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9끝. (27세 효종)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1-25 05:57 조회1,638회 댓글0건

본문

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9끝. (27세 효종)



우리 범신라김씨의 鼻祖---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중 가장 높은 사람---이신 태보공 김알지로부터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까지의 선조님들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1. 시조대왕 金閼智(알지) ---65(탈해이사금 9)∼?

2. 勢漢(세한)

3. 阿道(아도)

4. 首留(수유)

5. 郁甫(욱보)

6. 仇道(구도) ---172년, 188년, 189년, 190년

7. 末仇(말구) 291년(유례이사금 8) 정월에 이벌찬(伊伐飡)이 됨

-----------형제 미추 : ?∼284(유례이사금 1). 신라 제13대왕. 재위 262∼284.

8. 奈勿王(내물왕) ---?∼402. 신라 제17대왕. 재위 356∼402

9. 卜好(복호) ---412년 고구려에 인질로, 418년 신라로 귀환

-----------형제 눌지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58, 신라 제19대왕, 재위 417∼458

10. 習寶(습보)

11. 智證王(지증왕) --- 437(눌지왕 21)∼514(법흥왕 1). 신라 제22대 왕. 재위 500∼514

12. 眞宗(진종)

13. 欽運(흠운) ---?∼655(태종무열왕 2). 내물마립간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잡찬(#잡19飡) ★달복(達福)

14. 摩次(마차)

15. 法宣(법선)

16. 義寬(의관) ---670년, 680년

17. 魏文(위문) ---712년 중시(=시중)

18. 孝讓(효양)

19. 元聖王(원성왕) ---?∼798(원성왕 14).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

20. 禮英(예영)

21. 均貞(균정)

22. 神武王(신무왕) ---?∼839(신무왕 1). 신라 제45대왕. 재위 839년 4월∼7월.

23. 文聖王(문성왕)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

24. 安(안) ---857년, 862년

25. 敏恭(민공) ---880년

26. 實虹(실홍)

●27. 孝宗(효종) ---902년, 아명은 ★화달(化達), ★인경(仁慶)의 아들

28. 敬順王(경순왕) 신라56대 끝임금







27. 김효종(金孝宗)



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의 화랑·대신. 아명은 ★화달(化達).



문성왕의 후손으로 서발한(舒發翰:이벌찬의 별칭) ★인경(仁慶)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아버지이다. 그냥 효종랑(孝宗郎)이라고도 불린다.



화랑으로 있을 때 낭도로부터 분황사(芬皇寺) 동리(東里)에 사는 ★지은(知恩)이 그 부모를 극진히 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효성에 감복, 부모에게 청하여 조〔粟〕 100석과 의복을 보내어 지은의 살림을 돕게 하였다.



이에 그의 무리들 또한 곡식 1천석을 거두어 지은을 도와주었다. 이리하여 지은은 자신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곡식을 변상하여 줌으로써 양민(良民)이 되었다고 한다.



이 미담이 진성여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지은에게 곡식 500석과 집 한채를 내려주었으며, 병사를 보내어 그의 집을 지켜주었다.



또한 뒤에 지은이 사는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효양리(孝養里)라고 하였다 한다. 효종은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진성여왕의 조카, 즉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뒤 902년(효공왕 6) 대아찬(大阿飡)으로서 집사성 시중(侍中)이 되었고, 927년 11월 아들 ★부(傅:경순왕)가 즉위함에 이르러 신흥대왕(神興大王)이라 추봉되었다.



한편 그의 이야기는 화랑도의 의협심을 나타내는 좋은 실례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李基東〉









●김억렴(金億廉)

생몰년 미상.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아버지.

관등은 잡간(#잡01干)이었고,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를 지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대단히 기뻐하며 신라의 종실과 혼인하기를 원했다. 이에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을 천거해 왕건(王建)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욱(郁)으로 뒷날 그의 아들이 ★현종(顯宗)이 되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시(追諡)하였고 욱을 안종(安宗)으로 추봉하였다.

그런데 고려 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왕대종록 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에 태조가 이 주에 거둥하여 비로 삼았으므로 혹은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하였다.”고 하여 신성왕후가 이정언의 딸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협주란 지명은 현종이 즉위한 뒤에 개칭된 것으로 이전에는 대량주군(大良州郡), 또는 대야주군(大耶州郡)으로 불리었다는 점과, 왕비를 군(君)으로 책봉한 예가 고려시대에는 없었다는 것, 또한 《왕대종록》에는 태조의 후비가 25인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29인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왕대종록》의 기록은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時代의 歷史承繼意識(河炫綱, 梨花史學硏究 8, 1975). 〈金東洙〉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5비. 경주김씨(慶州金氏). 잡간(#잡01干)이었던 ★억렴(億廉)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이를 환영하면서 한편으로 신라왕실과의 결혼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경순왕은 큰아버지 억렴의 딸이 인품과 용모가 뛰어나 태조의 배필됨에 부족함이 없다고 추천하니 왕비로 삼았다.

태조는 이러한 결혼을 통하여 양 왕실이 결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분혈통적 고귀성을 보장받고, 또 한편으로는 친신라계 호족을 포섭하는 데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성왕후에 대하여는 신라왕족이 아니고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이씨(李氏)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태조와의 사이에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고, 안종은 경종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신성왕태후로 추봉하였으며, 능은 정릉(貞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前期의 王室婚姻에 對하여(河炫綱, 梨大史苑 7, 1968). 〈鄭容淑〉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3비. 합주(陜州:지금의 陜川) 사람이며 대광(大匡) 이원(李元)의 딸이다. 부인의 이름에 붙은 대량은 신라말·고려초의 합천지방 이름 이므로 출신지 명을 따서 왕비의 이름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자 첫머리에 후(後)가 붙어 있으며, 이는 선(先)·전(前)에 대칭되어 사용되는 용어이므로 태조 후비 가운데 그에 합당한 인 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전)대량원부인의 이름을 가진 태조 후비는 보이지 않으므로 비록 이름은 다르더라도 대량지방과 관계있는 인물을 찾아보면, 태조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聖王 后金氏)가 있다.

신성왕후에 대해서는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라는 《삼국유사》 보주와 신라 경순왕의 종매라는 《삼국사기》 설의 두 설이 있지만, 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이 대량주 태수를 역임한 일이 있으므로 후설의 경우에도 대량지방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대량원부인은 태조비 신성왕후와 비견되어 후대량원부인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량지방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관문이며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해인사 승군의 도움으로 전세를 만회한 접전지였다. 이러한 전투 요충지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태조는 자신의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참고문헌

高麗史, 고려시대의 后妃(정용숙, 民音社, 1992)

高麗前期의 王室婚姻에 대하여(河炫綱, 梨大史苑 7, 1968). 〈鄭容淑〉









●안종(安宗)

?∼996(성종 15). 고려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 이름은 ★욱(郁).

고려 태조의 여덟째아들로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의 딸인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김씨이다.

집이 개성 송악산(松嶽山)의 왕륜사(王輪寺)남쪽에 위치하며, 부근에는 경종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사제(私第)가 있었다. 마침 경종이 죽고 헌정왕후가 그 사제에 나가 있던 중 그와 친하게 지냈다가 서로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사수현(泗水縣: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에 유배되고,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은 뒤 곧 죽었다. 그리하여 어린현종은 성종에 의하여 길러지다 두살 때 유배지에 있는 그에게 보내어져 성장하게 되었다.

안종은 문장에 능통하고 또 지리(地理:圖讖)에도 밝아 죽으면 묻힐 묘지까지 정해놓았다고 한다.

1009년 왕위에 오른 현종은 1017년(현종 8)그의 묘를 건릉(乾陵)에 이장하고 후에 무릉(武陵)이라 칭하였으며, 추존하여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였다가 1021년 효의대왕(孝懿大王)이라 고치고, 묘호(廟號)를 안종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宗室世系表(岡田英弘, 朝鮮學報 9, 1956). 〈黃雲龍〉











▣ 김항용 - 고생하셨습니다. 정리하여 본 홈 <김씨계통도>에 올리겠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태서 - 수고하셨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