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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송천서원 배향인물 최유경과 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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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09-21 21:03 조회2,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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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회씨가 쓰신 글 중에서 송천서원에 안렴사공 김사렴과 같이 배향된 인물중 최유경에 대한

자료가 있어 참고로 올립니다.



최유경은 전주최씨로 문정공 최재의 아들입니다.

최유경의 부인은 안동김씨인데,

아버지는 상락군 김묘(문온공파 자료중 상락군 김묘 비문 참조)

할아버지는 양간공 김승택(문온공파 자료중 양간공 김승택 묘비문 참조)

증조는 판서공 김선, 고조는 충렬공 김방경 입니다.

최유경의 부인은 바로 문온공 김구용의 매제가 됩니다.

문온공의 매부(매제)들을 살펴보면



문온공의 아버님 상락군 김묘(*여흥군부인 여흥민씨=급암 민사평의 무남독녀)는



生三男九女하였으니 장자가 吾파조 문온공 휘 구용이요, 차자는 중의대부 중서병부랑 중겸 첨서하남북등처행 추밀사로서 종질인 밀직사사 부사공 휘 정등과 모주신돈하다 사괴로 역살당한 자 중현 휘 제안이니, 그 독자인 휘 부를 시조로 하여 사천 김씨로 분권하였다. 말자는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판율하고 딸이 태종의 명빈으로 입궁한 판돈녕부사 시 안정공 휘 구덕이라. 차계가 안정공파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之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상락군 김묘 선조는 아들 삼형제중에서 두명, 사위 9명중 2명이 시호를 받았다.

김구용--문온공

김구덕--안정공

김사안--충강공

최유경--평도공





시호 [諡號]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시호는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나라 주공(周公)부터이다. 한국에서는 514년(신라 법흥왕 1)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여 증시를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일반 관리의 경우에는 봉상시(奉上寺)에서 주관하였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수는 194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나중에 봉상시의 건의에 따라 새로 107자를 첨가하여 모두 301자를 시호에 쓰게 되었다.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 ·정(貞) ·공(恭) ·양(襄) ·정(靖) ·양(良) ·효(孝) ·충(忠) ·장(莊) ·안(安) ·경(景) ·장(章) ·익(翼) ·무(武) ·경(敬) ·화(和) ·순(純) ·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착한 행장이 없고 악하고 사나운 일만 있던 사람에게는 양(煬) ·황(荒) ·혹(惑) ·유(幽) ·여() 등이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의 직품이 시호를 받을 만한 위치라면 후손들은 시호를 청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좋지 않은 글자가 쓰인 시호가 내려질 경우에도 다시 시호를 청하거나 개시를 청할 수 없었다. 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여러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디지탈한국에서 인용하면.







최유경(崔有慶)



최유경(崔有慶)

1343(충혜왕 복위 4)∼1413(태종 13).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선부전서(選部典書)상호군 득평(得枰)의 손자로, 감찰대부(監察大夫) 재(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로 군부정랑(軍簿正郎) 윤류(允#유35)의 딸이다.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郎)이 되어 각 도의 의염(義鹽)의 염분(鹽盆)이 강호(强豪)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진달하여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고, 이어 사헌부장령이 되어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던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를 탄핵하였다.

1375년(우왕 1) 전법사총랑(典法司摠郎)이 되고, 1388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가 되어 전민(田民)의 폐단을 고찰하여 바로잡았다. 이해 여름 요동정벌(遼東征伐)때 서북면전운사 겸 찰방으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고, 최영(崔瑩)이 실각한 뒤에도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즉위하여 개국공신에 이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녹훈할 때, 앞서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 충의를 칭찬함으로써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395년에 경상도도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로서 경기·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유하고, 그 이듬해 중추원부사로서 왕의 사명을 띠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에게 궁온(宮#온16)과 관교(官敎)를 전하여 선위(宣慰)하였다.

같은해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경기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右都都觀察黜陟使)로 나가는 등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여러 차례 왕의 특사로 중임을 수행하였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이 되었고, 그해 육조와 대간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404년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최유경의 아버지 최재



최재(崔宰){2}

1303(충렬왕 29)∼1378(우왕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재지(宰之). 선부전서(選部典書) 득평(得枰)의 아들이다.

1321년(충숙왕 8)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로 출발, 산원(散員)·별장(別將)을 거쳐 133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 복위연간에 중부령(中部令)과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지내고, 충목왕 즉위초에는 전법정랑(典法正郎)을 거쳐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외보(外補)되어 백성을 잘 다스렸으나 권신 인승단(印承旦)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권문세가의 토지·노비 등의 부당한 탈점을 정리할 때 판관(判官)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전객부령(典客副令)·자섬사사(資贍司使)로 옮겼다.

1349년(충정왕 1) 양주수(襄州守)로 나가 있던 중 원나라의 강향사(降香使) 가 존무사(存撫使)를 부당하게 욕보이는 것을 보고 개탄, 항의의 표시로 사직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오히려 감찰장령(監察掌令)에 특진되었다.

공민왕 즉위 후 개성소윤(開城少尹)·전법총랑(典法摠郎)·감찰집의(監察執義)·상서우승(尙書右丞)·대부시사(大府寺事)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왕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을 만큼 많은 치적을 올렸다.

1359년(공민왕 8) 다시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출보되었으며, 1361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옮겼다. 이해 겨울 홍건적의 재침으로 피난하는 왕을 상주에서 맞게 되는데, 호종하였던 관리들의 참소로 파직되었으나 1364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기용되고,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전리판서(典理判書)와 개성윤(開城尹)을 역임하였으며, 1374년 벼슬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우왕 때에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를 제배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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