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 金士廉 ⑧(영모재, 송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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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21 03:38 조회2,088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金士廉 ⑧(영모재, 송천서원)
▣ 영모재 및 송천서원 관련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모재 안내서>
영모재와 재직사
영모재는 1678년(戊午) 안렴사공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재실로 써내려 왔고, 1988년(戊辰)에 대폭 중수하였으며 재직사도 동시에 개축하였다.
<영모재 안내판>
2. 永慕齋에 대하여
안렴사공의 산소를 숙종4년에 찾으니 공의 충절을 사모하던 士林들이 慕(茅?)亭 비슷이 영모재를 묘하에 세우고 詩書를 강론하였다.
그후 최명곡(★최석정) 선생이 주무가 되어 松泉에 서원을 세워 공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시었다.
영모재는 송천서원 전신으로 공의 묘소의 재궁으로 쓰여 오고 묘지명이 [사모할모자] 慕亭里로 전하여 왔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천서원(松泉書院)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에 있는 서원. 1695년(숙종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①김사렴(金士廉, 1335-1405), ②최유경(崔有慶, 1343-1413), ③이정간(李貞幹, 1360-1439), ④박광우(朴光佑, 1495-1545)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옥산면 송천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1년에 松泉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그뒤 ⑤이지충(李之忠, 1509-1562), ⑥조강(趙綱, 1527-1599), ⑦이대건(李大建, 1550-1574), ⑧이제신(李濟臣, 1536-1584), ⑨이인혁(李寅爀, 1634-1710), ⑩최석정(崔錫鼎, 1646-1715), ⑪남구만(南九萬, 1629-1711), ⑫박문수(朴文秀, 1691-1756), ⑬이종성(李宗成, 1692-1756), ⑭이효석(李孝碩, ?-1491), ⑮김여량(金汝亮, 1603-1683)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에 훼철되었다.
광복후 지방유림이 복원계획을 공의하여 오던중, 국조보조를 받아 1975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5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모현문(慕賢門)과 양 옆의 협문으로 된 삼문(三門), 4칸의 모현재(慕賢齋), 5칸의 수호사(守護舍), 정문(旌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사렴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이인혁, 남구만, 최석정, 박문수, 이종성, 이효석, 김여량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재실은 제향때 제관들의 숙소와 강학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수호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 7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750평, 논 2,000여평 등이 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 충청북도지(충청북도, 1975), 청주시지(청주시, 1976) <신동호>
<청원군 문화유적>
송천서원(松泉書院)
소재지 :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송천서원은 1695년(조선숙종21, 연려실기술 별집에는 1707년 숙종33년에 세웠다고 했다) 청주목 서강외 이하면 환희리 (오늘의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마을) 에 안렴사 오은 김사렴(1335-1405) 외 6인(★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을 모신 서원인데 (증보문헌비고 권211 학교고 10)
<청원군 지명지>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서원터 : 송천마을 뒤에 있었다. 지금은 오창면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빗돌만 남아 있다.
1723년(경종3) 에 1인(★이제신) 을 추향하고 (윗책 같은조)
영조때(1724-1776)에 2인(★이인혁, 최석정) 을 추향하고 (여지도서, 청주목 단조조)
1798년(정조22)에 4인(★남구만, 박문수, 이종성, 이효석) 을 추향하며 (청선고, 조두록), 원생 15인과 자모생 15인을 뽑았다. (충청도읍지, 청주목 군총조)
그러나 1871년(고종8)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는데
1976년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은행정마을에 다시 세우고 1인(★김여량)을 추향하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서원은 1978년에 중건하고 1984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5칸, 측면2칸 맛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崇慕詞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현재 안동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송천서원 배향인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김사렴
② 최유경(崔有慶)
1343(충혜왕 복위 4)∼1413(태종 13).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선부전서(選部典書)상호군 득평(得枰)의 손자로, 감찰대부(監察大夫) 재(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로 군부정랑(軍簿正郎) 윤류(允#유35)의 딸이다.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즉위하여 개국공신에 이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녹훈할 때, 앞서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 충의를 칭찬함으로써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404년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大宗實錄, 國朝人物考, 戊辰回軍功臣의 冊封顚末과 그 性格(朴天植, 全北史學 3, 1979). 〈朴天植〉
③ 이정간(李貞幹)
1360(공민왕 9)∼1439(세종 2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고부(固夫). 원종공신 구직(丘直)의 맏아들이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집의를 거쳐 1405년(태종 5)강화부사가 되었다.
이때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를 인마의 살상없이 포획하여 비단을 하사받았다.
그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고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러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여 가내가 공순하기로 소문났다. 이에 세종은 궤장(#궤02杖)을 내리고 교서를 보내어 그 효행을 표창하였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人物志. 〈李存熙〉
④ 박광우(朴光佑)
1495(연산군 1)∼1545(명종 즉위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필17齋)·잠소당(潛昭堂). 생원 인(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유성(張有誠)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형 광좌(光佐)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상처를 입고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정부외랑(政府外廊)에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첨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李彦迪)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李東吉〉
⑤ 이지충(李之忠)
1509(중종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원로(元老), 호는 삼우당(三友堂). 예조판서 승건(承健)의 손자이며, 순력(詢力)의 아들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37년(중종 32)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그 문하에는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사귀는 사람들도 모두 당시 이름있는 선비들이었다.
1553년(명종 8)이조의 천거로 동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평생을 경사(經史)에 깊이 파고들어 책을 손에서 놓은 때가 없었으며, 여가에는 붓을 들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역시서집람 易詩書輯覽》을 편찬하고, 《이정전서 二程全書》·《주자대전》·《춘추좌전 春秋佐傳》을 초록하여 집에 보관하여두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李貞一〉
⑥ 조강(趙綱)
1527(중종 22)∼1599(선조32).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거(叔擧), 호는 모계(慕溪). 아버지는 교위(校尉) 승윤(承胤)이며, 어머니는 평양조씨(平壤趙氏)로 황(璜)의 딸이다.
처음 정사현(鄭思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과 송인수(宋麟壽)를 사사하였다.
1568년(선조 1)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70년 청주의 유림들과 합의하여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산과 보은에서 의병 2, 000여명을 일으켜 청주에서 적을 격멸, 전공을 세웠고, 의주의 행재소에 수집한 군량미를 바쳤다.
그뒤 청주의 솔재에서 왜적을 대파하였고, 창의사(倡義使)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거두어 배로 운반하여 명나라의 지원군을 도왔다.
뒤에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모계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慕溪集. 〈權五虎〉
⑦ 이대건(李大建)
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립(汝立), 호는 오촌(梧村). 원(#원50)의 증손이다.
선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숙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어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참고문헌
東國文獻備考, 號譜. 〈兪炳勇〉
⑧ 이제신(李濟臣)
이제신 영석재
이제신 필적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 병마사 문성(文誠)의 아들이며, 영의정 상진(尙震)의 손자사위이다.
17세 때 용문산으로 조욱(趙昱)을 찾아가 학업을 닦고, 1558년(명종 13)생원시에 합격, 이어서 156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는 행서·초서·전서·예서에 모두 뛰어났다.
1584년 경연관 이우직(李友直)의 특청으로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청백리에 책록되었다. 양근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강집》·《청강소설》·《진성잡기 鎭城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과천의 〈상붕남묘비 尙鵬南墓碑〉와 〈이현령인손묘갈 李縣令仁孫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崔完基〉
⑨ 이인혁
⑩ 최석정(崔錫鼎)
최석정 필적
최석정 필적
1646(인조 24)∼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명길(鳴吉)의 손자로,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후량(後亮)의 아들이며, 응교 후상(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에 이미 《시경》과 《서경》을 암송하였고, 12세에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서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하였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발령받음으로써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야승 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 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 明谷集》 36권이 현재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明谷集, 昆崙集, 燃藜室記述, 淸選考, 黨議通略. 〈朴光用〉
⑪ 남구만(南九萬)
남구만사당
남구만 영정
남구만 영정
남구만 필적
남구만 필적
남구만 필적
남구만 화첩
1629(인조 7)∼1711(숙종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1651년(효종 2)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전적·사서·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84년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남기고 있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 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글씨로는 좌상남지비(左相南智碑), 찬성장현광비(贊成張顯光碑), 개심사(開心寺)·양화루(兩花樓)·영송루(迎送樓)의 액자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朝鮮金石總覽. 〈柳承宙〉
⑫ 박문수(朴文秀)
박문수 기념비
박문수 영정
박문수필적
1691(숙종 17)∼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이고, 세마(洗馬) 선(銑)의 손자로,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다른 신하들과 함께 《탁지정례 度支定例》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각전각궁공상정례 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 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 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 尙方定例》 3권을 합한 것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黨議通略, 增補文獻備考. 〈柳承宙〉
⑬ 이종성(李宗城)
이종성 필적
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시대 영조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1749년 지돈녕(知敦寧)·우빈객(右賓客)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承政院日記, 金石錄, 恩坡集. 〈李棕浩〉
⑭ 이효석
⑮ 김여량(金汝亮)
1603(선조 36)∼1683(숙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 자는 명보(明甫), 호는 오소재(吾巢齋).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노(#노34)이며, 어머니는 배천조씨로 헌(憲)의 딸이다.
김집(金集)·민재문(閔在汶)의 문인이다.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부임했던 군현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70세가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의 갈천(葛川)위에 오소재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오소재집》 2권 1책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趙基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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