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봉화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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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3-25 18:29 조회2,184회 댓글0건본문
봉화정씨(奉化鄭氏)
봉화 정씨(奉化鄭氏)의 시조(始祖) 정공미(鄭公美)는 고려 성종(成宗) 때 봉화(奉化)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봉화(奉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시조 공미의 아들 영찬(英粲)이 비서랑(秘書郞)과 동정(同正)을 지냈으며,
영찬의 아들 균(均)이 검교군기감정(檢校軍器監正)을 역임했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운경(云敬)은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전교교감
(典校校勘) 등을 지낸 후 충혜왕(忠惠王) 때 지밀성사(知密城事)를 지냈고 공민왕조(恭愍王朝)에서는
전주 목사(全州牧使)·지형부사(知刑部事)를 거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碩學)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도전(道傳)은
운경(云敬)의 아들로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
(領議政)에 올라 새 왕조(王朝)를 세우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공적(功績)은 무위(無爲)로 돌아가 왕자들 사이에 벌어진 정권(政權) 쟁탈전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1394년(태조 4) 정 총(鄭 摠) 등과「고려사(高麗史)」를 찬진했고 글씨와 문장에 뛰어나 태조(太祖)의
공덕(功德)을 찬양한「문덕곡(文德曲)」·「신도가(新都歌)」·「몽금척(夢金尺)」 등 많은 유집(遺集)을
남겼으며,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두 왕조에 몸을 바친 자신의 괴로움을 나타낸 시조(時調) 「회고가
(懷古歌)」와 산중(山中)을 노래한 시(詩)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한 도복(道復)은 도전의 동생으로, 중추원 좌승선(中樞院左承宣)을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고, 이어 한성부
좌윤(漢城府佐尹)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했다.
1403년(태종 3)에 성주(星州) 유학교수(儒學敎授)로 천임(薦任)하였고, 1409년(태종 9)에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지냈다.
도전의 아들 진(津)은 사재령(司宰令)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로 기용되어
인령 부윤(仁寧府尹)이 되었고 1420년(세종 2)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공조(工曹) 및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담(澹)은 도존(道存)의 아들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으며, 담의 아들 간(柬)은 대호군
(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도전(道傳)의 증손(曾孫)인 우의정(右議政) 문형(文炯)은 세조(世祖) 때 좌익원종일등공신
(佐翼原從一等功臣)에 올라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으며, 세종(世宗)과 연산군(燕山君)을 이어
7왕조(王朝)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이도(吏道)에 벗어나는 일이 없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아 명망 높은 가문(家門)임을 널리 후세에까지 알렸다.
[人口(1985년 현재)] 20,468명이 있다.
▣ 김항용 -
▣ 김재원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 김윤만 -
봉화 정씨(奉化鄭氏)의 시조(始祖) 정공미(鄭公美)는 고려 성종(成宗) 때 봉화(奉化)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봉화(奉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시조 공미의 아들 영찬(英粲)이 비서랑(秘書郞)과 동정(同正)을 지냈으며,
영찬의 아들 균(均)이 검교군기감정(檢校軍器監正)을 역임했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운경(云敬)은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전교교감
(典校校勘) 등을 지낸 후 충혜왕(忠惠王) 때 지밀성사(知密城事)를 지냈고 공민왕조(恭愍王朝)에서는
전주 목사(全州牧使)·지형부사(知刑部事)를 거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碩學)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도전(道傳)은
운경(云敬)의 아들로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
(領議政)에 올라 새 왕조(王朝)를 세우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공적(功績)은 무위(無爲)로 돌아가 왕자들 사이에 벌어진 정권(政權) 쟁탈전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1394년(태조 4) 정 총(鄭 摠) 등과「고려사(高麗史)」를 찬진했고 글씨와 문장에 뛰어나 태조(太祖)의
공덕(功德)을 찬양한「문덕곡(文德曲)」·「신도가(新都歌)」·「몽금척(夢金尺)」 등 많은 유집(遺集)을
남겼으며,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두 왕조에 몸을 바친 자신의 괴로움을 나타낸 시조(時調) 「회고가
(懷古歌)」와 산중(山中)을 노래한 시(詩)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한 도복(道復)은 도전의 동생으로, 중추원 좌승선(中樞院左承宣)을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고, 이어 한성부
좌윤(漢城府佐尹)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했다.
1403년(태종 3)에 성주(星州) 유학교수(儒學敎授)로 천임(薦任)하였고, 1409년(태종 9)에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지냈다.
도전의 아들 진(津)은 사재령(司宰令)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로 기용되어
인령 부윤(仁寧府尹)이 되었고 1420년(세종 2)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공조(工曹) 및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담(澹)은 도존(道存)의 아들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으며, 담의 아들 간(柬)은 대호군
(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도전(道傳)의 증손(曾孫)인 우의정(右議政) 문형(文炯)은 세조(世祖) 때 좌익원종일등공신
(佐翼原從一等功臣)에 올라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으며, 세종(世宗)과 연산군(燕山君)을 이어
7왕조(王朝)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이도(吏道)에 벗어나는 일이 없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아 명망 높은 가문(家門)임을 널리 후세에까지 알렸다.
[人口(1985년 현재)] 20,468명이 있다.
▣ 김항용 -
▣ 김재원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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