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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3 --- 아버지와 함께 삼별초토벌, 일본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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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11 05:56 조회1,7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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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3 --- 아버지와 함께 삼별초토벌, 일본정벌





김흔장군은 아버지 충렬공과 함께 1273년 제주도에서의 삼별초 토벌에 참가하였고, 1274년 이름을 金綬(김수)에서 金 (김흔)으로 바꾼 듯 하며, 이때에 역시 아버지와 함께 일본정벌에 나서서 선봉대 역할을 하신 것을 여러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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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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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은 곧 ●김수(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더러 말하기를 “병법에 군대가 천 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마는 벌써 적의 지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陰-한신)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라고 하니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복형이 유시(流矢-날아 오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올라가게 되어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 침몰되었으며 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도착하여 포로들과 노획한 군기, 병장들을 황제와 왕에게 바쳤다.







▣ 고려사절요



■ 갑술 15년(1274), 송 함순 10년ㆍ 원 지원 11년



○ 겨울 10월에 도독사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박지량(朴之亮)ㆍ★김흔(金?)을 지병마사로, 임개(林愷)를 부사로 삼았고, 추밀원부사 김신을 좌군사로,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을 부사로 삼았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로, 나유ㆍ박보(朴保)를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를 부사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이라 이름하였다.

원 나라의 도원수 홀돈,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군(蒙軍)ㆍ한군(漢軍) 2만 5천 명과 우리 군사 8천 명 및 사공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6천 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으로 합포를 떠났다.

11일이 지나 배가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 위에 진을 쳤다. 박지량ㆍ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하기를 청하다가 다시 싸웠는데, 다구가 지량ㆍ변과 더불어 천여 명을 쳐 죽였다.

삼랑포(三郞浦)에서 배에서 내려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죽인 적병이 매우 많았다. 왜병이 돌격하여 와서 중군과 충돌하였는데, 방경이 효시(嚆矢)를 한 개 빼어 쏘며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왜가 겁에 질려 달아났다.

지량ㆍ★흔ㆍ변ㆍ이당공(李唐公)ㆍ김천록(金天祿)ㆍ신혁(申奕)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쓰러진 시체가 삼대가 깔려 있는 듯하였으며,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인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이 이상 더 잘할 수는 없다.” 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종일토록 싸우다가 저물어서야 그쳤다.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적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이것이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이다.” 하며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는데,

홀돈이 말하기를, “수가 적은 편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가 싸우면 수가 많은 편에게 사로잡힌다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유복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배로 돌아왔다. 마침 그날 밤에 크게 바람불고 비가 와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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