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대관上 16 ---안렴사공 묘소발견과 영모재 건립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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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05 03:27 조회1,491회 댓글0건본문
오은대관上 16 ---안렴사공 묘소발견과 영모재 건립 (1678)
안렴사공 할아버지 사후 273년후에 묘소발견 및 영모재 조성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3-2 안렴사공 묘소 발견 및 영모재 조성 (1678)
▣ 오은선생 행장 (?1768, 13대손 김래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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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4년 무오(=1678)에 ★양성현감(=金吹)이 도산 위에 갔다가 실전된 무덤을 발견하게 되어 그 곁에 조금 새겨 둔 표지를 근거로 삼아 비로소 선생의 묘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었으니 아! 기이한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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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1802이전, 홍양호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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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숙종 戊午년(=1678)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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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렴사김공 묘갈록 (1830, 남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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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代가 점점 멀어져 葬地를 잃었는데, 숙종4년 戊午(무오-1678) 에 공의 증손 양성현감 ★吹(취)의 잃어버린 무덤을 찾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表石을 자세히 살펴보아 비로소 공의 幽宅(유택)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時享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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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렴사공 신도비문 (1840이전, 남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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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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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말의충절 김사렴 (1996, 김재윤 청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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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타계한 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 戊午)에 후손들이 공의 증손인 양성공 吹의 실전된 묘소를 탐색하던 중, 석곽 중의 誌石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본 결과 뜻밖에도 공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묘소가 알려지게 됨으로써 혹시 어떤 화가 미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또한 다시 실전하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작은 징표만을 남겨 미봉을 한 채 내려오다가, 조선 왕조가 망한후 1938년(戊寅) 2월에 가서야 봉분을 개축하고 신도비와 비각등 제반 石儀를 마련하여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양지바른 언덕으로서 그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있고 그 사이로는 금강 줄기가 유유히 굽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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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러한 충절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공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1678(戊午)에 공의 묘소 아래에 永慕齋(영모재)를 건립하고 講學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齋室로 이용해 왔고, 1988년 戊辰에 齋直舍와 함께 중수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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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모재 안내서
안렴사공 묘소
공이 하세하신 뒤에 유명에 따라 평총을 하였는데 병란과 시세혼란으로 실전되었다가 1678년(몰후 273년만인 숙종4년 무오년)에 지석의 발견으로 묘지를 확인하여 미봉을 하였고,
1938년(무인) 2월에 다시 봉축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 영모재 안내서
○ 영모재와 재직사
영모재는 1678년(戊午) 안렴사공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재실로 써내려 왔고, 1988년(戊辰)에 대폭 중수하였으며 재직사도 동시에 개축하였다.
▣ 영모재 안내판
○ 永慕齋에 대하여
안렴사공의 산소를 숙종4년에 찾으니 공의 충절을 사모하던 士林들이 慕(茅?)亭 비슷이 영모재를 묘하에 세우고 詩書를 강론하였다.
그후 최명곡(★최석정) 선생이 주무가 되어 松泉에 서원을 세워 공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시었다.
영모재는 송천서원 전신으로 공의 묘소의 재궁으로 쓰여 오고 묘지명이 [사모할모자] 慕亭里로 전하여 왔다.
▣ 1999도산유적정화보수기 (2000, 영모재)
○ 영모재의 보수
영모재는 1678년(숙종4)에 창건된 이래 많은 보수공사가 있었고, 특히 1988년에 대폭적인 중수사업을 시공하였으나 지금에 蓋瓦(개와)가 파손되어 누수가 됨으로써 도리, ○목이 부식하여 장차 倒壞(도괴)의 우려가 있어 이를 모두 교체 개○하고 재실 전체를 일신하게 개보수하였다.
소요공비 2,500만원은 본 종회에서 2,100만원, 익원공파에서 100만원, 서운관정공파에서 300만원을 헌성하였다.
○ 조경정화사업
예년 묘역관리와 정화에 정성을 기울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왕년에 진천종친회장을 역임하신 故 思永 宗長이 위선 지성이 투철하여 소영하는 조림사업을 계기로 관상수를 헌수하여 가꾸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사되거나 부실하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 令胤(영윤) 聖演 족친이 금반사업에 적극 협력하여 관상수 다수를 영단 복원처를 비롯한 묘역 전체에 식재 미화하는 한편 다시 헌성금 60만원을 헌납하는 등 위선의 지성을 다하였음을 특기하여 둔다.
○ 敍上(서상) 공사는 乙卯(1999) 早春부터 계획하여 양년간 사업으로 시행되었는바 어간에 익원공, 서운관정공 양파 및 좌랑공파를 비롯하여 각 소파와 독지 자손들의 참으로 심저에서 용출하는 정성이 아니면 성수하지 못하였을 것이라 사유되어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한편 계제에 이 중대한 사업을 주간하여 不避風雨 不顧家事(불피풍우 불고가사)하고 심시늬 고난을 격어 내면서 설계, 시공, 재원조달과 중역에 이르기까지 헌신적 사명을 다한 在澤 파종회장과 在均총무의 막중한 노고를 치하하고 영모재와 신도비 공사를 맡아 완벽하게 시공을 한 正會 종친의 성력을 가상하며 또한 수시로 협조와 조언을 주신 문로 및 종회임원 여러분의 성의를 절감하면서 여사한 기운으로 더욱 종문의 영광과 발전이 있을 것을 (北+異)望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서기 2000년 庚辰 4월 일
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종회장 在華 識
▣ 김항용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지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 솔내영환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이 - 잘 보았습니다
안렴사공 할아버지 사후 273년후에 묘소발견 및 영모재 조성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3-2 안렴사공 묘소 발견 및 영모재 조성 (1678)
▣ 오은선생 행장 (?1768, 13대손 김래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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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4년 무오(=1678)에 ★양성현감(=金吹)이 도산 위에 갔다가 실전된 무덤을 발견하게 되어 그 곁에 조금 새겨 둔 표지를 근거로 삼아 비로소 선생의 묘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었으니 아! 기이한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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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1802이전, 홍양호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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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숙종 戊午년(=1678)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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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렴사김공 묘갈록 (1830, 남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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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代가 점점 멀어져 葬地를 잃었는데, 숙종4년 戊午(무오-1678) 에 공의 증손 양성현감 ★吹(취)의 잃어버린 무덤을 찾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表石을 자세히 살펴보아 비로소 공의 幽宅(유택)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時享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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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렴사공 신도비문 (1840이전, 남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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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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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말의충절 김사렴 (1996, 김재윤 청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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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타계한 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 戊午)에 후손들이 공의 증손인 양성공 吹의 실전된 묘소를 탐색하던 중, 석곽 중의 誌石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본 결과 뜻밖에도 공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묘소가 알려지게 됨으로써 혹시 어떤 화가 미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또한 다시 실전하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작은 징표만을 남겨 미봉을 한 채 내려오다가, 조선 왕조가 망한후 1938년(戊寅) 2월에 가서야 봉분을 개축하고 신도비와 비각등 제반 石儀를 마련하여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양지바른 언덕으로서 그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있고 그 사이로는 금강 줄기가 유유히 굽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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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러한 충절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공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1678(戊午)에 공의 묘소 아래에 永慕齋(영모재)를 건립하고 講學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齋室로 이용해 왔고, 1988년 戊辰에 齋直舍와 함께 중수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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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모재 안내서
안렴사공 묘소
공이 하세하신 뒤에 유명에 따라 평총을 하였는데 병란과 시세혼란으로 실전되었다가 1678년(몰후 273년만인 숙종4년 무오년)에 지석의 발견으로 묘지를 확인하여 미봉을 하였고,
1938년(무인) 2월에 다시 봉축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 영모재 안내서
○ 영모재와 재직사
영모재는 1678년(戊午) 안렴사공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재실로 써내려 왔고, 1988년(戊辰)에 대폭 중수하였으며 재직사도 동시에 개축하였다.
▣ 영모재 안내판
○ 永慕齋에 대하여
안렴사공의 산소를 숙종4년에 찾으니 공의 충절을 사모하던 士林들이 慕(茅?)亭 비슷이 영모재를 묘하에 세우고 詩書를 강론하였다.
그후 최명곡(★최석정) 선생이 주무가 되어 松泉에 서원을 세워 공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시었다.
영모재는 송천서원 전신으로 공의 묘소의 재궁으로 쓰여 오고 묘지명이 [사모할모자] 慕亭里로 전하여 왔다.
▣ 1999도산유적정화보수기 (2000, 영모재)
○ 영모재의 보수
영모재는 1678년(숙종4)에 창건된 이래 많은 보수공사가 있었고, 특히 1988년에 대폭적인 중수사업을 시공하였으나 지금에 蓋瓦(개와)가 파손되어 누수가 됨으로써 도리, ○목이 부식하여 장차 倒壞(도괴)의 우려가 있어 이를 모두 교체 개○하고 재실 전체를 일신하게 개보수하였다.
소요공비 2,500만원은 본 종회에서 2,100만원, 익원공파에서 100만원, 서운관정공파에서 300만원을 헌성하였다.
○ 조경정화사업
예년 묘역관리와 정화에 정성을 기울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왕년에 진천종친회장을 역임하신 故 思永 宗長이 위선 지성이 투철하여 소영하는 조림사업을 계기로 관상수를 헌수하여 가꾸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사되거나 부실하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 令胤(영윤) 聖演 족친이 금반사업에 적극 협력하여 관상수 다수를 영단 복원처를 비롯한 묘역 전체에 식재 미화하는 한편 다시 헌성금 60만원을 헌납하는 등 위선의 지성을 다하였음을 특기하여 둔다.
○ 敍上(서상) 공사는 乙卯(1999) 早春부터 계획하여 양년간 사업으로 시행되었는바 어간에 익원공, 서운관정공 양파 및 좌랑공파를 비롯하여 각 소파와 독지 자손들의 참으로 심저에서 용출하는 정성이 아니면 성수하지 못하였을 것이라 사유되어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한편 계제에 이 중대한 사업을 주간하여 不避風雨 不顧家事(불피풍우 불고가사)하고 심시늬 고난을 격어 내면서 설계, 시공, 재원조달과 중역에 이르기까지 헌신적 사명을 다한 在澤 파종회장과 在均총무의 막중한 노고를 치하하고 영모재와 신도비 공사를 맡아 완벽하게 시공을 한 正會 종친의 성력을 가상하며 또한 수시로 협조와 조언을 주신 문로 및 종회임원 여러분의 성의를 절감하면서 여사한 기운으로 더욱 종문의 영광과 발전이 있을 것을 (北+異)望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서기 2000년 庚辰 4월 일
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종회장 在華 識
▣ 김항용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지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 솔내영환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이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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