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오은대관下 16 --- 안렴사공 말년의 스승 및 제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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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16 03:03 조회1,655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말년의 스승과 제친우
★우탁 禹倬 [1263~1342]
고려 후기의 유학자.
본관 : 단양(丹陽)
호 : 백운(白雲) ·단암(丹巖)
별칭 :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
본관 단양(丹陽).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다.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하였으며, 단양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현 [1298~1377]
고려시대의 학자.
본관 : 평산(平山)
별칭 : 자 신경(信敬), 시호 문정(文貞)
활동분야 : 문학
본관 평산(平山). 자 신경(信敬). 시호 문정(文貞).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원(元)나라에 가서 주공천(朱公遷) ·허겸(許謙) ·전당(錢唐) 등 학자들과 교유, 당시 대학자로 추앙받았다. 명(明)나라에 자주 초빙되었으며 명제(明帝)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고 불훤재(不芋齋)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용희 申用羲
고려문신. 초명은 晃(황), 자는 文 (문화), 호는 簡齋(간재), 유학자 賢(불훤재)의 아들,
1333년(충숙왕복위2)에 문과에 문과와 중시에 각각 급제, 충혜왕때 한림, 충정왕때 교도관겸직학사가 되었으나 재직 3개월만에 뜻이 안 맞아서 사직, 공민왕때 판문하부동평장사겸총판제감어사로 임명되었고, 우왕때 평성부원군에 봉해졌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제가 현의 아들이란 말을 듣고 술을 내리고 은청광록대부이부상서대광화해사에 임명했다. 이듬해 명나라에서 죽자 명황제가 文暄(문훤)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 한국인명사전 참조)
★우현보 禹玄寶 [1333~140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 단양(丹陽)
별칭 : 자 원공(原功), 시호 충정(忠靖)
활동분야 : 정치
본관 단양(丹陽). 자 원공(原功). 시호 충정(忠靖).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어서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우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삼사좌사를 역임하였다. 1388년(우왕 14) 찬성사(贊成事) 때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해 요동정벌 때 경성유수를 지냈고, 좌시중(左侍中) 때 파직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삼사판사(三司判事)로 있을 때 이초(路初)의 옥사(獄事)에 연루,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조선 개국 뒤 다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398년(태조 7) 복관(復官)되어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난 때, 이래(李來)로부터 반란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李芳遠:태종)에게 알린 공으로 난이 평정된 후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이 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원천석 元天錫 [1330(충숙왕1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
본관 : 원주(原州)
호 : 운곡(耘谷)
별칭 : 자 자정(子正)
활동분야 : 학자
주요저서 : 《야사(野史)》《회고가》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어,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직접 그를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김사안(金士安)
?∼1391(공양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방경(方慶)의 4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천46)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며 부인은 당숙 묘(昴)의 딸이다.
1388년(우왕 1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으며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숭인 李崇仁 [1349~1392]
고려 말기의 학자.
본관 : 성주
호 : 도은
별칭 : 자 자안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도은집》
본관 성주(星州). 자 자안(子安). 호 도은(陶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곧 장흥고사(長興庫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명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다.
우왕 때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하다가 한때 유배, 그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전임하였으나 친명(親明)·친원(親元) 양쪽의 모함을 받으며 여러 옥사(獄事)를 겪었다.
조선이 개국할 때 정도전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黃巨正)에게 살해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들도 탄복하였다. 저서에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이색 李穡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 ·학자.
본관 : 한산(韓山)
호 :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별칭 : 자 영숙(潁叔)
활동분야 : 정치, 철학
주요저서 :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덕린 申德隣 [?~?]
고려 말기의 서예가.
본관 : 고령(高靈)
호 : 순은(醇隱)
별칭 : 자 불고(不孤)
활동분야 : 예술
본관 고령(高靈). 자 불고(不孤). 호 순은(醇隱). 문과에 급제하고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우왕 때 시학(侍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분이 있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광주(光州)에 낙향, 은거하여 조선시대에는 출사(出仕)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서예에 뛰어났고 특히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여 ‘덕린체(德隣體)’라고까지 불리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해동명적 海東名蹟
역대명가(歷代名家)의 글씨를 탁본(拓本)한 책.
지정번호 : 보물 제526호
소장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玉山里) 이해철(李海徹)
시대 : 조선
크기 : 25×37.2 cm
종류 : 탁본책
보물 제526호. 2권 2책. 25×37.2 cm.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玉山里) 이해철(李海徹) 소장. 조선 중종(中宗) 때의 서가 ·문신 신공제(申公濟:1469∼1536)가 탁본한 것으로 상책에는 조선의 문종(文宗)과 성종(成宗)의 어필을 권두에 놓았고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김생(金生) ·영업(靈業)의 3인과 고려의 탄연(坦然) ·이암(李Fx) ·신덕린(申德隣)의 3인을 합하여 8인의 글씨가 수록되어 있다.
하책에는 조선의 이강(李岡) ·승려 혜근(慧勤) ·성석린(成石璘) ·박초(朴礎) ·권근(權近) ·이첨(李詹)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민자복(閔子復) ·신색(申穡)과 무명씨 등 12인 글씨가 수록되어 있다. 비록 탁본이기는 하나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며 신라와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 서가들의 필적은 거의 금석(金石)을 통하지 않고는 얻어보기 어려운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비갈(碑碣)에 나타나지 않은 진적(眞蹟)을 수집 ·모각하여 더욱 소중하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김윤만 - 김사안(金士安)의 부인이 당숙 묘(昴)의 딸이니 고려시대에는 근친인 6촌간에도 혼인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 김윤만 - 김사안(金士安)의 부인이 당숙 묘(昴)의 딸이니 고려시대에는 근친인 6촌간에도 혼인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 김은회 -
▣ 김재원 -
▣ 솔내영환 - 충강공(김사안)과 부인은 8촌간입니다. 당숙이아니라 재당숙(7촌)입니다. 이 부분은 좀더 자료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탁 禹倬 [1263~1342]
고려 후기의 유학자.
본관 : 단양(丹陽)
호 : 백운(白雲) ·단암(丹巖)
별칭 :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
본관 단양(丹陽).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다.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하였으며, 단양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현 [1298~1377]
고려시대의 학자.
본관 : 평산(平山)
별칭 : 자 신경(信敬), 시호 문정(文貞)
활동분야 : 문학
본관 평산(平山). 자 신경(信敬). 시호 문정(文貞).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원(元)나라에 가서 주공천(朱公遷) ·허겸(許謙) ·전당(錢唐) 등 학자들과 교유, 당시 대학자로 추앙받았다. 명(明)나라에 자주 초빙되었으며 명제(明帝)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고 불훤재(不芋齋)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용희 申用羲
고려문신. 초명은 晃(황), 자는 文 (문화), 호는 簡齋(간재), 유학자 賢(불훤재)의 아들,
1333년(충숙왕복위2)에 문과에 문과와 중시에 각각 급제, 충혜왕때 한림, 충정왕때 교도관겸직학사가 되었으나 재직 3개월만에 뜻이 안 맞아서 사직, 공민왕때 판문하부동평장사겸총판제감어사로 임명되었고, 우왕때 평성부원군에 봉해졌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제가 현의 아들이란 말을 듣고 술을 내리고 은청광록대부이부상서대광화해사에 임명했다. 이듬해 명나라에서 죽자 명황제가 文暄(문훤)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 한국인명사전 참조)
★우현보 禹玄寶 [1333~140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 단양(丹陽)
별칭 : 자 원공(原功), 시호 충정(忠靖)
활동분야 : 정치
본관 단양(丹陽). 자 원공(原功). 시호 충정(忠靖).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어서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우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삼사좌사를 역임하였다. 1388년(우왕 14) 찬성사(贊成事) 때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해 요동정벌 때 경성유수를 지냈고, 좌시중(左侍中) 때 파직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삼사판사(三司判事)로 있을 때 이초(路初)의 옥사(獄事)에 연루,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조선 개국 뒤 다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398년(태조 7) 복관(復官)되어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난 때, 이래(李來)로부터 반란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李芳遠:태종)에게 알린 공으로 난이 평정된 후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이 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원천석 元天錫 [1330(충숙왕1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
본관 : 원주(原州)
호 : 운곡(耘谷)
별칭 : 자 자정(子正)
활동분야 : 학자
주요저서 : 《야사(野史)》《회고가》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어,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직접 그를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김사안(金士安)
?∼1391(공양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방경(方慶)의 4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천46)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며 부인은 당숙 묘(昴)의 딸이다.
1388년(우왕 1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으며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숭인 李崇仁 [1349~1392]
고려 말기의 학자.
본관 : 성주
호 : 도은
별칭 : 자 자안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도은집》
본관 성주(星州). 자 자안(子安). 호 도은(陶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곧 장흥고사(長興庫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명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다.
우왕 때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하다가 한때 유배, 그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전임하였으나 친명(親明)·친원(親元) 양쪽의 모함을 받으며 여러 옥사(獄事)를 겪었다.
조선이 개국할 때 정도전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黃巨正)에게 살해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들도 탄복하였다. 저서에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이색 李穡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 ·학자.
본관 : 한산(韓山)
호 :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별칭 : 자 영숙(潁叔)
활동분야 : 정치, 철학
주요저서 :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덕린 申德隣 [?~?]
고려 말기의 서예가.
본관 : 고령(高靈)
호 : 순은(醇隱)
별칭 : 자 불고(不孤)
활동분야 : 예술
본관 고령(高靈). 자 불고(不孤). 호 순은(醇隱). 문과에 급제하고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우왕 때 시학(侍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분이 있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광주(光州)에 낙향, 은거하여 조선시대에는 출사(出仕)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서예에 뛰어났고 특히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여 ‘덕린체(德隣體)’라고까지 불리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해동명적 海東名蹟
역대명가(歷代名家)의 글씨를 탁본(拓本)한 책.
지정번호 : 보물 제526호
소장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玉山里) 이해철(李海徹)
시대 : 조선
크기 : 25×37.2 cm
종류 : 탁본책
보물 제526호. 2권 2책. 25×37.2 cm.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玉山里) 이해철(李海徹) 소장. 조선 중종(中宗) 때의 서가 ·문신 신공제(申公濟:1469∼1536)가 탁본한 것으로 상책에는 조선의 문종(文宗)과 성종(成宗)의 어필을 권두에 놓았고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김생(金生) ·영업(靈業)의 3인과 고려의 탄연(坦然) ·이암(李Fx) ·신덕린(申德隣)의 3인을 합하여 8인의 글씨가 수록되어 있다.
하책에는 조선의 이강(李岡) ·승려 혜근(慧勤) ·성석린(成石璘) ·박초(朴礎) ·권근(權近) ·이첨(李詹)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민자복(閔子復) ·신색(申穡)과 무명씨 등 12인 글씨가 수록되어 있다. 비록 탁본이기는 하나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며 신라와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 서가들의 필적은 거의 금석(金石)을 통하지 않고는 얻어보기 어려운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비갈(碑碣)에 나타나지 않은 진적(眞蹟)을 수집 ·모각하여 더욱 소중하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김윤만 - 김사안(金士安)의 부인이 당숙 묘(昴)의 딸이니 고려시대에는 근친인 6촌간에도 혼인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 김윤만 - 김사안(金士安)의 부인이 당숙 묘(昴)의 딸이니 고려시대에는 근친인 6촌간에도 혼인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 김은회 -
▣ 김재원 -
▣ 솔내영환 - 충강공(김사안)과 부인은 8촌간입니다. 당숙이아니라 재당숙(7촌)입니다. 이 부분은 좀더 자료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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