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렬공의 강화도 관련 역사 유적자료 소개(본 홈 소개 내용)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3-02-04 19:39 조회2,140회 댓글0건

본문

<본 홈에 수록된 충렬공의 강화도 관련 역사 유적자료 소개>

 가.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강남중학교 앞 마을)는 충렬공께서 한 때 사시던 곳

  (1)문헌 자료 소개

   (가)<강화사(江華史)>(1994. 1. 25. 강화 문화원간. 성지문화사. P 940 )에 의하면 "고려 고종때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께서 한 때 이곳에 살았다 하여 원수리(元帥里)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온수리(溫水里)>로 된 것이며, 그가 살던 집의 현판을 해령당(海寧堂)이라고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했다 한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나)<길상지>(吉祥誌)>(1995. 8. 15. 강화군 길상면지 편집위원회 간. 남주문화사 인쇄. P 155)에 의하면 현 온수3리를 <해란당(海蘭堂)>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 원래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게가 민물과 짠물이 교차되는 이곳에서 알을 낳고 짠물로 간다 하여 <해란당(蟹卵堂)>이라 부르던 것을 일본 식민지 시절에 어음 변화와 표기 잘못으로 <해랑(海浪)>이라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또 다시 와전되어 <해란(海蘭)>이 되었고 또 고목(편집자 주:현 온수3리 마을 중앙의 가치집이 있는 느티나무. 아래 사진 참조.)이 있는 근처에 당(堂) 집이 있었다(편집자 주:현 온수3리 고목나무 옆에 거주하고 있는 강순례씨가 전에 살았던 집-현 강남중학교 뒤-이 당집이었다고 함)고 전한다.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란당이라 부르고 있다." 고 한다.

 (2) 현지 지명:인천 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3리 (강남 중학교 앞 마을)

 (3) 자료 제공 및 확인 과정

   (가)2001. 1. 28. 김은회(金銀會-익원공파 20대손.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거주.)씨 최초 제공

   (나)2001. 2. 5. 김항용(홈페이지 관리자), 강화문화원 남궁순씨께 문의, 문헌자료 확인.

   (다)2001. 2. 24. 김항용. 현지 탐방 확인. 촬영.

      *대담자:(1)柳東九(강화군 길상면 온수3리 현지 주민. 강남중학교 앞 문구점 경영. 길상지 편집위원장 역임).

                  (2)강순례(온수3리 현지 주민. 고목나무 옆 거주.)

 (4) 현지 사진 자료

 onsu1.jpg  onsu3.jpg 

<온수3리 느티나무>(2001. 2. 24. 촬영. 100여년 전 이 느티나무 앞은 바다였음)

 

onsu4.jpg  

 <온수3리 전경>(충렬공께서 사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전경)

 count.php?id=34 나. 충렬공께서 축조하신 강화도의 뚝과 제방

  * 자료 제공 : 2001. 4. 9. 본 홈페이지 게시란에  銀會(익)님 제공

   1)강화(江華)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 항몽 유적지이다. 또한 이곳은 사면이 바다이어서 짠물이 수시로 넘나들어 황무지가 사방에 방치되어 있었고, 갈대밭으로 덮혀 있어 곡식을 심을 수 없었다.  이에 고려 고종(高宗)25년(1248년), 조정에서는 북녘의 많은 민간인들을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여 간척사업을 했다.

   이때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부임한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강화도의 여러 곳에 제방과 뚝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게 하였으며, 돌피씨를 심게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해에 이 돌피가 잘 여물어 해마다 몽고와의 병란으로 배를 굶주려 왔던 강화도 군민들은 비로소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사업 초기에는 의심에 가득 찬 민심으로 인해 심한 원망을 사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공은 민심을 크게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 뿐만아니라 이때 강화도에는 물이 매우 귀했는데, 공께서는 축성한 뚝 안에 빗물을 저수할 수 있도록 마련 하였다. 그리고 농사철에는 이 물을 논에 대게 하여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얼음을 깨고 그 물을 식수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2) 이때 축조한 제방과 뚝은 제포(悌浦), 와포(瓦浦), 이포(裡浦), 초포(草浦) 뚝 등인데, 이곳에 둔전(屯田:주둔병사의 군량미를 자급자족 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광성(廣城), 굴곶(屈串), 만월(滿月), 오두(鰲頭), 가리(加里) 뚝 등도 모두 이때에 축성 하였다고 한다.

  3) 뚝과 제방 소재지

     제포(悌浦) 와포(瓦浦) 뚝- 강화군 송해면 승천포 부근. 고려시대에 별궁이 있던 곳(상관)으로 그 동리 이름(상관리)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포(裡浦) 뚝- 1256년 선원면에 축조하였다.

 




▣ 김재이 - 항상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다시 보아도 눈이 번쩍 뜨이는 내용과 사진을 보았습니다.
▣ 김은회 -
▣ 김윤만 - 제포, 와포를 비롯한 상기 제방 모두를 충렬공께서 축조하신것으로 보고 있나요?
▣ 김항용 - 아직은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좀더 확증적인 자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 솔내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