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정(金水亭)관련 시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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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2-25 07:05 조회1,691회 댓글0건본문
금수정(金水亭)
- - - - - - - - - - - - - - - - - - - -<지은이 : 이서구(李書九)>
푸른 송백 붉은 단풍 먼데에 가득 翠柏丹楓擁一邱(취백단풍옹일구)
금수정 절경에 물은 서으로 가네 名亭勝槩水西頭(명정승개수서두)
냇물은 구비쳐 들판을 살지게 하고 川聲嗼嗼平郊雨(천성막막평교우)
산세는 아름다와 영평을 빛내누나 山勢遙圍小縣秋(산세요위소현추)
나그네 정자에 올라 물색을 살피고 客子登臨分物色(객자등임분물색)
주인은 길게 누워 풍류를 즐기네 主人高臣自風流(주인고신자풍류)
양봉래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蓬萊仙侶今安在(봉래선려금안재)
오직 초승달 빛만 돌위에 비치네. 唯有銀鉤石上留(유유은구석상유)
<출전 : 포천군지/1987/pp760-761>
▣ 李書九(이서구) <薑山(강산)> (전주인)
--영조 30년(1754) 출생했다. 그리고 抱川郡(포천군) 永中面(영중면) 梁文里(양문리)에서 살았다. 선조
제12子(자)인 仁興君(인흥군)의 6대손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學(학)과 德(덕)을 겸비해서 淸濁(청탁)을
분명히 했다. 14세에 부인 평산신씨를 맞아들였는데 書九(서구)의 慈堂(자당)도 평산신씨이다.
--21세에 庭試(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로 있다가 다시 사간원에 정언으로 옮기었다. 정조 초에
대신중에 이서구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가 있어 트집을 잡고 過言(과언)의 足跡(족적)을 일일이 왈가왈부
하므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어 일체 관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여러번 벼슬에 나오게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조용히 글공부에 전념했다. 더욱이 외부와는 접촉을 하지 않고
있은지 오랜 어느날 정조가 이서구에 대한 소식을 탐문하고 그의 인푼과 학식의 아까움을 대신들과 의논하여
그의 기용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이어 병조좌랑 또는 정언 등으로 부름을 받아 침묵을 깨고 드디어
奎章閣講製(규장각강제) 일을 맡게 되었다. 다음에 시강원사서로 特除(특제), 또 다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가
뒤에 응교로 옮기었다.
--어사직으로 영남지방에 다녀온 후 벼슬이 통정대부에 승문원동부승지로 뛰어 올랐다.
--이것이 또 다시 말썽이 되어 島嶼(도서)로 謫置(적치)되었는데, 京第(경제)에 있는 諸臣(제신)들은 모두
잘 되었다고 하였지만 이에 분개한 이서구는 아무런 명령도 안 받은 채 자기 멋대로 돌아왔다. 이에 임금이
대노해서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渭原(위원)으로 옮겼는데 얼마 안가서 나라에서 소환하고 동부
승지에 복직되었다. 이 때 이서구는 밤에 당직근무를 할 때 촛불을 밝히고 나라를 匡救(광구)할 상소를
기초하여 올린 것을 兩司(양사)에서 疏章(소장)을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영변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왕명을 받고 「輿地勝覽(여지승람)」을 纂修(찬수)했으며 「奎章全韻
(규장전운)」도 詳考(상고)했다. 뒤에 또 다시 「尊周彙編(존주휘편)」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具邦俊
(구방준)과 具賢俊(구현준)의 행적이 略記(약기)되어 있는데 병자호란의 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莊陵志(장릉지)」도 집필하였는데, 이는 단종의 역사와 사육신에 관한 내용들이다.
--정조 17년(1793) 40세에 대사헌으로 특진되었다가 대사성으로 전근되었고 또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이 해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이 많으므로 곳집 문을 열어 이들을 구제했는데 이것이 말썽이 되어 그는
寧海(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얼마후에 되돌아 왔다. 이 때 병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역임한 다음에 다시 各司
(각사)에 제조를 지냈고, 그 뒤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고사했고 또 다시 關東(관동)에 감사로 나
아가라고 명하는 것도 나아가지 않았다.
--제조로 있을 때에 便殿(편전)에서 조용히 불러 정치의 道(도)를 의논해 왔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로 소신을
披瀝(피력)하고 어진 사대부를 얻는 방법을 설명하였던 바 임금은 매우 기뻐했다.
--이조참판이 되었을 때에 정조가 昇遐(승하)하고 대비가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많은 대신들이
이서구를 중히 여겼으나 일부에서는 극력 반대하여 수습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자 近臣(근신) 尹行恁
(윤행임)이 증오한 나머지 기회를 틈타 농간을 부려 이서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서구가 正卿(정경)에 오르고 度支(탁지)의 長(장)이 되었는데 이는 대비의 特旨(특지)였다. 그러나
윤행임은 이 때를 놓칠세라 연이어 疏(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여 결국 무인절도에 안치하고 말았다.
--여러 대신들이 충고로 얼마 안되어 돌아왔고, 戶判(호판)에 除授(제수)되어 어쩔 수 없이 복명했다.
--翌年(익년)에 이조판서에 오르고 다시 호조판서로 옮기었으나 兇賊(흉적) 李敬臣(이경신)이 사사건건
헐뜯고 모함하여 다시 귀양을 갔다가 돌아왔다. 그 후에도 글을 계속 올리어 이서구를 비방하므로 관직을
버리고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先代墓舍(선대묘사)로 와서 두문불출하고 15년을 살았다.
--이후 연이어서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모두 불응하자 전라도관찰사로 발령하니 황공해서 藁待命(고대명)
했다. 그 뒤에 홍문관, 예문관제학을 역임했고, 세자빈객 또는 留守(유수) 등을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안가서 그는 左相(좌상)에 올랐는데 이는 순조가 기어이 이서구를 기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조 25년(1825)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나니 그는 당대에 名文章(명문장)으로서 朴齊家(박제가), 李德懋
(이덕무), 柳得恭(류득공)과 더불어 漢文(한문) 4大家(대가)로 손꼽히기도 했다.
--영평의 양문대신으로 이름이 나 있는 이서구는 逸話(일화)도 많이 전한다. 한 번은 앞 강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노라니 어떤 젊은 선비가 侍者(시자)와 더불어 건널목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야 하겠는데 다리는
없고 물이 깊으니 점잖은 체면에 발을 벗고 건널 수도 없고 해서 老翁(노옹)이 양문대신인 줄 모르고 “여
보시오 늙은이”하고 부르니 “왜 그러시오”라고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나 좀 업어 건너 줄 수 없겠소?” 하니
“그렇게 하시오”하고 양문대신은 백발노인 답지 않게 젊은 선비를 업고 강을 건너 한 복판쯤 들어가서 젊
은이가 노옹 귀밑에서 옥관자를 발견하고 거의 기절할 뻔 했다. 다급히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미처
몰라뵙구. . . . ., 여기 내려 놓아 주십시오”하고 부들 부들 떨었다. 이 때 양문대신은 “기왕 반쯤 왔으니
조금만 더 건너갑시다”하고 여유있게 강을 건네 주었다.
--그 때 강가에 양문대신에게 업히어 강을 건너던 선비는 연천에 새로 부임하는 원이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異說(이설)도 있었는데 좌우간 강을 건너게 된 젊은이가 노인에게 황급히 절하면서 “미처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사죄하니 양문대신은 시를 한 수 지어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吾觀世人 是非在口 歸家修己 不然爲亡(오관세인 시비재구 귀가수기 불연위망).”
--그의 墓(묘)는 춘천 남쪽 山外面(산외면) 博義岩(박의암) 悟琴里(오금리) 선영하에 썼고, 墓碣銘(묘갈명)은
영의정 南公轍(남공철)이 撰(찬)했다. 또한 謚狀(익상)은 영의정 金炳學(김병학)이 撰(찬)했고, 神道碑銘
(신도비명)은 우의정 신응조(申應朝)가 撰하고, 우의정 朴珪壽(박규수)가 書刻(서각)했다.
<출전 : 포천군지/1987/pp1136-1137)
▣ 김윤식 - 대부님, 감사합니다. 시간에 쫓겨 귀한 글들 읽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숨 돌리고 나서 밀린 글들 찬찬히 읽겠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주인은 길게 누워 풍류를 즐기네. 주인이 누구일까요?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우회 - 잘보았습니다
▣ 김영윤 -
- - - - - - - - - - - - - - - - - - - -<지은이 : 이서구(李書九)>
푸른 송백 붉은 단풍 먼데에 가득 翠柏丹楓擁一邱(취백단풍옹일구)
금수정 절경에 물은 서으로 가네 名亭勝槩水西頭(명정승개수서두)
냇물은 구비쳐 들판을 살지게 하고 川聲嗼嗼平郊雨(천성막막평교우)
산세는 아름다와 영평을 빛내누나 山勢遙圍小縣秋(산세요위소현추)
나그네 정자에 올라 물색을 살피고 客子登臨分物色(객자등임분물색)
주인은 길게 누워 풍류를 즐기네 主人高臣自風流(주인고신자풍류)
양봉래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蓬萊仙侶今安在(봉래선려금안재)
오직 초승달 빛만 돌위에 비치네. 唯有銀鉤石上留(유유은구석상유)
<출전 : 포천군지/1987/pp760-761>
▣ 李書九(이서구) <薑山(강산)> (전주인)
--영조 30년(1754) 출생했다. 그리고 抱川郡(포천군) 永中面(영중면) 梁文里(양문리)에서 살았다. 선조
제12子(자)인 仁興君(인흥군)의 6대손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學(학)과 德(덕)을 겸비해서 淸濁(청탁)을
분명히 했다. 14세에 부인 평산신씨를 맞아들였는데 書九(서구)의 慈堂(자당)도 평산신씨이다.
--21세에 庭試(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로 있다가 다시 사간원에 정언으로 옮기었다. 정조 초에
대신중에 이서구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가 있어 트집을 잡고 過言(과언)의 足跡(족적)을 일일이 왈가왈부
하므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어 일체 관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여러번 벼슬에 나오게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조용히 글공부에 전념했다. 더욱이 외부와는 접촉을 하지 않고
있은지 오랜 어느날 정조가 이서구에 대한 소식을 탐문하고 그의 인푼과 학식의 아까움을 대신들과 의논하여
그의 기용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이어 병조좌랑 또는 정언 등으로 부름을 받아 침묵을 깨고 드디어
奎章閣講製(규장각강제) 일을 맡게 되었다. 다음에 시강원사서로 特除(특제), 또 다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가
뒤에 응교로 옮기었다.
--어사직으로 영남지방에 다녀온 후 벼슬이 통정대부에 승문원동부승지로 뛰어 올랐다.
--이것이 또 다시 말썽이 되어 島嶼(도서)로 謫置(적치)되었는데, 京第(경제)에 있는 諸臣(제신)들은 모두
잘 되었다고 하였지만 이에 분개한 이서구는 아무런 명령도 안 받은 채 자기 멋대로 돌아왔다. 이에 임금이
대노해서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渭原(위원)으로 옮겼는데 얼마 안가서 나라에서 소환하고 동부
승지에 복직되었다. 이 때 이서구는 밤에 당직근무를 할 때 촛불을 밝히고 나라를 匡救(광구)할 상소를
기초하여 올린 것을 兩司(양사)에서 疏章(소장)을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영변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왕명을 받고 「輿地勝覽(여지승람)」을 纂修(찬수)했으며 「奎章全韻
(규장전운)」도 詳考(상고)했다. 뒤에 또 다시 「尊周彙編(존주휘편)」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具邦俊
(구방준)과 具賢俊(구현준)의 행적이 略記(약기)되어 있는데 병자호란의 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莊陵志(장릉지)」도 집필하였는데, 이는 단종의 역사와 사육신에 관한 내용들이다.
--정조 17년(1793) 40세에 대사헌으로 특진되었다가 대사성으로 전근되었고 또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이 해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이 많으므로 곳집 문을 열어 이들을 구제했는데 이것이 말썽이 되어 그는
寧海(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얼마후에 되돌아 왔다. 이 때 병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역임한 다음에 다시 各司
(각사)에 제조를 지냈고, 그 뒤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고사했고 또 다시 關東(관동)에 감사로 나
아가라고 명하는 것도 나아가지 않았다.
--제조로 있을 때에 便殿(편전)에서 조용히 불러 정치의 道(도)를 의논해 왔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로 소신을
披瀝(피력)하고 어진 사대부를 얻는 방법을 설명하였던 바 임금은 매우 기뻐했다.
--이조참판이 되었을 때에 정조가 昇遐(승하)하고 대비가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많은 대신들이
이서구를 중히 여겼으나 일부에서는 극력 반대하여 수습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자 近臣(근신) 尹行恁
(윤행임)이 증오한 나머지 기회를 틈타 농간을 부려 이서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서구가 正卿(정경)에 오르고 度支(탁지)의 長(장)이 되었는데 이는 대비의 特旨(특지)였다. 그러나
윤행임은 이 때를 놓칠세라 연이어 疏(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여 결국 무인절도에 안치하고 말았다.
--여러 대신들이 충고로 얼마 안되어 돌아왔고, 戶判(호판)에 除授(제수)되어 어쩔 수 없이 복명했다.
--翌年(익년)에 이조판서에 오르고 다시 호조판서로 옮기었으나 兇賊(흉적) 李敬臣(이경신)이 사사건건
헐뜯고 모함하여 다시 귀양을 갔다가 돌아왔다. 그 후에도 글을 계속 올리어 이서구를 비방하므로 관직을
버리고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先代墓舍(선대묘사)로 와서 두문불출하고 15년을 살았다.
--이후 연이어서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모두 불응하자 전라도관찰사로 발령하니 황공해서 藁待命(고대명)
했다. 그 뒤에 홍문관, 예문관제학을 역임했고, 세자빈객 또는 留守(유수) 등을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안가서 그는 左相(좌상)에 올랐는데 이는 순조가 기어이 이서구를 기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조 25년(1825)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나니 그는 당대에 名文章(명문장)으로서 朴齊家(박제가), 李德懋
(이덕무), 柳得恭(류득공)과 더불어 漢文(한문) 4大家(대가)로 손꼽히기도 했다.
--영평의 양문대신으로 이름이 나 있는 이서구는 逸話(일화)도 많이 전한다. 한 번은 앞 강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노라니 어떤 젊은 선비가 侍者(시자)와 더불어 건널목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야 하겠는데 다리는
없고 물이 깊으니 점잖은 체면에 발을 벗고 건널 수도 없고 해서 老翁(노옹)이 양문대신인 줄 모르고 “여
보시오 늙은이”하고 부르니 “왜 그러시오”라고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나 좀 업어 건너 줄 수 없겠소?” 하니
“그렇게 하시오”하고 양문대신은 백발노인 답지 않게 젊은 선비를 업고 강을 건너 한 복판쯤 들어가서 젊
은이가 노옹 귀밑에서 옥관자를 발견하고 거의 기절할 뻔 했다. 다급히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미처
몰라뵙구. . . . ., 여기 내려 놓아 주십시오”하고 부들 부들 떨었다. 이 때 양문대신은 “기왕 반쯤 왔으니
조금만 더 건너갑시다”하고 여유있게 강을 건네 주었다.
--그 때 강가에 양문대신에게 업히어 강을 건너던 선비는 연천에 새로 부임하는 원이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異說(이설)도 있었는데 좌우간 강을 건너게 된 젊은이가 노인에게 황급히 절하면서 “미처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사죄하니 양문대신은 시를 한 수 지어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吾觀世人 是非在口 歸家修己 不然爲亡(오관세인 시비재구 귀가수기 불연위망).”
--그의 墓(묘)는 춘천 남쪽 山外面(산외면) 博義岩(박의암) 悟琴里(오금리) 선영하에 썼고, 墓碣銘(묘갈명)은
영의정 南公轍(남공철)이 撰(찬)했다. 또한 謚狀(익상)은 영의정 金炳學(김병학)이 撰(찬)했고, 神道碑銘
(신도비명)은 우의정 신응조(申應朝)가 撰하고, 우의정 朴珪壽(박규수)가 書刻(서각)했다.
<출전 : 포천군지/1987/pp1136-1137)
▣ 김윤식 - 대부님, 감사합니다. 시간에 쫓겨 귀한 글들 읽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숨 돌리고 나서 밀린 글들 찬찬히 읽겠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주인은 길게 누워 풍류를 즐기네. 주인이 누구일까요?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우회 - 잘보았습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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