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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오은대관下 03 ---상산관 풍영루와 법주사자정국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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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27 03:09 조회1,6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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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下 03 ---상산관과 법주사자정국존비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상산관지(商山館址)

【관리번호】742-010-069-008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관아·성곽건물(기타)

【소 재 지】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상산관은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상주 고을의 객관으로 활용하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시에 목사(牧師) ★김영후(金永○)가 중수하였다.

15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수한 바 있고 임진왜란시에 다시 전체가 소멸되어 조선 현종(顯宗) 7년(1676)에 목사 이송령(李松○)이 민폐를 끼치지 않고 관원으로 옛자리에 개축하였다.

상산관은 창건 때부터 옛 군청 동편에 위치하였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 교정으로 이축하여 음악실로 활용하였으며,

1988년에 다시 상주시 만산동의 국도 우회로변으로 이건하였다.

현재 남성동에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340.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상주 상산관(尙州商山館)

【관리번호】742-260-061-034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57호

【유적종류】관아·성곽건물(관아건물)

【소 재 지】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 산 73-1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상산관(商山?)은 객관(客?)이다. 창건에 대해서 알 수 없으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충렬왕 33년(1307)에 목사 ★김영후(金永煦)가 중수하였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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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상주문화원, 1997, <<상주문화유적>>, 262.

【비 고】1982. 2. 24. 지정.







▣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157호

명 칭 ●상주상산관 (尙州商山館)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82.02.24

소재지 경북 상주시 만산동 산73-1

소유자 상주시

관리자 상주시



조선시대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내며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이 머무르던 상주목의 객사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 중종 21년(1526)에 화재를 입어 고쳐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또다시 불타 선조 39년(1606)에 다시 세웠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동성동 상주경찰서 자리였으나 1940년에 옮겨져 상주여자중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그 후 다시 만산동으로 옮겨졌다.

가운데에 본관을 두고 양쪽에 동익헌·서익헌이 붙어 있다. 본관은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동익헌은 앞면 7칸·옆면 3칸으로 본관쪽 지붕은 본관과 같은 맞배지붕이고 동쪽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서익헌은 앞면 4칸·옆면 3칸으로 동익헌과 같이 본관쪽은 맞배지붕이고, 서쪽은 팔작지붕이다. 상주 상사관은 현존하는 건물로는 남부지방 최대의 규모이다.



문화재명 상주상산관(尙州商山館)

이 건물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상주목(尙州牧)의 객사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전패(殿牌))를 모시고 초하루·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하며, 또 사신(使臣)을 접대하던 곳이다.

본래 고려(高麗) 때의 것이 조선 중종(中宗) 21년(1526) 화재를 만나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선조(宣祖) 25년, 1592) 때 도 한 차례 불탐으로써 선조 39년(1606) 재건하였다. 처음에는 동성동(東城洞) 현 상주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나 194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서 상주여자중학교의 교실로 이용되어 왔다.

중앙에 주관(主管)을 두고 양쪽에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을 두었는데 모두 초익공식(初翼工式)의 건축이다. 주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이고, 동익헌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주관쪽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동쪽은 팔작지붕이다. 서익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이 역시 주관쪽은 맞배지붕이고 서쪽은 팔작지붕이다.









▣ 상주 함창 목민관 (1997, 상주시, 상주산업대학교)



*고려시대의 목민관

21. 김영후, 1327(충숙왕14) 4월, 정6품 목사



●客館記 <略解> ---安軸(안축)

1343년(충혜왕4)에 내가 상주목사로 명을 받고 이해 4월 주에 도임하여 정사를 보니 근래 가옥한 행정에 시달려 민생과 문물이 流散하고 마을들이 모두 쓸쓸하여 옛적에 公廳이나 學宮 神社와 佛寺가 모두 퇴폐하고

오직 客舍만이 웅대하고 수려하여 이쪽 영남에서는 제일 훌륭하여 廳堂과 基位의 규모와 포치가 굉장하며 스스로 여유가 있고 그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혼자 내심에 이는 반드시 속인의 범상하게 만든 것이 아니리 라고 생각되어 邑人에게 물었더니 지금 征東省郞으로 있는 金相國 永煦가 세운 것이라 하였다.

이 州가 8방으로 통달하는 거리에 있어 전령과 奉使하는 자가 하루도비는 날이 없었는데 옛적 객관이 좁고 낮으며 또 연대가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기우러져 있으니 항상 좋지 못함이 손님들의 나무람을 들어왔다.



지난 1327년 4월에 그가 이 州의 목사가 되어 와서 이 객관을 중수할 생각이 있었으나 민생의 노고와 곤궁을 염려하여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仁愛로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고 엄중하게 官紀를 바로잡아 왔다.

얼마후 읍인들이 德治에 힘입어 비로소 생활에 희망을 가지게 되니 이러한 힘을 모아 한번 公恩에 보답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州民을 사역할 수 있음을 알고 재물을 모으고 부역을 명하며 기한을 정하여 起工하니 庶民들이 기꺼이 호응하여 수고로움을 잊고 就役하였으며 豪黨들도 협의하여 힘을 다하니 이렇게 하여 州民을 괴롭히거나 농사에 방해함이 없이 짧은 시일내에 객관이 완성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장하도다. 그가 적은 백성의 힘으로 세웠으나 실은 목사의 지혜로 이룩된 것이다. 州民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이 이러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에 戶와 窓응 얽어 매어 비바람에 대비하는 비유가 있고 書傳에는 아버지가 창업을 하면 자손이 이어서 성공한다는 비유가 있으니 그가 廟堂에 재직하여서 經紀를 세우고 方略을 베풀어서 거듭 王家를 번영하게 한 것을 이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하겠다.







▣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문집 ≫ 문집 제2권 ≫ 기(記) ≫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상주(尙州)는 낙수(洛水)의 상류에 위치하여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그래서 사명을 받들고 정사를 반포하는 빈객과 일본(日本)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고 가는 사신이 계속 줄을 잇되,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경우는 3분의 1도 못 되고 대부분이 관현(冠縣 문경(聞慶)의 고호임 )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사방에서 폭주(輻湊)하는 중심지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의당 높고 웅장한 누각(樓閣)을 두어서 의형(儀刑)을 맞추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고, 높고 탁 트이게 하여 무더위를 제거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 전하(殿下)의 18년 정미(丁未) 봄에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 공이 부절(符節)을 갖고 이 고을에 와서 이 누각의 용마루와 서까래가 휘어져 기울고, 난간은 깨어졌으며, 기왓장은 처마에 뒹굴고, 벽에서 비는 새며, 붉고 흰 빛깔의 장식은 모두 흐려지고 벗겨져서, 누각에 오른 사람이 관현악(管絃樂)을 베풀기도 전에 주춤하며 꺼리는 빛이 완연함을 보고는 개연히 누각을 중수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통판(通判) ★신후 현(申侯?)이 뒤따라 이르렀다. 마침내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합하여 다음해 봄에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재목 수집을 명하여 성중(城中)으로 실어 들이고, 가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옛집을 헐고 그 제도를 훨씬 넓혀서 짓되 일을 시작한 지 겨우 30여 일 만에 자귀와 흙손의 사용을 모두 끝마쳤다.

그래 놓고 보니, 누각의 넓고 탁 트이고 화려함이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성지(城池)와 여항(閭巷)도 모두 자랑스러운 빛이 있고, 경내(境內)의 진산(鎭山)과 소택(沼澤)이 된 모든 산천(山川)들도 갑자기 훨씬 더 높고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러자 공(公)이 이에 이 고을의 교수인 나의 친구 ★주윤창(周允昌) 군을 중개인으로 삼아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누각을 중수함에 있어서 그 제모(制謀)와 정공(程功)은 충분히 두 김 목사와 한 송 목사에 필적할 만한데, 그 기문 짓는 일을 촉탁받은 나는 네 선생[四先生] 2893) 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

옛날에 ★한퇴지(韓退之)는 등왕각(?王閣)의 기를 지으면서 자기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에 나열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으나, 2894)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구미 속초(狗尾續貂) 2895) 를 해 놓으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안고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장차 부끄러워 움츠리기에도 겨를이 없을 판인데, 또 영광이라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명령이 끝내 그치지 않으므로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우선 그 대강을 기술하고, 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바이다.



배와 수레가 모두 모여드니 舟車之會兮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로다 四達之衝

사신의 수레가 서로 교차하니 冠蓋結轍兮

다른 고장은 하풍에 따르도다 異邦趨風

이런 누각이 있지 않으면 不有斯構兮

연향과 호궤를 어디에 의탁하랴 宴?奚托

그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誰能執熱兮

시원한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 逝不以濯

상산은 푸르고 푸르며 商山蒼蒼兮

낙수는 광대하게 흐르는도다 洛水??

이전의 것을 계승한 이 있으니 前者有繼兮

층층의 누각이 구름에 닿았네 層構?雲

구불구불 흐르는 맑은 낙수요 ?紆淸洛兮

높고도 험준한 상안이로다 ??商顔

순창 설공의 계승한 업적은 淳昌之續兮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로다 攸久不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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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893] 위에서 말한 근재(謹齋) 안축(安軸),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양촌(陽村) 권근(權近)을 가리킨다. ☞



[註 2894]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임. 한유가 일찍이 원주 자사(袁州刺史)로 있을 적에 홍주 자사(洪州刺史) 왕중서(王仲舒)의 부탁을 받고 신수등왕각기(新修?王閣記)를 지었는바, 그 기문의 끝부분에 “나는 이미 등왕각을 가보지 못한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던 바이라, 그 위에 나의 이름이 실리게 된 것을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또 나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으로 나열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바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세 왕씨는 바로 유각기(遊閣記)를 지은 왕발(王勃), 부(賦)를 지은 왕서(王緖), 수각기(修閣記)를 지은 왕중서(王仲舒)를 가리킨다. 《韓昌黎集 卷十三》 ☞



[註 2895] 담비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대신한다는 고사인데, 여기서는 곧 다른 이의 하던 사업을 자기가 잇게 된 것을 겸사하여 비유한 말이다. ☞







▣ 상주지(상주시.군문화공보실, 1989)

pp 107 (5) 金永煦(★김영후)

---충렬왕(?)때 상주목사가 되었다. 상주는 도로가 팔방으로 통하여 관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客館(객관)이 낡아 불편이 많았다. 먼저 仁愛(인애)로서 百姓(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部下(부하)를 경계하여 善政(선정)을 베풀었다. 1년이 지나자 비로소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이에 役事(역사)를 시작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객관을 준공했다. 뒤에 그는 國相(국상)이 되었다.



pp 858∼859 5. 商山 (상산관, 일명 객관)(경부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7호)

---(상주시 남성동 148-1 상주여중 내)

---상산관은 조선조시대 公署(공서)로 사용하던 건물로서 상주에 남아있는 3개(상산관, 침천정, 태평루) 건물가운데 하나이다.

---객사라 함은 조선시대 각 고을마다 殿牌(전패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 지방 객사에 殿(전)자를 세워 그곳 州(주) 牧使(목사)가 부임하거나 또는 국가의 경사스러움과 아픔이 있을 때 이곳에 모여 참배하며, 국가와 임금님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는 곳) 초하루.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의식을 행하였으며 사신들의 숙소로도 사용하여 왔다.



---이 건물은 상산지 2권 객관조에 목사 洪世周(홍세주)가 지었다고 하나 현재 상주군청에 소장되어 있는 尙州牧先生案(상주목선생아)에는 홍세주의 기록은 없으니 그 연대를 고증할 방법이 없고 다만 상산지 상권에 「客館(객관) : 在州衙東高麗金永煦爲牧使時改安軸有記嘉靖丙戌火牧使尹宕改構壬亂皆燒 顯廟丙午牧使李松 仍舊改構(재주아동고려★김영후위목사시개안축유기가정병술화목사윤탕개구임란개소 현묘병오목사이송령잉구개구)」기록되었다.



---그리고 다른 기록을 종합해 보면 1340년(고려 충혜왕 1) 이전이라 볼 수 있고 목사 안축이 1343년(충혜왕 4) 記文(기문)을 지었는데 1343년(지정 3년 계미)에 상주목사로 와 보니 근년에 학정을 백성의 신뢰를 잃고 고을에 있는 관청, 학교, 신사, 사찰 등은 모두 퇴락되었으나 오직 객사만이 남아 있어 남쪽지방에 제일가는 규모이다. 이는 1307년 ★김상국, ★김영후가 지었음을 알 수 있고 1526년(중종 21) 화재를 당하기 전 1500년(연산 6) 목사 윤탕이 개축한 바 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모두 불태웠다. 1639년(인조 14) 봄에 王山(왕산) 남쪽(현 상주경찰서)으로 옮겨 세웠다. 1666년(현종 7) 목사 이송령이 개축하였으며 1907년(순종 11) 상주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였고 1940년에 지방인사 박인양, 조용연, 박정소, 박인수 등이 많은 돈을 내어 상주군으로부터 사서 조각연을 기성회 책임자로

정해 많은 성금을 모아 현 위치(상주시 남성동 148-1)로 옮겨짓고 다시 군에 기부하였는데 상주여중 설립으로 상주여자공립보통학교가 사용하게 된 후 지금에 이르고 45년 동안 학교로 사용하며 필요에 따라 많은 건물의 변경을 가져와 당초의 모습은 지붕뿐이고 벽체, 창호, 마루 등 제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보수치 않아 많은 곳의 지붕에 누수가 심하여 1985년 지붕보수를 비롯 1988년까지 중수(가) 계속되었다.



---건물은 669평의 대지 위에 정면 14칸, 측면 3칸, 128.75평(460㎡)의 웅장한 건물로 평면상으로는 모두 연결되어 구분하기 어려우나 主 (주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翼室(익실)을 두고 중문, 외문, 옆면은  廊(무랑) 등의(으로) 실재로는 3동이 연결되었고 지붕은 2단으로 층을 이룬 合角(합각)에 팔작으로 구성하고 건축 당시의 짐승 모양의 鷲頭(취두)가 14개 있다. 48간의 대형 건물의 외부기둥은 원기둥이고 내진주는 角柱(각주)로서 7량 가구에 연목천정을 하였고 익공집에 겹처마를 하여 먹과 장식을 더했다. 건물의 규모가 장대함은 영남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자료이며 지방의 관아 건물가운데 용두가 잘 남아 있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고 건물 전체가 품위를 가지고 있다.



---건물 정면(북편) 가운데 「商山 」이란 큰 현판(가로 2.3m, 세로 1.5m)이 걸려 있다.

---상산관이 자리한 대지는 경북향교재단 상주향교 소유였으나 향교측이 1985년 12월 30일 경북도교육위원회(상주여자중학교)에 매각하여 건물과 대지가 동일인 도교위로 되었다.



pp 932 제8편 문화(典籍類 중)

---전적명(척약재선생 학음집) 저자(★김구용 1338∼1384) 연대(임란이전) 규격(23.1×18.3 2책 1권) 참고(표제 : 척약재집, 보물 1004호)의 기록이 있음.



pp 1051 4. 節義派(절의파) 士族(사족)의 大擧來居(대거래거, 1301년(충렬왕 27)∼1391년(공양왕 3)) 중

---(전략) 먼저 이 시기 이 고장을 거쳐간 목민관을 살펴 보기로 한다.

---金永煦(★김영후 1292∼1361)는 본 州(주) 牧使(목사)가 되어  宇(관우)를 중수, 善治(선치)하였으며(후략) (2002. 6. 9)







▣ 상주시청 문화재담당 답변

<상산지1권>에『在州衙東高麗★金永煦爲牧使時改築......(이하생략)』이라고 되어 있어 ★김영후 목사가 취임하여 그전부터 있던 상산관을 개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상주목선생안>에는 ★김영후 목사는 본관이 안동, 1292년부터 1361년까지 살았으며 고려 충렬왕 (1274년~1308년)때 1307년 상주목사로 취임한 기록이 있으나 몇 년간 재임했으며 언제 이임했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여기서 김목사의 생몰년을 대비해보면 16세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그전부터 있던 상산관을 중수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상산지> 또 다른 기록인 고려 충숙왕조편을 보면 ★김영후 목사는 충숙왕 14년 (1327년)에 상주목사로서 상주객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상주목선생안> 충숙왕 때는 김영후란 목사는 재임기록이 없어

상산지 내용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바입니다.







▣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79호

명 칭 ●법주사자정국존비 (法住寺慈淨國尊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80.12.29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내에 있는 자정국존의 비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국영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명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

이 비(碑)는 고려말(高麗末)의 자정국존(慈淨國尊)의 비로서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3년(1342)에 건립(建立)하였다. 자연암석(自然岩石)의 암면(岩面)을 장방형(長方形)으로 파서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꽂아 높이 2.13m, 폭 1.07m로 된 화강석비이다. 자정국존(慈淨國尊)(1240∼1327)의 성(姓)은 김(金)씨이며 국영사(國寧寺), 장의사(莊義寺), 법주사(法住寺)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고, 도승통(都僧統)이 되기도 하였으며 보명대사(普明大師)의 호(號)를 받았다.











▣ 솔내영환 -

▣ 김윤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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