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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97)마지막 혼신을 기울여-4- 남북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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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2-14 20:36 조회1,5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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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님의 일생을 통해 근세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1948년 2월 선생님은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회담을 제안하셨으니



우여곡절 끝에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이때의 4김이라 불리는 분은, 김구, 김규식, 김두봉,김일성 이 네분입니다.



남북 연석회의을 제안하실 즈음 선생님은 북한에 있는 김두봉에게 글을 보내셨습니다.



이 글은 1948년 2월 16일 비밀리에 소련군 대표부와 유엔위원단을 통하여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선생님의 민족통일에 대한 집념과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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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白淵) 인형(仁兄)혜감(惠鑑)



1944년 연안(延安)에서 주신 혜찰(惠札)을 배독(拜讀)한 이후 미구에 고국을 찾아오게 되었나이다.



그때에 있어서야 누가 한 나라 하늘 밑에서 3,4년의 긴 세월을 경과하면서도 서로 대면하지 못할 것을



뜻하였으리까. 아아, 이것이 우리에게는 해방이라 합니다. 이 가운데 묻히어 있는 쓰라리고 서러운



사정을 말하면 피차에 열루만 방타할 뿐이니 차라리 일컫지 아니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입니다.



여하간 우리는 자유롭게 고국의 땅을 밟았습니다. 우리의 원수 왜구를 구축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환국할 수 있는 자유를 준 두 동맹국의 은혜를 무한히 감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사갈(蛇蝎)의 독구를 벗어난 우리 삼천만 동포도 두 동맹국의 은혜를 깊이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환희에 넘치는 광명한 정면이 있는 동시에, 우리에게 은혜를 준 두 동맹국 자체간의



모순으로 인하여 암담한 반면도 없지 아니합니다.





인형(仁兄)이여, 이것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弟)는 가슴이 답답하고 인형이 보고싶을 때마다 때묻은 보따리를 헤치고 일찍이 중경(重慶)에서



받았던 혜찰(惠札)을 재삼 읽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나에게 보냈다는 이러한 전문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今年三月先生給學武君的貴函, 今十月初才收到, 我們今日一切以民族利益爲基準, 不應有些毫成見,



我們對先生來延一次的意向無任歡迎」(금년 3월 선생이 학무 군 편에 보낸 편지는 10월초에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모든 것을 겨레의 이익을 기준으로 조그만 자기의 주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선생이 연안에 오신다는 의향을 환영해 마지않습니다.)





또 나와 각 단체로 보냈다는 이러한 전문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我們不問地域南北, 派別異國, 誠心團結別實事連絡, 如能促進會師鴨綠之實現, 諸位若能同意,



淵可以從中斡旋」(우리들은 지역의 남북과 파벌의 다름을 묻지 말고, 성심으로 단결하고 참되게



연락하여 능히 압록강에서 군대를 만날 수 있도록 실현하는 것을 촉진시키는 일에 여러분들이



동의한다면 나는 중간에 알선해 드리겠습니다.)





또 이러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금차 신중(信中) 연락과 통일을 위하여 노신(老身)이 일차 부연(赴延)하면 한·중 양방면이



환영할 가망이 있겠는지?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성심으로 환영할 뿐 아니라 중(中) 방면에서도



물론 환영합니다.」





인형(仁兄)이여, 금일 우리의 환경은 그때와 방불(彷彿)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 조국의 통일이 실현되고 자주 독립이 완성될 때까지는 우리의 임무를 태만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무방대(無旁貸)인 데야 제도 여생이 진하기 전에 최후의 노력을 다하려니와 인형도



우리에게 현안이 되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심각히 책임을 느끼실 줄로 확신합니다.





인형(仁兄)이여, 아무리 우방 친우들이 호의로써 우리를 도와주려 한다하여도 우리 자체가 지리멸렬하



여 그 호의를 접수할 준비가 완료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접수할 것입니까. 그리하여 미·소 공위도



성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금차 UN 위원단의 공작도 하등의 효과를 거둘 희망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찌하겠습니까. 자연에 맡기고 약속된 독립을 포기하겠습니까.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선 이남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아니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합석하는 것을 희망하지도



아니하지마는 기실은 절망하고 이것을 선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不似)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이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사(尤史 ; 김규식의 아호), 인형과 제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만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連書)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나 남북에 있는 진정한



애국자의 힘이 큰 것이니 인동차심(人同此心)이며 심동차리(心同此理)인지라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장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인형이여, 김일성 장군께는 별개로 서신을 보내거니와 인형께서 수십년 한 곳에 공동 분투한



구의(舊義)와 4년 전에 해결 못하고 둔 현안 해결의 연대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최속한 기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남쪽에서는 우리 양인이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단어장(紙短語長)하여 미진소회(未盡所懷)하니 하루라도 일찍 회음(回音)을 주사이다.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포의 자유 행복을 위하여 인형께서 노력 자애하시기를 축도하면서 불원한



장래에 우리에게 면서(面敍)할 기회가 있기만 갈망하고 붓을 놓나이다.



1948. 2. 16.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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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 1889-? ) 연보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정치가, 경상남도 동래출생, 호는 백연 白淵



1906년 서울로 상경



기호학교 (畿湖學校:중앙보통학교의 전신), 배재학교에 다님



1913년 대동청년단에 가입



1914년 배재학교 중퇴



당시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 소년잡지《청춘》을 편집하는 일에 종사함, 조완구(趙琓九)와 함께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관계함.



1916년 주시경(周時經)밑에서 한글연구에 몰두. 광문사에서 발행한《말모이》편찬에 참여



1917년 보성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시간강사를 지냄



1919년 3.1운동에 한위건(韓偉健)등과 함께 참여



1919년 4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상해로 망명, 상해에서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있던 순한문 신문인《신대한신문 新大韓新聞》의 편집을 맡아서 일함, 신문발행이16호로 중지되자 김규식(金奎植)등의 신한청년당(신한청년당)에 가담. 대한민국임시정부초창기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의원을 지냄.



1920년 이동휘(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모임에 가담하여 공산당에 입당,



1922년 중국 상해(上海)의 새글집사에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



1923년 고려국(일명 고려공산당 총무국)의 간부로 활동



1924년 상해 교민단의 학무위원장에 선출되어 교민자녀교육기관인 인성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리침.



1928년 12월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시로 해산되자, 홍남표(洪南杓)·조완구 등과 함께 대한독립당성립촉성회에 참여,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한 각파혁명이론비교연 구회에 가담, 한인학우회의 강연 등에 참여



1935년 김원봉(金元鳳)과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인민혁명당으로 개칭)을 결성 중앙 위원으로 활동(김원봉은 김두봉의 조카임). 이후 민혁당 내에서 김원봉계와 이청천계의 내분으로 이청천계가 제명되어 따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지만 김두봉은 이같은 내분에 관여하지 않음. 김두봉은 중앙위원으로 남아 군관학교 졸업생을 각지에 파견하고 중국측의 학일전에 협력하는 한편 당소속 청년들을 중앙군관학교 성자분교에 입학시켜 훈련을 받게 하는 일을 도움.



1937년 후베이성(湖北省) 자링으로 근거를 옮김, 다시 중칭으로 활동무대를 바꿈.



1942년 중경을 떠나 연안(延安)으로 가서 연안정치학교장을 맡음.



연안은 당시 중국팔로군의 근거지로서, 중국 국민당 및 임시정부와 관계를 유지하 던 김원봉과 노선을 달리하여 최창익(崔昌益)·무정(武丁)·한빈(한빈) 등과 더불 어 42년 7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주석에 취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공산주의 활동보다는 반일투쟁의 운동가로서 평가받음, 주석에 취임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통합의 상징으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임.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국내의 건국동맹 등과 대일연합전선형성을 위하여 연락하던 중 광복을 맞음



1945년 12월 독립동맹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



1946년 조선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 주석에 취임. 당시 소련의 지원를 받던 김일 성과는 달리 조선의 혁명단계를 신민주주의혁명단계로 규정, 모택동의 중국혁명전 략을 수용.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46년 8월 조선신민당이 조선공산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될 때 부위원장에 선출. 김일성대학 총장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의장



1947년 11월 조선임시헌법초안제정위원회 위원장



1948년 4월 임시헌법 초안 보고



1948년 9월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49년 3월 평양사동연탄공장 종업원 대회, 김두봉을 77호구 대의원 입후보자로 추천



1949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스탈린 탄생 70주년 기념 경축대회 참석



,1957년 8월 조선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으로 선출



1958년 3월 노동당 제1차 대표자 대회에서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축출됨.



1960년 지방협동농장에서 사망(설).













▣ 김윤만 - "전 김일성대학 총장 김두봉 지방협동농장에서 사망하다." 기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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