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서(序)-이왕섭님께 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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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3-15 20:24 조회1,610회 댓글0건본문
이왕섭님의 질문에 답하며..
질문:"향약제생집성방"의 발은 누가 찬(撰)했는지 알고 싶으며, 아울러 이책의 발문을 직접 보고서 글을 올리신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향약제집성방이라는 책의 서문과 발문을 모두 양촌 권근 선생이 쓰셨습니다. 양촌집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향약제집성방의 서문을 옮겨 봅니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서
의술과 약으로 요찰(夭札)과 질병을 구제함은 인정(仁政)의 한 가지 일이다. 옛적에 신농씨(神農氏)가
기백(岐伯)으로 하여금 풀과 나무의 성질을 맛보게 해서 의원의 직을 맡아 병을 고치게 하였고,
《주례(周禮)》에는 ‘의사(醫師)는 의약(醫藥)에 관한 정사를 맡아, 약초(藥草)를 모아서
의료(醫療)하는 일에 이바지한다.’고 하였으며, 그 뒤에는 의술을 잘 아는 사람으로 유부(兪跗 황제
때의 명의(名醫))ㆍ편작(扁鵲 전국 시대의 명의)ㆍ의화(醫和 춘추 시대 진(秦) 나라의 명의)ㆍ
의완(醫緩 춘추 시대 진(秦) 나라의 명의)의 무리 등 전기(典記)에 나타나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서적이 모두 전하지 않고, 당(唐) 나라 이래로는 그 방문이 시대마다 증가되어, 방문이 많아질수록
의술은 더욱 소루해졌다. 대개 옛적에 용한 의원은, 한 가지 약종만을 가지고 한 가지 병을 고쳤었다.
그런데 후세 의원들은 여러 가지 약종을 써서 공효 있기를 노렸기 때문에, 당 나라의 명의(名醫)
허 윤종(許胤宗)은 ‘사냥하는데 토끼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온 들판에다 널리 그물을 치는 격이다.’
하고 조롱하였으니, 참으로 비유를 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약을 합쳐서 한 가지 병을
고치는 것이, 한 가지 약종을 알맞게 쓰는 것만 못한데, 다만 병을 제대로 알고 약을 제대로 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멀어서, 이 땅에서 나지 않는 약종을 누구나 구득하기 어려운
것이 실로 걱정이었다. 그러나 나라 풍속이 가끔 한 가지 약초를 가지고 한 가지 병을 치료하되 그
효험이 매우 신통했었다. 일직이 삼화자(三和子)의 《향약방(鄕藥方)》이 있었는데, 이는 자못
간단하게 요령만 뽑아 놓아, 논병(論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너무 간략함을 결점으로 여겼더니,
요전에 지금의 판문하(判門下) 권공 중화(權公仲和)가 서찬(徐贊)이란 사람을 시켜 거기에다
수집을 더하여 《간이방(簡易方)》을 편저(編著)하였다. 그러나 그 책은 아직도 세상에 널리 퍼지지
못했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인성(仁聖)한 자품으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시고, 널리 은혜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미치지 않는 데가 없이 하였으나,
매양 가난한 백성이 병이 나도 치료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몹시 측은하게 여겼었다.
좌정승 평양백(左政丞平壤伯) 조공 준(趙公浚)과 우정승 상락백(右政丞上洛伯) 김공 사형
(金公士衡)이 위로 성상의 마음을 체득하고 ‘서울에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노비(奴婢)를
지급하여 향약(鄕藥)을 채취시켜서, 약을 만들어 널리 펴서 백성이 편히 쓸 수 있게 하기’를 주청
(奏請)하매, 중추(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이 그 일을 도맡았었다. 각 도(各道)에도 또한 의학원
(醫學院)을 설치하고 교수(敎授)를 나누어 보내어 이와 같이 약을 쓰게 하여 영구히 그 혜택을 입게
하였다. 또 그 방문에 미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명관(特命官) 권공(權公)ㆍ약국관(藥局官)과
함께 모든 방문을 다시 상고하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험한 방문을 채집하여 부문(部門)으로
분류 편집하여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 이름하고,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부록(附錄)하였는데,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공장(工匠)을
모아 인쇄하여 널리 전파(傳播)하니, 모두 구득하기 쉬운 약물(藥物)이요, 이미 증험한 방문들이다.
이 방문에만 정통(精通)하다면 한 병에 한 약물만 쓰면 되니, 무엇 때문에 이 땅에서 나지 않는
구하기 어려운 것을 바라겠는가? 또 오방(五方 동서남북과 중앙)이 모두 성질이 다르고, 천 리(千里)
면 풍속이 같지 않아, 평상시의 좋아하는 음식의 시고 짬과 차고 더움이 각각 다른 것이니, 병에
대한 약도 마땅히 방문을 달리해야 하며 구차하게 중국과 같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먼
지역의 물건을 구하려다가 구하기도 전에 병만 이미 깊어지거나, 혹은 많은 값을 주고 구하더라도
묵어서 썩고 좀이 파먹어 약기운이 다 나가 버린다면, 토산 약재가 기운이 완전하여 좋은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향약을 써서 병을 고친다면 반드시 힘이 덜 들고 효험은 빠를 것이니,
이 《향약제생집성방》이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인가! 전(傳)에 이르기를
‘용한 의원[上醫]은 나라도 치료한다’ 하였다. 지금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원대한
국운(國運)을 열어서, 도탄에 빠진 백성의 고통을 건지고 만세의 반석 같은 기초를 세워, 밤낮없이
부지런히 다스리기에 마음을 다하고, 백성을 살리고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방법을 더욱 꾀하매,
백성을 인해(仁愛)하는 정사와 나라를 풍요하게 하는 도리가 본말(本末)이 아울러 시행되고
대소(大小)가 다 갖추어져서, 의약(醫藥)으로 병을 고치는 일까지도 정성을 다하였다. 백성을 잘
보호하고 배양하기를 이토록 지극하게 하니, 나라 다스리기를 원대하게 한 것이다. 어진 정사가 한
시대에 덮이고 은택이 만세토록 흘러갈 것을 어찌 쉽사리 헤아리랴!
홍무 31년 무인 여름 6월 하한(下澣)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귀한 자료 귀한 소개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귀한 자료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오랜만에 글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대부님의 명답에 감사드립니다.
▣ 김영윤 -
▣ 이왕섭 -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양촌 권근선생의 양촌집(陽村集)을 그동안 제가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 김윤식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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