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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12 --- 만호 김흔장군 안동영호루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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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24 21:42 조회1,6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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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12 --- 만호 김흔장군 안동영호루에 올라...





기록상 김흔장군은 1289, 1299, 1307년에 만호를 지내시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에 고향인 안동에 들러 영호루에 올라서 벽에 걸린 아버지 충렬공의 글을 이어 시 한수를 남기신 것 같습니다.



안동시 낙동강 건너편 ♠정하동의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映湖樓(영호루)는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건너편 ♠당북동에 있었는데, 충렬공(金方慶)께서 젊은 시절에 이곳에 올라 시와 풍월을 읊던 곳이고,



충렬공께서 일본을 정벌하실 때 안동(복주)를 지나시다 영호루에 올라 시를 지은 바 있고, 충렬공의 둘째아들 김흔(金 ) 장군과 충렬공의 현손(김방경-김선-김승택-김묘-김구용) 金九容이 영호루에 올라 충렬공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은 바도 있는 우리나라의(영남의) 3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 만호(萬戶) 김흔장군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39세) 1289년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기해 25년(1299)

기해 25년(1299) 봄 정월

정유일에 ★만호 인후, ●김흔, 밀직 원경 등이 상부의 승인 없이 자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와 상장군 이영주를 붙잡고 그들이 반역 음모를 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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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흔은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하여 금호부(金虎符)를 띠게 되고 따라서 소용 대장군 관 고려군 ★만호(管高麗軍萬戶)로 되었으며 진국 상장군(鎭國上將軍)의 관계를 더 받았고 여러 번 조동되어 첨의 참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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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김흔을 찬성사 자의(咨議) 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 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 안동 영호루에 올라 시를 지은신 선조님



●忠烈公 方慶 詩詠 福州(今安東) 映湖樓

---충렬공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이시는 충렬공께서 ?년에 복주(지금의 안동) 영호루에 가셔서 소년시절에 놀으시던 루에 올라 감개무량한 정을 만끽하면서 지으신 시다 (거금 731년전)

---충렬공 22대손 (안렴사공 18대손) 사달(의박 서예가)은 이 글을 쓰다



<대종회 연혁>

---1995

映湖樓에 게시했던 忠烈公 시문 현판이 유실되어 35萬원을 들여 새로 제작하였다.





●登福州映湖樓 (都僉議公 흔 )

---충렬공 둘째아들 김흔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十載前遊入夢淸 옛날 놀던 일 꿈속에 환하게 들어 오며,

重來物色慰人情 다시 오매 풍경이 인정 위로하네.

壁間奉繼嚴君筆 벽에 걸린 아버님글 이어 쓰니,

堪言也愚兒萬戶行 어리석은 아들 만호 걸음이 부끄럽네.





●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 (文溫公 九容)

안동영호루에 고조 상락공 시의 운을 따서

---척약재 김구용



先祖題詩字字淸 선조께서 지으신 시 글자마다 맑고 맑아,

重來此日更含情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정감이 새로워라.

江山似有留連色 안동강산은 옛모습 그대로 어울러 있으니,

仍占春風末肯行 봄바람 기대서서 가기 싫을 뿐일세.



***한자가 지원되지 않아 한글로 적은 글자 설명

흔=기뻐할 흔=心방변에 도끼斤을 합한 글자

타=속일타,방탕할탄,으쓱거릴 이=말씀言변에 어조사也를 합한 글자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영호루유허비(映湖樓遺墟碑)

【관리번호】760-230-231-024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유허비)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

【시대】고려시대도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는 높이 179cm, 폭 61cm, 직경 31cm이며, ★김일대가 글을 짓고, ★남장수가 글을 썼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 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700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화 경명에 파형이 문체를 이루고 호월천리에 상하 누경이 영수만경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그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여말에 건립되었으나 영호루는 고려 충렬왕 초년(1274) 명현 ★김방경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안동에 들려 이 누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몽진하면서 이 누에 자주 소일하였고 환도후에 영호루 삼자의 어필을 하사하니 공민왕 17년(1368)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을 중건하고 액자에 금을 입혀 편액하였다.

120년 후 선종 19년(1488) 벼락으로 인하여 부사 김이 중수하였고

명조 2년(1547) 7월 홍수로 유실되어 5년후 부사 안한중이 복원하였다.

선조 38년(1605)에 두번째 유실되어 74년 후인 숙종 2년(1676)에 부사 맹서가 복원하였고

영조 51년(1775) 홍수로 세번째 유실되어 12년 후 무신에 부사 신익이 복원하였으며

정조 16년(1792) 홍수에 네번째 유실, 4년후 병진에 부사 이집두가 복원하였고

139년후 갑술 7월 홍수로 다섯번째 유실되어 36년후 1970년에 시장 김낙현이 재직시 강 건너 남암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302-303.

【비 고】











▣ 김항용 -

▣ 김윤만 -

▣ 김윤식 - 지난 여름 영호루 풍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더위에 쫓기다 영호루에서 불던 시원한 바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김우회 - 글을보니 나도 가서 위의 뜻을 세기며 깊은 시한수 읋고 싶어지는구료.감사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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