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김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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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12 21:42 조회1,605회 댓글0건본문
소개해 주신 간찰 잘 보았습니다.
휘자를 보니 우리 서운관정공파이신 金魯 가 아니고 金路 또는 金金+路 인 것 같습니다.
■ 서울600년사
【성 명】 김노(金魯)
【생몰년】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경참(景參), 동고(東皐)
【저서·작품】 《이가서법(二家書法)》,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글씨),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글씨),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글씨)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서예가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초임되고 이어 검열 · 정자를 지냈다. 1530년 저작(著作)으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의 석방을 비난하였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文義)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직제학에 기용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론(學論)에 밝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왕희지 · 왕헌지의 전기(傳記) · 필적(筆蹟)을 가지고 학습하였다.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부자가 모두 명필로서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 · 파주의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 ·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 등이 그의 글씨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湖陰雜稿, 槿域書畵徵
【관련항목】 김수()
■ 디지털한국학
김로(金輅){1}
1355(공민왕 4)∼1416(태종 16).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고려 공민왕 때에 사마시 생원으로 입신하여 호군이 되고 그뒤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개국시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대호군이 되었다.
1396년에 중추원사로 있으면서 서북면 이성수령(泥城守令)을 겸직했다.
1397년 사농경(司農卿)이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원사·의흥삼군부 우군동지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판중추원사에 오르면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음모하였다는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있을 때에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1409년(태종 9)에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1년 이숭인(李崇仁)을 남형(濫刑)하였다는 죄로 탄핵을 받았다. 시호는 공경(恭頃)이다.
■ 디지털한국학
김로(金#노54){2}
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경유(景由), 호는 설암(雪#암10). 할아버지는 영의정 익(#분21)이며, 아버지는 재련(載璉)이다. 음보(蔭補)로 배천군수를 지내고 1823년(순조 2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평안도암행어사로 지방을 순찰하여 민정을 시찰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다.
1825년 동지경연사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판서·판의금부사·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에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검소와 근면으로써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익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김윤만 - 그럼 우리 선조 분이 아닌가요?
▣ 김은회 -
▣ 김항용 -
▣ 김항용 - 김로(金 金路)로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 김윤식 -
휘자를 보니 우리 서운관정공파이신 金魯 가 아니고 金路 또는 金金+路 인 것 같습니다.
■ 서울600년사
【성 명】 김노(金魯)
【생몰년】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경참(景參), 동고(東皐)
【저서·작품】 《이가서법(二家書法)》,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글씨),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글씨),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글씨)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서예가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초임되고 이어 검열 · 정자를 지냈다. 1530년 저작(著作)으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의 석방을 비난하였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文義)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직제학에 기용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론(學論)에 밝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왕희지 · 왕헌지의 전기(傳記) · 필적(筆蹟)을 가지고 학습하였다.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부자가 모두 명필로서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 · 파주의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 ·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 등이 그의 글씨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湖陰雜稿, 槿域書畵徵
【관련항목】 김수()
■ 디지털한국학
김로(金輅){1}
1355(공민왕 4)∼1416(태종 16).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고려 공민왕 때에 사마시 생원으로 입신하여 호군이 되고 그뒤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개국시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대호군이 되었다.
1396년에 중추원사로 있으면서 서북면 이성수령(泥城守令)을 겸직했다.
1397년 사농경(司農卿)이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원사·의흥삼군부 우군동지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판중추원사에 오르면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음모하였다는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있을 때에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1409년(태종 9)에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1년 이숭인(李崇仁)을 남형(濫刑)하였다는 죄로 탄핵을 받았다. 시호는 공경(恭頃)이다.
■ 디지털한국학
김로(金#노54){2}
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경유(景由), 호는 설암(雪#암10). 할아버지는 영의정 익(#분21)이며, 아버지는 재련(載璉)이다. 음보(蔭補)로 배천군수를 지내고 1823년(순조 2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평안도암행어사로 지방을 순찰하여 민정을 시찰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다.
1825년 동지경연사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판서·판의금부사·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에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검소와 근면으로써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익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김윤만 - 그럼 우리 선조 분이 아닌가요?
▣ 김은회 -
▣ 김항용 -
▣ 김항용 - 김로(金 金路)로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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