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문중의 선김(先金)과 후김(後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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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3-14 00:20 조회2,007회 댓글0건본문
▣ 김해김씨 문중의 선김(先金)과 후김(後金).
--김해김씨 중에는 선김과 후김이라는 것이 있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후손을 선김이라 하고, 경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김충선계의 김해
김씨를 후김이라 한다.
--경순왕계의 후김은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는데 김렴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네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김해를 관향으로
삼아 김해김씨로 되었다. 그의 후손 김시흥(金時興)이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과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 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렴의 작위에 따라 김해김씨로 본관을
써오다가 조선 헌종 15년 1849년 김시흥의 작위를 따라 대부분 금녕김씨로 개칭 했다. 그러나 이들 후손
중에는 아직도 금녕김씨로 개칭하지 않고 옛 김해김씨 족보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족보를
펼쳐 김시흥을 중조로 삼은 것은 모두 금령김씨로 보면 된다.
--또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휘하에서 왜병 선봉장으로 조선에 쳐들어 온 사야가(沙也哥)는 상륙한지 1주일
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金應瑞 : 김해김씨 양의공파조) 장군에게 『내가 비겁하고 못 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고 몰래 글을 보내 귀순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장수가 된 그는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18개 왜성을 탈환했다. 이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김씨의 성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은 김해
김씨와 혼동을 피해 사성 김해김씨로 칭하면서도 호적과 족보에 김해김씨로 올라있는 고로 이들을 후김
(後金)이라 했다. 왜란이 평정된 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사위가 되어 저 경상북도 우록(友鹿) 골에
터를 잡아 세거하게 됐다.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은 대개 우록을 본관으로삼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김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후김으로 지칭되고 있다.
<출전 : 가락의 역사와 가계/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1996. pp39-41>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 김은회 -
▣ 김영윤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아하 그렇군요
--김해김씨 중에는 선김과 후김이라는 것이 있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후손을 선김이라 하고, 경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김충선계의 김해
김씨를 후김이라 한다.
--경순왕계의 후김은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는데 김렴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네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김해를 관향으로
삼아 김해김씨로 되었다. 그의 후손 김시흥(金時興)이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과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 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렴의 작위에 따라 김해김씨로 본관을
써오다가 조선 헌종 15년 1849년 김시흥의 작위를 따라 대부분 금녕김씨로 개칭 했다. 그러나 이들 후손
중에는 아직도 금녕김씨로 개칭하지 않고 옛 김해김씨 족보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족보를
펼쳐 김시흥을 중조로 삼은 것은 모두 금령김씨로 보면 된다.
--또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휘하에서 왜병 선봉장으로 조선에 쳐들어 온 사야가(沙也哥)는 상륙한지 1주일
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金應瑞 : 김해김씨 양의공파조) 장군에게 『내가 비겁하고 못 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고 몰래 글을 보내 귀순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장수가 된 그는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18개 왜성을 탈환했다. 이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김씨의 성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은 김해
김씨와 혼동을 피해 사성 김해김씨로 칭하면서도 호적과 족보에 김해김씨로 올라있는 고로 이들을 후김
(後金)이라 했다. 왜란이 평정된 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사위가 되어 저 경상북도 우록(友鹿) 골에
터를 잡아 세거하게 됐다.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은 대개 우록을 본관으로삼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김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후김으로 지칭되고 있다.
<출전 : 가락의 역사와 가계/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1996. pp39-41>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 김은회 -
▣ 김영윤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아하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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