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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上 27 --- 안렴사공6자 김식과 손자 김자려, 김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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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21 06:36 조회1,8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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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上 27 --- 안렴사공6자 김식과 손자 김자려, 김자형





안렴사공의 막내아들이신 좌랑공(김식)은 안렴사공파보 (1914 갑인보)에 의하면 태조2년 癸酉에 문과급제하여 이조좌랑을 역임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측하여 보면 안렴사공께서 고려수절신으로 은둔하게 되면서 장자 김간, 3자 김위, 4자 김제, 5자 김약은 유명에 따라 관직을 버리고 오창에 은둔하신 듯 하나, 다만 막내인 6자 김식은 태조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출사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좌랑공(김식)께서도 그후에 오창 부근인 진천군 문백면 막동에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마치시고 유명평총에 따라 평총으로 하여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다행히 100여년후에 誌石이 발하여 묘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 직장공(김자료)의 장자의 유택이 있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로 좌랑공(김식)과 직장공(김자려)의 묘소를 면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전에 문중 어르신께 좌랑공(김식) 할아버지의 墓誌石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여쭈어 보았으나 면봉시에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4-7. 안렴사공6자 좌랑공(김식)과 손자 직장공(김자려),서령공(김자형)



4-7-1 안렴사공6자 좌랑공(김식)



■ 안렴사공파보 (1988 무진보)

이조좌랑을 지냈고, 공은 진천군 문백면 막동에 은거하여 문학으로써 평생을 마치었는데, 문하에 문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좌랑(佐郞)은 조선시대 6조에 소속되어 있던 정5품 관직으로 각 조(曹)마다 3명씩을 두었으며 병조(兵曹)에는 1명을 더 두었다고 한다.



묘소는 유명평총 (아버지 안렴사공의 遺命에 따라 평총하고 따라서 평총하여) 으로 실전되었다가 돌아가신지 백여년후에 수남리 (현 천안시 동면) 후산에서 지석을 발견하여 후손들이 공실묘소를 가봉총토하였다. 건좌이고 묘비와 석상이 있다.

배는 진천송씨로 전서 송광우의 딸이며, 조부는 문하평소 송소, 증조는 찬성사 송지백, 외조는 판사 남양 홍원노이다.



1997년 장손 (김식-1/2김자려- 1/3극) 김극의 유택이 있는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에 이안하였다. 이때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에 있던 직장을 지낸 큰아들 金自麗(김자려)의 묘소도 (노장우撰 권영구書 비와 석상이 있음) 함께 이안하였다.



■ 여말의충절 김사렴 (1996, 김재윤)

공(=안렴사)의 유언으로 남긴 遺命平塚(유명평총)은 공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공의 아들  (약)과 湜(식)은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아 역시 평총을 하였는데,  (약)의 묘소는 그 뒤 실전되어 설단을 차려 묘하에서 향사를 받들어 왔었고, 湜(식)의 묘소는 다행히 몰후 100여년 만에 충남 천원군 동면 수남리 뒷산에서 誌石이 발견되어 실전을 면할 수 있었다.



■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서차6 휘★湜(식)공은 관이 이조좌랑이오 배는 상산부인 진천송씨니 부 전서匡佑(광우)지녀이다. 묘재 천안군 동면 수남 후산이었다가 서기 1997년에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지원에 이안하였다.







4-7-2 직장공(김자려)



■ 안렴사공파보 (1988 무진보)

직장을 역임하셨고, 묘는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2-1 유좌로 노장우찬 권영구서 묘비가 있다.

배위는 천안전씨로 父부사 전향, 外祖목사운산 문희로이며 묘는 금숙동계좌이었는데 1987년 정묘 3월 8일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직장(直長)은 고려시대 중앙 관서의 시(寺) ·감(監) ·서(署) ·국(局) ·고(庫) 등에 둔 정 ·종 7품의 관직.







4-7-3 서령공(김자형)



관직은 서령을 지냈다. 묘는 진천군 문백면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 삼보산에 설단하였으며 묘비를 건립하였다.

배는 동래정씨이다.



공은 은거하여 덕?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 여말의 충절 김사렴 (1996, 김재윤)

또한 湜(식)의 둘째아들이며 공의 손자인 自荊(자형)은 임종에 임하여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 두 글자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遺命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안렴사공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너희들은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말며 조상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그 자손들 역시 유지를 받들어, 自荊(자형)도 자기 분묘를 평총으로 하도록 일렀고, 그 때문에 지금도 이 분의 묘소를 알 길이 없다. 이 분은 지금 충북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삼보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 김윤만 - 당시 <평장(총)>이란 봉분을 만들지 아니함은 물론 상석 등 석물 또한 배치하지 아니하는 장례법이었나 봅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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