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물계서원과 물계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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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06 21:34 조회1,941회 댓글0건본문
1. 물계서원
<안렴사공파세보, 1988무진보>
●물계서원 향사록 (在안동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물계서원은 이조현종2년 (1661년 辛丑)에 학사 김공 응조의 건의로 건립하였으나, 1868년 戊辰 9월에 대원군의 미사액서원 훼철령에 의해 폐향되었음
--첨의중찬 상락군 충렬공 김방경 주벽
--대사성 척약재 김구용
--공조참판 청백리 허백당 김양진
--부제학 학사 김응조
●물계서원 이건봉안문 (대사간 목재 홍여하(1621-1678) 製)
花山 높고 푸르르며 낙동강 물 맑게 흘러
지령 길러 정기 모아 신선에서 하강하니 壇宇도 넓고 넓다.
세상에 드문 재주 文武를 겸비하니
때마침 태어나사 몸바쳐 보국할 제
곧은 기풍 충천하고 엄숙 강기 떨쳤도다
총마 어사 나가실 제 竹節같이 곧은 충성
신명도 감동하고 만백(=오랑캐)도 순종하다
정의 세워 역적토벌 괴수 잡아 목을 베니
인륜 좋은 동국 땅에 어진 장상 위풍 밝혀
동해로 軍旅떨쳐 파도가 조용하고
생령은 덕을 입고 사직은 혈기 찾아 미관 피발 본받으니
태산 북두 높은 명성 우주를 덮은 공적
사후 俎豆(조두) 마땅하고 鄕邦(향방)이 추모하니
盛事에 운수 있어 5백년 지낸 후에
부용산 기슭에 엄연한 精舍 있어
맑은 사당 5架로다. 거북점 이미 치고
좋은 날 선택하고 어진 선비 모여드니
공중에 도는 향연 휘황하게 밝은 촛불
彷佛하신 그 영풍은 천만세를 두고 두고
나의 초예 흠향하고 후생들을 도우소서
???
생각건대 勿溪서원은 옛날 감천현 서북 20리 勿閑村에 있었는데
학사 김공 응조의 건의로 사당을 세워서 충렬공을 봉향하다가
경술년(=?년)에 와서 학사를 또 배향하였다.
정축년(=?년)에는 일도의 선비들이 "서원으로서 현의 한 구석에 있고
基址가 온당치 못해서 영원한 봉안에 험이 있다." 하여
드디어 발의하고 현의 서쪽 3리 가량 되는 고방산 및 泉田리로 이건하니
천전은 곧 지금의 (= ?년) 안동부내 감동 물한촌이며
현재의 경북 예천군 감천면이다.
<전고대방>
●물계서원
---추후 소개---
<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물계서원
---추후 소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물계서원 (勿溪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에 있었던 서원. 1661년(현종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金方慶, 金九容, 金揚震, 金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廟宇(묘우), 강당, 동재, 서재, 奠祀廳(전사청), 神門(신문), 정문, 廚舍(주사) 등이 있었으며,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왔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전고대방, 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李東春>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양진(金楊震)
1467(세조 13)∼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아버지는 진산군수 휘손(徽孫)이다.
7세에 능히 문장을 지어 서거정(徐居正)에게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장성하면서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1489년(성종 20)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497년(연산군 3)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에 임명되었다.
1503년 부수찬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호추존(廟號追尊)을 극력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예천에 정배되었다.
1506년의 중종반정 후 귀양에서 돌아와 형조좌랑으로 기용되었고, 이어서 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당시 고리대금의 폐단이 큼을 지적하여 그 개선을 도모하였다.
1513년(중종 8)역학에 밝다 하여 김안국(金安國)·이행(李荇)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뽑혔으며, 1517년 남곤(南袞)의 추천으로 승지가 되었으나, 천거과(薦擧科)의 불편을 말했다가 사림들의 탄핵을 받아 영해부사로 전출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남곤 등이 정권을 장악하자, 형조참의로 불리어들어가 바로 대사간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도내에서 그의 사위 김윤종(金胤宗)이 죄를 범하고 도주하여 체포의 문제가 있었으나 무난히 임기를 마쳤다.
이어서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친 다음, 이조·예조의 참의를 각기 역임하였다.
이때에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부마로서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호화저택을 짓는 공사를 벌이자, 그 불가함을 극론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도관찰사로 전출되었다.
그뒤 잠시 공조참판과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한직(閑職)에 머물렀다.
1535년 왕이 송도에 행차했을 때, 유도재상(留都宰相)으로 숙위(宿衛)에 임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파당을 싫어하고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고, 음주를 즐기며 학문에 밝아 이행·정희량(鄭希良)·권달수(權達手) 등과 교유가 깊었다.
그의 학문은 특히 역학·음양 및 복서(卜筮)에 통달하였다. 중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國朝榜目. 〈崔完基〉
●김응조(金應祖)
1587(선조 20)∼1667(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안동출신.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다.
17세 때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4년(인조 12)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가 다시 지평·장령·헌납·수찬·교리·부수찬·집의·사간·응교·승지·호군·공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고, 그뒤 필요가 없게 되자 1658년(효종 9)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대학연의 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들어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에는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수심양성(收心養性)·경천휼민(敬天恤民)·우문흥학(右文興學)할 것을 건의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에는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하여야 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사면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 四禮問答》·《산중록 山中錄》·《변무록 辨誣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國朝榜目, 鶴沙集. 〈徐信錫〉
●홍여하(洪汝河)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대사간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고,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 周易口訣》·《의례고증 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사제강 東史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 經書解義》 등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金甲周〉
2. 물계서당
<대종회보 제59호, 1998.1>
●勿溪書堂(물계서당) 日(계일) 참석
물계서당은 당초 물계서원을 철폐한후 지역유림에서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여 서당을 세워 물계서원의 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이 물계서원에는 우리 중시조이신 충렬공과 충렬공의 현손 척약재 구용 양위분을 배향하여 왔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향되고 지금은 예천유림 주관으로 서당을 마련하여 옛 서원을 상기하며 추모행사로 日(계일)을 정하여 매년 음 12월 5일 유림 어른들과 우리 문중 종인들이 모여 하루를 즐기며 옛날을 추모하는 행사이다.
올해는 대종회 斗會 부회장님과 문온공파 부회장인 琮會 현종이 참석했는데 영남지방 종인 10여명이 참석하여 유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유림측에서는 우리 충렬공 할아버님이 主壁(주벽)이시며 영남의 인물이요, 존중하는 분이신데 우리 문중에서 소홀함을 극히 서운히 생각하고 있음이 역력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어떻게 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가 없어 참으로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안동김씨 홈페이지>
작성자 :김재원 작성일 : 2002/07/03 08:18 (from:61.43.83.3) 조회 : 57
●물계 서당
물계서당; ? 물계서원 -충렬공과 문온공의 위패가 봉안돤 곳이었으나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철폐 되었음. 그후 경북 예천의 지방 뜻있는 유림들이 뜻을 모아 물계서당을 세우고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며 풍산김씨 문중에서 물계서당을 관리해오고 있었으나 제가 96년 답사시에는 기와 지붕이었으나 비가 세고 관리가 허술해 98년 답사시에는 지붕을 천같은것으로 덮어 씨웠음.
▣ 김은회 - 물계서원은 언제쯤이나 건립될지.......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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