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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점할아버지는 국문시 당신 본관을 "김해김씨"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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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3-14 01:17 조회1,8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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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점할아버지는 국문시 당신 본관을 "김해김씨"라고 하였다.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발행 <가락의 역사와 가계> 김자점(金自點) 사건이란? 소제목하에 김자점은



김해김씨가 아니고 안동김씨라고 하면서 세간의 오해로 김해김씨가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요지의 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국익(國益)이라는 대의(大義)보다 가문(家門)의 소리(小利)를 취하셨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동북아



정세와 국가적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고 앞으로도 이 문제는 큰 틀에서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으나, 많은 피해를 입고있다는 김해김씨 문중에는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기록을 읽으면서 자점할아버지께서는 죽음에 임해서도 당신의 가문인 안동김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조 효종 2년(1651년)에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세간에서 이 김자점을 김해김씨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원래 김자점은 인조 때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조선초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이름을 떨친 김질의 5대손으로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손자 세룡(世龍)을 인조의 딸 효명옹주와 결혼시킨 후 교만하여져 세도를



부리는 등 권력을 농단하다가 파면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고발하는 역모를 꾀했다. 이에 효종은 김자점을



귀양보내고 자점의 아들과 그 일당을 심문하니 공모한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조정에서는 자점과 그 아들



식 그리고 손자 세룡을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런데 자점은 국문을 받으면서 그의 본관을 김해로 주장하여 당시 오김(吾金)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지금까지도 자점을 김해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 오김(吾金)을 욕되게 하고 있다.





▣ 김항용 -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있는 기록인 충남 서해안 가로림만 내 웅도 관련 기록에도 김해김씨라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 김발용 -

▣ 김은회 -

▣ 김태서 - 이해가 안되는 새로운 내용 입니다.

▣ 김영윤 - 당시의 고위공직자의 신분으로 볼때 위의 내용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않습니다

▣ 김윤식 - 저도 영윤 대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웬만한 가문 내력은 서로 훤히 알고 있었고, 향교에서는 진신록이나 청금록을 펴낼 정도였습니다. 익원공 할아버지의 위상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김해김씨 측 기록대로 <세간>의 착각이나 오해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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