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크=몽골↔고려, 후세인=최우, 이라크공화국수비대=삼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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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3-14 03:24 조회1,501회 댓글0건본문
▣ 미국↔이라크=몽골↔고려, 후세인=최우, 이라크공화국수비대=삼별초 ▣
--(전략)
--1270년, 당시 임금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할 뜻을 굳히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합니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뭉쳐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하고 진도로 떠납니다. 진도가 섬이라는 점, 남해안 지역의
세금 실은 배들이 개경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길목이라는 점 등을 생각해서 항전지로 결정한 것이죠.
--강화를 떠나는 삼별초군의 배가 1천척을 넘었다고 합니다. 워낙 많은 배가 움직였으니 강화도 어느 한 곳에
모두 모여 출발하지는 않았겠지요. 여러 곳에서 출발했을 텐데, 출발지의 한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내가면
외포리입니다. 외포리 구나루 주변, 서울횟집 옆 빈터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가 서 있습니다.
--한편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몽골에 항복한 고려정부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진정한 고려정부임을 내세
웁니다. 그리고 몽골군과 전쟁을 계속합니다.
--진도의 삼별초군은 잠깐동안에 남해안의 섬들은 물론 경상도·전라도의 내륙지방까지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기세였습니다. 그만큼 삼별초의 전력이 강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백성들이 삼별초에
호응하고 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경으로 가는 세금은 삼별초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정부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별초 토벌군을 파견했지만 실패하게 되죠. 다시 보낸 고려정부군의 대장은 김방경입니다. 김방경은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도를 쳐서 함락시키게 됩니다. 방심이 화를 불러 삼별초군이 패한 것입니다.
--진도를 빼앗긴 삼별초는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깁니다. 김통정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몽골에 저항
하지만 얼마 못가서 김방경 군에게 진압됩니다. 살아남은 이 없는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때가 1273년
이었습니다.
--삼별초를 지휘했던 배중손과 김통정, 그리고 이들을 진압한 정부군의 지휘자 김방경 모두가 훌륭한 고려의
장수였습니다. 그들의 지휘에 따라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 대부분이 역시 고려의 백성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이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고 죽는 비극을 마지막으로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그렇게 완전히 끝이
납니다.[민현구,「몽고군·김방경·삼별초」(『한국사시민강좌』제8집, 일조각,1991,pp101-102].
--강화도 정부 시절의 무신정권을 보는 시각이 다양하듯 삼별초의 항쟁을 바라보는 눈도 똑같지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삼별초가 개경으로 환도했을 때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끝까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위대한
항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삼별초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삼별초를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이 이끄는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와 유사하다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미국↔이라크=몽골↔고려, 후세인↔최우, 이라크공화국수비대=삼별초쯤 되는 것이지요.
[김기덕,『고려시대 강화도읍사의 재조명』,pp135-137].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삼별초 문제를 다양하게 생각하고 접근해 볼 수 있는 좋은 시도라고 하겠습니다.
<출전 : 역사의 섬, 강화도/이경수/도서출판 신서원/2002.7,pp234-240>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어디서 이렇게 희귀한 자료를 많이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 김발용 - 후세인 대통령은 이라크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 삼별초와는 분명히 구별이 되겠지요.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항용 - 자료의 검색력에 놀랬습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재익 -
--(전략)
--1270년, 당시 임금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할 뜻을 굳히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합니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뭉쳐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하고 진도로 떠납니다. 진도가 섬이라는 점, 남해안 지역의
세금 실은 배들이 개경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길목이라는 점 등을 생각해서 항전지로 결정한 것이죠.
--강화를 떠나는 삼별초군의 배가 1천척을 넘었다고 합니다. 워낙 많은 배가 움직였으니 강화도 어느 한 곳에
모두 모여 출발하지는 않았겠지요. 여러 곳에서 출발했을 텐데, 출발지의 한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내가면
외포리입니다. 외포리 구나루 주변, 서울횟집 옆 빈터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가 서 있습니다.
--한편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몽골에 항복한 고려정부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진정한 고려정부임을 내세
웁니다. 그리고 몽골군과 전쟁을 계속합니다.
--진도의 삼별초군은 잠깐동안에 남해안의 섬들은 물론 경상도·전라도의 내륙지방까지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기세였습니다. 그만큼 삼별초의 전력이 강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백성들이 삼별초에
호응하고 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경으로 가는 세금은 삼별초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정부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별초 토벌군을 파견했지만 실패하게 되죠. 다시 보낸 고려정부군의 대장은 김방경입니다. 김방경은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도를 쳐서 함락시키게 됩니다. 방심이 화를 불러 삼별초군이 패한 것입니다.
--진도를 빼앗긴 삼별초는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깁니다. 김통정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몽골에 저항
하지만 얼마 못가서 김방경 군에게 진압됩니다. 살아남은 이 없는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때가 1273년
이었습니다.
--삼별초를 지휘했던 배중손과 김통정, 그리고 이들을 진압한 정부군의 지휘자 김방경 모두가 훌륭한 고려의
장수였습니다. 그들의 지휘에 따라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 대부분이 역시 고려의 백성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이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고 죽는 비극을 마지막으로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그렇게 완전히 끝이
납니다.[민현구,「몽고군·김방경·삼별초」(『한국사시민강좌』제8집, 일조각,1991,pp101-102].
--강화도 정부 시절의 무신정권을 보는 시각이 다양하듯 삼별초의 항쟁을 바라보는 눈도 똑같지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삼별초가 개경으로 환도했을 때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끝까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위대한
항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삼별초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삼별초를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이 이끄는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와 유사하다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미국↔이라크=몽골↔고려, 후세인↔최우, 이라크공화국수비대=삼별초쯤 되는 것이지요.
[김기덕,『고려시대 강화도읍사의 재조명』,pp135-137].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삼별초 문제를 다양하게 생각하고 접근해 볼 수 있는 좋은 시도라고 하겠습니다.
<출전 : 역사의 섬, 강화도/이경수/도서출판 신서원/2002.7,pp234-240>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어디서 이렇게 희귀한 자료를 많이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 김발용 - 후세인 대통령은 이라크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 삼별초와는 분명히 구별이 되겠지요.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항용 - 자료의 검색력에 놀랬습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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