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 김사달박사 서울 묵적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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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1-25 10:07 조회1,562회 댓글0건본문
<김사달 박사 묵적기행>
오늘(2003. 1. 24)은 그동안 미뤄 오던 김사달 박사님의 서울 묵적기행을 나섰다. 주회님께서 서울에 있는 종친들께 은근히 부탁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서울에 있으면서 더욱이 방학을 맞고 있는 나로서 이 일을 빨리 서둘지 않고 있는 것이 괜시리 죄스럽기까지 했다.
오전에는 전화로 현지에 실제의 묵서가 있는지 부터 문의하였다. 서울간호전문대는 아무 작품도 없다고 한다. 연세대도 그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한 의학협회에서는 주자의 <秋日偶成>은 없고 한글로 된 것만 있다고 한다.
점심을 서둘러 먹고 지하철을 3호선을 타고 먼저 안국역에서 내려 창덕궁 입구의 현판인 <敦化門>을 촬영한 다음 택시를 타고 감사원으로 향했다. 입구 수위실에서 사진 촬영 목적을 말하니 그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란다. 글씨 주인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허락을 받아 청사 안의 잘 가꾸어진 정원으로 가니 동쪽 끝을 연하여 바위가 서 있다. 멀리서도 금새 알 수 있었다. <公明正大>--.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나왔다. 그리고 곧 푯말에 간단한 소개를 할 수 있도록 자료를 이곳 홍보국으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이곳서 멀지 않은 세검동의 북악호텔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 벽에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김사달 박사님의 <前赤壁賦>였다. 잃었던 자식을 찾은 듯 반가웠다. 먼저 지배인을 만나 촬영 목적을 말하니 신기한 듯 내 말을 경청한다. 마침 책상에 컴퓨터가 있어 우리 홈과 김사달 박사 소개내용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그 작품의 작자와 글의 내용, 작품연대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안타까웠다. 곧 소개 내용을 정리하여 전달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지배인은 꼭 그 작품 아래에 안내문을 부착해 놓겠다고 한다.
이어 택시로 여기서 가까운 곳인 홍제동의 서울 간호대학으로 갔다. 전화상으로는 서봉박사의 작품이 없다고 했으나 그래도 입구 어디엔가 현판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역시 아무리 찾았으나 없었다. 허전한 마음을 뒤로하고 택시로 홍제역으로 갔다.
3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다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이촌역에서 내렸다. 대한 의학협회를 가기 위해서다. 약 15분을 걸어 찾아갔다. 총무국장님은 나를 창고에 있는 작품 하나로 안내한다. 한글(예서)로 쓴 <의사인의 윤리강령(?)>이였다. 한자로 쓴 주자의 <秋日偶成>은 10여 년 전 대강당을 현 동아홀로 바꾸면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없어졌다고 한다. 동아홀로 들어가 쌓여 있는 액자들을 살폈으나 역시 없었다.
국장님은 김사달 박사에 대한 대강을 알고 있었다. 김박사님은 괴산이 고향이라는 것, 이곳에서 공보이사(?)를 했다는 것, 아들도 현재 의사라는 것과 그 아드님이 아버님의 작품들이 있으면 잘 관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 등을 말해 주었다. 추후라도 김박사님의 작품이 나오면 연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저녁 6시가 되었다. 이때 동승동의 <한국 문화진흥원>으로부터 서봉 박사님의 도자기 작품에 대한 전화상의 질문에 대한 답이 왔다. 그 작품은 현재 전시는 하지 않고 있으나 보관은 하고 있단다. 작년 경매시 임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다소 안심은 되었다. 누군가 우리 문중인이 샀으면 하는 생각이다.
지하철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많이 걸었던지 다리도 아프고 몹시 허기지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길가의 순대집에서 따끈한 어묵과 순대를 샀다. 집에 들어와 아들놈과 함께 먹는데 이놈의 먹성이 무섭다. 그래, 많이 먹거라. 그리고 잘 자라다오.
▣ 솔내 -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서봉박사님도 이런 정성을 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김은회 -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김주회 -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네요. 감사합니다. 묵적기행을 읽는 동안 눈으로도 보고 있는 듯 생생합니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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