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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청풍한벽루 (충북제천)을 노래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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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01 04:45 조회1,6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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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528호

명 칭 ●청풍한벽루 (淸風寒碧樓)

분 류 누(정).각 수 량 1동 지정일 1971.01.08

소재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 인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제천시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구조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명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

이 건물(建物)은 고려(高麗) 층숙왕(忠肅王) 4년(1317)에 청풍현(淸風縣)이 군(郡)으로 승격되자 세운 관아(官衙)의 부속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누(樓)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중층(重層) 팔작집으로, 서축의 누에 오를 수 있도록, 정면 1칸 측면 3칸의 측랑(側廊)이 부설돼 있다. 누의 공포(包)는 이익공(二翼工)이고 측랑(側廊)은 초익공(初翼工)이며, 누는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이나 측랑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동측 합각 밑을 가리기 위해 우물천장을 일부 가설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6년(1406)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重修)하고, 고종(高宗) 7년(1870)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으며, 1972년 8월 19일 수해 때 붕괴된 것을 1976년 4월에 다시 복원(復元)하였다.











종 목 시도기념물 18호

명 칭 ●황강영당및수암사 (황강영당및수암사)

분 류 사묘,제단 수 량 2동 지정일 1977.12.07

소재지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33

소유자 사유 관리자 권희만



조선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1607∼1689)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와 권상하 선생의 제자인 한원진(1682∼1751), 윤봉구(1681∼1767), 권욱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영당과 수암 권상하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송시열 선생은 인조 11년(1633) 문과에 급제하여 학문적 명성을 떨쳤고 후에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부상되기도 하였다.



권상하 선생은 그의 스승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비와 대보단을 세웠다. 그 뒤 숙종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16세기 이율곡과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계보를 이으며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영조 2년(1726)에 세웠고 다음해에 황강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황강영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83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황강영당은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이곳과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수암사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문화재명 황강영당및수암사(황강영당및수암사)

이 건물은 본래 조선(朝鮮) 영조(英祖) 2년(1726)에 창건(創建)되어 그 다음해인 영조 3년(1727)에 황강서원(黃江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그후 고종(高宗) 8년(1871)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황강영당(黃江影堂)으로 개칭(改稱)되고 그 자리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 문순공(文純公) 한원진(韓元震),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권욱(權煜), 윤봉구(尹鳳九)의 영정(影幀)을 모시었다. 건물구조(建物構造)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담장에 일각문(一角門)이 있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한수재(寒水齋)』 『황강서원(黃江書院)』의 편액(扁額)이 있다. 수암사(遂庵祠)는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를 봉향(奉享)하는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권상하(1641∼1721)의 호는 수암, 한수재(寒水齋)이며 송시열의 수제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지도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현재의 건물은 충주댐 수몰로 인하여 1983년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 노은정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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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아들 世厚는 벼슬이 우승지에 올랐고, 손자 鼎和, 鼎弼, 鼎佐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정화는 과거를 일삼지 않고 경서에 힘써 행의를 닦고 자제에겨 孝友름 먼저 가르쳤다. 손자 命淵과 命涵은 예학에 밝았으며, (사람인변)英의 아들 芝秀는 문장에 뛰어나 군수 조국인과 함께 대록지를 편찬했다.



★정필은 어릴적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여 문장과 글씨가 특출했으며, 손자 명집도 문사가 풍부했다.



★정좌는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고, 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추사 김정희와 교유)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 김항용 -

▣ 김은회 -

▣ 솔내영환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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