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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사>에 보이는 선안동김씨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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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2-15 05:05 조회1,7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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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사에 보이는 선안동김씨 후예 ▣





◎ 김보욱(金普郁).(p391)



--앞에 나온 (☞ 효자) 김창구(金昌九)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그 아버지의 효행을 본받아 부친이 조부의



산소에 갈 때면 돌을 주워 탑을 쌓고 겨울이면 눈을 쓸어 조부의 산소에 무사히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의 부친이 91세 되던 겨울에 병이 위독하여 얼음 물에 목욕하고 조부의 산소에 가서 기도하기를 마치



부친이 조부를 위하듯 하여 부친 병이 나아 3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852년 철종조에 당시의 유수



황호민(留守 黃浩民)이 나라에 주달하여 1854년에 정문을 세웠다.





◎ 김용우(金用雨).(p423)



--양도면 출신으로 안동김씨이니 일찍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후



배재중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방부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영국 대사를 거쳐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한 명사이다.



☞ 본 게시판 03. 1.13. 주회 아우님이 올리신 전서공파 김용우(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편을 살펴보면



김용우의 "아버지는 종우(鍾宇), 어머니는 전영애(田英愛)이며, 부인은 심양순(沈良順)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 아래의 김용하는 김용우의 증보부이고 김종우는 부친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우(金恩雨).(pp451)



--양도면 출신으로 안동인이니 연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입교대학 철학과를 마치고 미국 콜럼비아



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한국기독교신문사 기자로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어



국제 펜클럽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어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받은 명사



이다.





◎ 김용하(金容夏).(pp488)



--안동김씨로 호는 계암(啓巖)이니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했고 나무하러 가서도 반드시 자습하여



성장하면서는 성리학에 힘썼다. 효행이 돈독하여 한 고을에 명성이 높았다. 유지 전병규(田炳奎)씨와 친교를



맺어 문학과 도의에 밝은 지사엿다. 이어서 시대성에 맞춰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고 전병규씨와 함께



기독교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교육의 선구자로 이름을 떨쳤다.





◎ 흥천(興天)학교.(pp559)



--양도면 삼흥리에 있었다. 1918년에 학자이며 군자(君子)의 칭호를 받은 김용하(金容夏)와 지사 전병규



(田炳奎)가 동심 협력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보창(普昌)이라 하였다. 재력이 풍부하지 못하였으나



면내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김용하와 전병규, 지선주의 봉사적 교수생활 10여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18년 4월 1일에는 사립 흥천학교라고 명칭을 고치었다. 원래 이 흥천학교 설립자 전병규와 김용하 선생은



기독교 신자로서 선교회의 보조도 많이 받아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를 6년제로 하였다. 1929년 12월 23일



양도공립보통학교가 인가됨에 따라 사립 흥천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광대한 양도면에 1개 학교로서는



취학 아동을 모두 수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통학거리 관계로 1938년 4월 1일 부설간이학교를 조산에 세웠다.



1938년 4월 1일에는 양도공립심상소학교로 명의를 변경하였다가 1943년 4월 1일 양도공립국민학교로 다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43년 4월 1일 조산간이학교가 조산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가 1954년 4월 1일에는 양도국민학교로 개칭



하였다.





◎ 김종우(金鍾宇).(pp488)



--안동김씨로 용하(容夏)의 손자이며 한학에 능하였고 기독교인으로 박애정신이 투철하여 빈민구제와



농사개량에 선구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제(日帝) 하에도 망명 임시정부 요인과 교신한 바 있고 이동휘



(李東輝)· 전병규(田炳奎) 등과 상호 제휴하여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의 활동 상황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정동교회 전도시로 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감리사(監理師)로 부흥목사로



활약한 명사이다.





◎ 김영우(金榮禹).(pp490)



--안동김씨로 공신 김사형(功臣 金士衡)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후하여 착한 일을 하기 좋아



하더니 농사에 힘써 늙도록 일하면서 남의 군색함을 보면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도와주었다. 부모의 유산을



없애기도 힘들 터인데 하물며 열 손가락이 다 닳도록 일하며 모은 재물로 사람을 도와주는데 조금도 인색



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가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출전 : 증보 강화사/증보강화사편찬위원회/1983>





▣ 김은회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윤식 - 대부님 자료 분석 기가 막힙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강화도와 우리가문 자료가 착착 쌓여가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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