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함께 풀어보고자 올립니다.<충렬공(方慶)과 동명이인 方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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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3-10 18:37 조회2,393회 댓글0건본문
제 생각을 올립니다.
김응기의 아버지가 방경이고 그는 신라 왕손의 후예라고 했는데,
우리 안동김문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안동김문의 후손 누가 방경 이라는 이름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다.?
이 김방경은 제가 추론한 바로는 선산김씨가 아닌가 합니다.
그 추리 근거로서는
조선조 등과방목을 찾아보면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4(丙科14) 등으로
입격한 김응기(金應箕)라는 인물이 보이는데 그의 아버지는 김지경(金之慶)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김응기는 선산김씨 김지경(또는 김방경)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고.
김응기의 아버지가 방목에는 김지경, 대동야승에는 김방경이라는 차이는 아직 확인 못
했으나, 혹시 김지경의 오식이거나, 생부(*또는 양부)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김응기의 입격년(1477년)으로보아 대동야승의 김응기와 방목의 김응기가 동일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김방경, 김지경, 김성경(김응기의 숙부) 모두 선산김씨의 인물이고,
아울러 우리 중시조이신 충렬공과는 동명이인, 동명이관의 인물임을 밝혀둡니다.
참고자료;
김응기(金應箕)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4(丙科1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55년, 을해
자(字) 백춘(伯春)
호(號)
본관(本貫) 선산(善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대(文戴)
>>> 가족사항
부(父) 김지경(金之慶)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지(金地)
증조부(曾祖父) 김양보(金揚普)
외조부(外祖父) 강거례(康居禮)
처부(妻父) 김맹치,안돈후(金孟<치0x771E>,安敦厚)
숙(叔) 김성경(金成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종사랑(從仕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우의정%(右議政%)
김응기(金應箕)
1457(세조 3)∼1519(중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미수(眉#수04), 호는 병암(屛菴). 아버지는 대사헌 지경(之慶)이며, 선산출신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482년에 수찬에 오른 뒤 예조정랑·성균관사유(成均館師儒)·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집의(執義)를 거쳐서, 149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다.
이어서 좌·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1496년(연산군 2)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곧 돌아와 동지성균관사·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공안상정사제조(貢案詳定司提調)를 역임하였다.
1498년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참판이 되었다.
1500년에 한성부판윤이 된 뒤 곧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지내고, 1504년 갑자사화로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가 된 뒤 병조·공조·예조판서를 차례로 지내고, 1513년(중종 8) 우의정이 되었으며, 좌의정을 거쳐 151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학식이 넓어 천문·지리·수학에까지 정통하였고, 언행이 법도에 맞아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부자(夫子)’라고 존경하였다. 성종의 신임이 두터워 10여년 동안 강연(講筵)을 맡았다.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 김태서 -
▣ 김발용 -
▣ 김항용 -
▣ 김윤만 - 바르신 지적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김응기의 아버지가 방경이고 그는 신라 왕손의 후예라고 했는데,
우리 안동김문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안동김문의 후손 누가 방경 이라는 이름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다.?
이 김방경은 제가 추론한 바로는 선산김씨가 아닌가 합니다.
그 추리 근거로서는
조선조 등과방목을 찾아보면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4(丙科14) 등으로
입격한 김응기(金應箕)라는 인물이 보이는데 그의 아버지는 김지경(金之慶)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김응기는 선산김씨 김지경(또는 김방경)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고.
김응기의 아버지가 방목에는 김지경, 대동야승에는 김방경이라는 차이는 아직 확인 못
했으나, 혹시 김지경의 오식이거나, 생부(*또는 양부)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김응기의 입격년(1477년)으로보아 대동야승의 김응기와 방목의 김응기가 동일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김방경, 김지경, 김성경(김응기의 숙부) 모두 선산김씨의 인물이고,
아울러 우리 중시조이신 충렬공과는 동명이인, 동명이관의 인물임을 밝혀둡니다.
참고자료;
김응기(金應箕)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4(丙科1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55년, 을해
자(字) 백춘(伯春)
호(號)
본관(本貫) 선산(善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대(文戴)
>>> 가족사항
부(父) 김지경(金之慶)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지(金地)
증조부(曾祖父) 김양보(金揚普)
외조부(外祖父) 강거례(康居禮)
처부(妻父) 김맹치,안돈후(金孟<치0x771E>,安敦厚)
숙(叔) 김성경(金成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종사랑(從仕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우의정%(右議政%)
김응기(金應箕)
1457(세조 3)∼1519(중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미수(眉#수04), 호는 병암(屛菴). 아버지는 대사헌 지경(之慶)이며, 선산출신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482년에 수찬에 오른 뒤 예조정랑·성균관사유(成均館師儒)·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집의(執義)를 거쳐서, 149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다.
이어서 좌·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1496년(연산군 2)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곧 돌아와 동지성균관사·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공안상정사제조(貢案詳定司提調)를 역임하였다.
1498년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참판이 되었다.
1500년에 한성부판윤이 된 뒤 곧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지내고, 1504년 갑자사화로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가 된 뒤 병조·공조·예조판서를 차례로 지내고, 1513년(중종 8) 우의정이 되었으며, 좌의정을 거쳐 151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학식이 넓어 천문·지리·수학에까지 정통하였고, 언행이 법도에 맞아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부자(夫子)’라고 존경하였다. 성종의 신임이 두터워 10여년 동안 강연(講筵)을 맡았다.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 김태서 -
▣ 김발용 -
▣ 김항용 -
▣ 김윤만 - 바르신 지적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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