는 1858년 철종 9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나 1939년 망명정부 피난지였던 중국 중경에서 아들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거의 1세기동안 급류와 같은 역사 속에서 꿋꿋이 버텨온 그녀는 대한 독립도 보지 못한 채 먼 타국에서 객사해야 했던 것이 끝내 억울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의 뒷바라지는 누가 해준단 말인가. 그녀의 소망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소원 풀이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아들의 소원은 대한독립이었다.
그날이 오면 함께 손잡고 귀국해서 나라가 없던 설움과 그 숱한 고생담을 지나간 역사의 뒷갈피에 꼭꼭 묻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은 단 5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 억울해서 어찌 눈을 감을까." 그녀는 아들에게 그 말을 남겼다.
험로 지켜준 모정
사회에 공헌하고 세상에 빛을 남긴 여성들은 대개 3가지 상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논개같이 애국을 하거나 황진이같이 문학을 남긴 여성이 있고,
둘째 지어미가 되기 이전부터 인격을 겸비했고 그래서 더욱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한석봉 어머니나 신사임당 같은 여성이 있는가하면,
셋째 고리키의 소설『어머니』에서처럼 처음은 그저 무지몽매한 아낙에 불과했으나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아들로 인해 점차 의식화되어 가는 여인상이 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씨도 이 후자로 보는 것은 그녀가 여성으로서보다는 철저한 어머니로서 한평생을 살다 갔기 때문이다.
고귀한 뜻을 이해
먼저 그녀는 가난한 상민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짓눌린 백성들이 그렇듯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 갖고 있었을 뿐 양반댁처럼 가풍이라거나 교육을 받아 따로 인격을 개발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해에 입하나 덜기 위해(추측이지만)민며느리 비슷하게 시집을 갔다. 신랑 김순영은 가난해서 장가도 들지 못한 노총각으로서 당시 10년 연상인 24세였다. 어쨌든 2,3년간 종조부 집에 얹혀 살다가 태기가 있어 비로소 분가를 했는데 그때 나이 17세였다. 첫아이를 낳을 때 어떻게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세상에 나온 어린애가 차라리 죽어주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아들은 남의 젖을 얻어먹으면서 건강하게 자랐다. 건강할 뿐만 아니라 영민하고 똑똑해서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게다가 보통 상민들처럼 주어진 신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부당한 계급제도를 저항해서 서당 공부를 하는가하면 결국은 과거까지 응시하고 마는 특출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들은 본능적인 모성애만 베풀어주면 만족해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고귀한 아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그녀자신이 의식화되어야만 했다.
아들이 21세때 국모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한 일본인을 척살한 데서부터 그녀의 길고 긴 옥바라지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황해도에서 인천감영으로 이감될 때 그녀는 가사를 전폐하고 아들을 따라가 끼니를 보살폈고 그나마 여의치 못할 땐 물상객주집에 식모로 들어가 그 품삯으로 하루 세끼 아들에게 사식을 넣으면서 수해동안 옥바라지를 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 니가 죽으면 우리도 따라 죽는다."는 말로 아들을 위로했던 마음 여린 어머니에 불과했다.
한때 떡장수까지
그러나 십수년 뒤 다시 국사강도범으로 아들이 17형을 받고 서대문교도소에 구속되었을 땐 이미 씩씩한 투사처럼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먼저 그녀는 단단한 각오로 집과 가재도구를 팔아 서울로 옮긴 뒤 떡장수를 하면서 옥바라지를 했고, 면회날이 되면 아들 앞에 "나는 니가 경기감사가 된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힘주어 말하며 아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했다. 비록 그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일본인 간수에게 굽신거리며 들어왔을지언정 아들 앞에서는 조금도 굴함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라고 하겠네."
그리고 임정 때의 일이었다. 교묘히 형사의 눈을 피해 중국의 아들 곁으로 간 그녀는 지도자가 된 아들을 보고 "나는 이제부터 너라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만 나무랄지언정 자네에 매로 때리지도 않겠네." 라고 말하면서 이젠 자신의 아들이기보다는 나라에 필요한 중요한 인물임을 은근히 시사했다. 그러니까 나라의 몸이 한갓 어머니에게 좌우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들의 모든 것을 우러러 존중하면서도 단 한가지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아들 김구가 제 아내에게 잘못 대하는 것이었다. 소위 나라살림을 맡고 있다는 군자가 자식을 잉태하는 지어미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 사랑인들 진실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은 아들로 인해 의식화되기 시작했지만 곧 아들을 다스릴 수 있는 덕과 도량을 겸비한 곽낙원 여사, 동서고금을 통해 그 어느 성현의 어머니보다 위대한 것은 아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한평생을 노력했다는 바로 그 점일 것이다.
▣ 김윤만 - 그래서 우리는 한겨례. . . . .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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