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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上 03 ---김영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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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27 03:07 조회1,6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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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上 03 ---김영후2



지난번에 소개한 자료입니다만, 추가로 찾은 자료가 있어서 재편집해서 소개해 봅니다.



고려사등 史書에는 전연 기록이 없지만 정간공(김영후)께서는 1327년(36세) 전후에 경북 상주의 목사를 지내시면서 그곳의 객관인 상산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자료에서 보이고, 당시 충북 보은 법주사의 자정국존(1240∼1327)이 입적시에 상주목사 김영후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며칠전에 우연히 <상주·함창 목민관 (1997, 상주시, 상주산업대학교)>을 구하게 되어 찾아보니, 고려시대인 1343년에 안축이라는 사람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상주객관중영기>를 지었는데, 이중에 정간공(김영후)께서 1327년 상주목사로 재임하시면서 백성들의 고난이 없도록 배려하시면서 상주객관 본관을 중수하시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셨다는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3 상주목사 재직시 상산관 중수 (1327년, 36세)





▣ 상주지 (상주시.군 문화공보실, 1989)

pp 107 (5) 金永煦(★김영후)

---충렬왕(?)때 상주목사가 되었다. 상주는 도로가 팔방으로 통하여 관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客館(객관)이 낡아 불편이 많았다. 먼저 仁愛(인애)로서 百姓(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部下(부하)를 경계하여 善政(선정)을 베풀었다. 1년이 지나자 비로소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이에 役事(역사)를 시작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객관을 준공했다. 뒤에 그는 國相(국상)이 되었다.





▣ 상주·함창 목민관 (1997, 상주시, 상주산업대학교)

●客館記 <略解> ---安軸(안축)

1343년(충혜왕4)에 내가 상주목사로 명을 받고 이해 4월 주에 도임하여 정사를 보니 근래 가옥한 행정에 시달려 민생과 문물이 流散하고 마을들이 모두 쓸쓸하여 옛적에 公廳이나 學宮 神社와 佛寺가 모두 퇴폐하고

오직 客舍만이 웅대하고 수려하여 이쪽 영남에서는 제일 훌륭하여 廳堂과 基位의 규모와 포치가 굉장하며 스스로 여유가 있고 그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혼자 내심에 이는 반드시 속인의 범상하게 만든 것이 아니리 라고 생각되어 邑人에게 물었더니 지금 征東省郞으로 있는 金相國 永煦가 세운 것이라 하였다.

이 州가 8방으로 통달하는 거리에 있어 전령과 奉使하는 자가 하루도비는 날이 없었는데 옛적 객관이 좁고 낮으며 또 연대가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기우러져 있으니 항상 좋지 못함이 손님들의 나무람을 들어왔다.



지난 1327년 4월에 그가 이 州의 목사가 되어 와서 이 객관을 중수할 생각이 있었으나 민생의 노고와 곤궁을 염려하여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仁愛로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고 엄중하게 官紀를 바로잡아 왔다.

얼마후 읍인들이 德治에 힘입어 비로소 생활에 희망을 가지게 되니 이러한 힘을 모아 한번 公恩에 보답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州民을 사역할 수 있음을 알고 재물을 모으고 부역을 명하며 기한을 정하여 起工하니 庶民들이 기꺼이 호응하여 수고로움을 잊고 就役하였으며 豪黨들도 협의하여 힘을 다하니 이렇게 하여 州民을 괴롭히거나 농사에 방해함이 없이 짧은 시일내에 객관이 완성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장하도다. 그가 적은 백성의 힘으로 세웠으나 실은 목사의 지혜로 이룩된 것이다. 州民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이 이러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에 戶와 窓응 얽어 매어 비바람에 대비하는 비유가 있고 書傳에는 아버지가 창업을 하면 자손이 이어서 성공한다는 비유가 있으니 그가 廟堂에 재직하여서 經紀를 세우고 方略을 베풀어서 거듭 王家를 번영하게 한 것을 이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하겠다.







▣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문집 ≫ 문집 제2권 ≫ 기(記) ≫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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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안축)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간. 1997. 326P,337P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 내용(2/3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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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가 입적하기 직전(정묘년, 충숙왕 14년-1327) 12월 1일 아침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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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叔琪는 김승용 묘지명을 술한 분이고

全元發은 척약재 김구용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김방경-(1/5)김선-(1/4)김자-김위-김득남-김정(+★전원발 녀)

김방경-(1/5)김선-(2/4)★김승용

김방경-(1/5)김선-(3/4)김승택-(1/2)김묘-(1/3)★김구용

김방경-(3/5)김순-(4/4)★김영후







▣ 김순묘지명 (1321, 민지 찬)

문영공(휘순)께서

---壬午(임오, =1282년))년에 전중시사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가서 선정한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1년도 못되어 불러들여---

라는 기록이 있어 정간공(휘영후)의 아버지인 문영공(휘순)께서도 1283년에 상주판관을 지내신 것을 알 수 있음











▣ 솔내영환 -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잘 보았습니다. 광한리의 밤풍경을 만끽하고 돌아오셨는지....

▣ 김항용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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