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풍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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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3-07 01:53 조회2,009회 댓글0건본문
풍산김씨
풍산(豊山)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영안(永安)으로 고쳐 부르다가 서기 923년(고려 태조 6)에 순주(順州)로 하였고, 뒤에 풍산(豊山)으로 한 후 안동(安東)에 포함시켰다. 풍산 김씨(豊山金氏)의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1세손으로, 풍산현(豊山縣)에 살면서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을 세우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판사사(判 司使 : 밀직사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올라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풍산(豊山)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에서 빼어난 인물로는 참판(參判) 휘손(徽孫)의 아들 양진(楊震)이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이 모비(母妃) 능묘(陵廟)의 호를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그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 좌랑(刑曹佐郞)·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경주 부윤(慶 州府尹)·전라도(全羅道)·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간(大司幹 : 간쟁과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정 3품 으뜸 벼슬)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청빈한 관리로서 뒤에 안동(安東)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順貞)의 아들 진(鎭)은 1549년(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
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종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
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지냈으며, 첨정(僉正) 의정(義貞)의 손자(孫子) 대현(大
賢)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선조(宣祖) 때 진사시(進士
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安集使) 김 늑의 휘하에
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5년(선조 28)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진(鎭)의 아들 수현(壽賢)은 1602년(선조 3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
(光海君) 때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에 오르고, 승지(承旨)와 대사
헌(大司憲)을 지낸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7형제중 맏아들 봉조(奉祖), 둘째 영조(榮祖), 넷째 경조(慶祖), 여섯째 응조(應祖)가 유명했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봉조(奉祖)는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順貞)의 아들 진(鎭)은 1549년(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종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
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지냈으며, 첨정(僉正) 의정(義貞)의 손자(孫子) 대현(大
賢)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선조(宣祖) 때 진사시(進士
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安集使) 김 늑의 휘하에
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5년(선조 28)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진(鎭)의 아들 수현(壽賢)은 1602년(선조 3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
(光海君) 때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에 오르고, 승지(承旨)와 대사
헌(大司憲)을 지낸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7형제중 맏아들 봉조(奉祖), 둘째 영조(榮祖), 넷째 경조(慶祖), 여섯째 응조(應祖)가 유
명했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봉조(奉祖)는 1613년(광해군 5) 증
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감찰(監察)·지평(持平) 등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으며, 아우 영조(榮祖)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영조(榮祖)는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지낸 후 당시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10년간이나 은거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여섯 차례나 어사(御使)로 나갔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절도사(節度使)로 종군(從軍)한 경조(慶祖)와 부사(府使) 응윤(應胤), 현감(縣監) 시필(時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로 유명한 종휴(宗烋)·순흠(舜欽)·지섭(祉燮)·의탁(義倬) 등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므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 김씨(豊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755가구, 11,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풍산김씨는 이번 답사를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가문과 다른 인연은 없나요?
▣ 김은회 -
▣ 김윤만 -
풍산(豊山)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영안(永安)으로 고쳐 부르다가 서기 923년(고려 태조 6)에 순주(順州)로 하였고, 뒤에 풍산(豊山)으로 한 후 안동(安東)에 포함시켰다. 풍산 김씨(豊山金氏)의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1세손으로, 풍산현(豊山縣)에 살면서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을 세우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판사사(判 司使 : 밀직사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올라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풍산(豊山)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에서 빼어난 인물로는 참판(參判) 휘손(徽孫)의 아들 양진(楊震)이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이 모비(母妃) 능묘(陵廟)의 호를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그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 좌랑(刑曹佐郞)·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경주 부윤(慶 州府尹)·전라도(全羅道)·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간(大司幹 : 간쟁과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정 3품 으뜸 벼슬)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청빈한 관리로서 뒤에 안동(安東)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順貞)의 아들 진(鎭)은 1549년(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
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종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
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지냈으며, 첨정(僉正) 의정(義貞)의 손자(孫子) 대현(大
賢)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선조(宣祖) 때 진사시(進士
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安集使) 김 늑의 휘하에
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5년(선조 28)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진(鎭)의 아들 수현(壽賢)은 1602년(선조 3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
(光海君) 때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에 오르고, 승지(承旨)와 대사
헌(大司憲)을 지낸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7형제중 맏아들 봉조(奉祖), 둘째 영조(榮祖), 넷째 경조(慶祖), 여섯째 응조(應祖)가 유명했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봉조(奉祖)는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順貞)의 아들 진(鎭)은 1549년(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종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
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지냈으며, 첨정(僉正) 의정(義貞)의 손자(孫子) 대현(大
賢)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선조(宣祖) 때 진사시(進士
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安集使) 김 늑의 휘하에
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5년(선조 28)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진(鎭)의 아들 수현(壽賢)은 1602년(선조 3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
(光海君) 때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에 오르고, 승지(承旨)와 대사
헌(大司憲)을 지낸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7형제중 맏아들 봉조(奉祖), 둘째 영조(榮祖), 넷째 경조(慶祖), 여섯째 응조(應祖)가 유
명했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봉조(奉祖)는 1613년(광해군 5) 증
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감찰(監察)·지평(持平) 등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으며, 아우 영조(榮祖)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영조(榮祖)는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지낸 후 당시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10년간이나 은거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여섯 차례나 어사(御使)로 나갔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절도사(節度使)로 종군(從軍)한 경조(慶祖)와 부사(府使) 응윤(應胤), 현감(縣監) 시필(時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로 유명한 종휴(宗烋)·순흠(舜欽)·지섭(祉燮)·의탁(義倬) 등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므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 김씨(豊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755가구, 11,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풍산김씨는 이번 답사를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가문과 다른 인연은 없나요?
▣ 김은회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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