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중님의 글에 대한 본인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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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섭 작성일03-03-26 18:48 조회1,807회 댓글0건본문
▣ 김정중 - 저희 선안동김은 신라왕족! 고려외족! 조선조 문헌족으로서 려조에 크게 번성하였으나 조선조 특히 중기이후는 그다지 많은 벼슬이 없습니다 . 타성과의 비교분석은 좀 그렇네요
김정중님에게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가 신라의 왕족이며 고려의 외족! 고려조에 크게 번성하고 조선중기이후는 큰 벼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성관(姓貫)도 씨족사에 있어 부침(浮沈)이 있기 마련입니다. 선안동김씨가 신라의 왕족이며 고려의 외족으로 고려조에 번성하였다면 그만한 상응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의이씨(全義李氏)도 부침이 있었기 마련입니다.
고려조에는 장군으로 몽고군을 무찌르고 전공이 뚜렷하여 현대에 이르러 국산잠수함 1호로 명명된 『이천함(李阡艦)』도 본종(本宗)의 인물인 『이천(李阡)』장군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여 두문동 72현에 오른 이사경(李思敬)과 같은 인물도 있습니다.
김정중님의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융성한 성관(姓貫)이었고 조선조 중기이후에는 많은 벼슬이 없기 때문에 타성(他姓)과의 비교분석은 좀 그렇다고 하는 이야기는 조선시대 중기이전에는 인물이 많기에 비교해도 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안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안동김씨의 김자점(金自點)이나 김직재(金直哉)처럼 전의이씨도 어떠한 난이나 옥사에 연좌된 인물들이 있으며(예를 들면 조선중종때 대사성을 지낸 이과(李顆)와 병조좌랑을 지낸 이부(李 兆頁) 형제나 순조때 홍경래난의 이희저(李禧著), 고종때의 이필제(李弼濟) 등) 그 후손들이 노비가 되거나 등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숨어살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선안동김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관(姓貫)들이 이러한 유형의 비교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객관적인 무엇인가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명문(名門), 고가대족(故家大族), 벌열(閥閱)이니 하는 말들은 많이 들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관(姓貫)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닙니다. 부단한 노력과 부침속에서도 뚜렷한 인물배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성(他姓)과의 비교분석.....
전의이씨(全義李氏)와 선안동김씨와의 인물배출 수치를 제가 남겼습니다. 한가지만이 아니라 비교가능한 많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자칫 아집(我執)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이르러 여러 논문이나 책자등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것을 기록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가령 차장섭교수의 벌열가문연구에 관한 책자는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선안동김씨에서도 그냥 비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보다는 선안동김씨와 후안동김씨와의 인물분리작업이 빨리 선행되어야 하고 분리된 인물에 대한 개별적인 자료연구에 충실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김정중님이 위에 쓰신 글을 논박할 것도 없지만 그럼 왕족도 아니고 왕실의 외척도 아니고 특별하게 세도가가 나온 것도 아니며 인구도 적으면서 실력으로 승부를 한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와 전의이씨(全義李氏) 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간단한 내용의 수치를 만든 내용은 선안동김씨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이러한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행해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도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안동김씨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참여라는 것입니다.
남들은 인식을 못하겠지만 그 참여라는 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참여속에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어떤 것이 정립화되고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참여는 선안동김씨를 다르게 바라다보는 무언가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 김재익 - 하나의 객체는 그하나의 순수로 보는 것도 좋지요, 자연속의 잡초 한포기도 그본래의 생을 다하면 그값이 그곳에 머물러 자연으로서 이어져 오늘이 있지안는가
▣ 김윤만 -
김정중님에게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가 신라의 왕족이며 고려의 외족! 고려조에 크게 번성하고 조선중기이후는 큰 벼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성관(姓貫)도 씨족사에 있어 부침(浮沈)이 있기 마련입니다. 선안동김씨가 신라의 왕족이며 고려의 외족으로 고려조에 번성하였다면 그만한 상응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의이씨(全義李氏)도 부침이 있었기 마련입니다.
고려조에는 장군으로 몽고군을 무찌르고 전공이 뚜렷하여 현대에 이르러 국산잠수함 1호로 명명된 『이천함(李阡艦)』도 본종(本宗)의 인물인 『이천(李阡)』장군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여 두문동 72현에 오른 이사경(李思敬)과 같은 인물도 있습니다.
김정중님의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융성한 성관(姓貫)이었고 조선조 중기이후에는 많은 벼슬이 없기 때문에 타성(他姓)과의 비교분석은 좀 그렇다고 하는 이야기는 조선시대 중기이전에는 인물이 많기에 비교해도 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안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안동김씨의 김자점(金自點)이나 김직재(金直哉)처럼 전의이씨도 어떠한 난이나 옥사에 연좌된 인물들이 있으며(예를 들면 조선중종때 대사성을 지낸 이과(李顆)와 병조좌랑을 지낸 이부(李 兆頁) 형제나 순조때 홍경래난의 이희저(李禧著), 고종때의 이필제(李弼濟) 등) 그 후손들이 노비가 되거나 등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숨어살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선안동김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관(姓貫)들이 이러한 유형의 비교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객관적인 무엇인가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명문(名門), 고가대족(故家大族), 벌열(閥閱)이니 하는 말들은 많이 들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관(姓貫)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닙니다. 부단한 노력과 부침속에서도 뚜렷한 인물배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성(他姓)과의 비교분석.....
전의이씨(全義李氏)와 선안동김씨와의 인물배출 수치를 제가 남겼습니다. 한가지만이 아니라 비교가능한 많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자칫 아집(我執)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이르러 여러 논문이나 책자등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것을 기록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가령 차장섭교수의 벌열가문연구에 관한 책자는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선안동김씨에서도 그냥 비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보다는 선안동김씨와 후안동김씨와의 인물분리작업이 빨리 선행되어야 하고 분리된 인물에 대한 개별적인 자료연구에 충실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김정중님이 위에 쓰신 글을 논박할 것도 없지만 그럼 왕족도 아니고 왕실의 외척도 아니고 특별하게 세도가가 나온 것도 아니며 인구도 적으면서 실력으로 승부를 한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와 전의이씨(全義李氏) 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간단한 내용의 수치를 만든 내용은 선안동김씨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이러한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행해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도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안동김씨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참여라는 것입니다.
남들은 인식을 못하겠지만 그 참여라는 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참여속에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어떤 것이 정립화되고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참여는 선안동김씨를 다르게 바라다보는 무언가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 김재익 - 하나의 객체는 그하나의 순수로 보는 것도 좋지요, 자연속의 잡초 한포기도 그본래의 생을 다하면 그값이 그곳에 머물러 자연으로서 이어져 오늘이 있지안는가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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