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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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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3-03-28 21:03 조회1,5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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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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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정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라 하였는데 조선조 을사사화때 조광조 선생을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옥고를 치룬 강직한 성품의 학자로써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잔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원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현재 백전부락 어구에는 700∼800여년된 느티나무와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활로 뱀을 쏘아 맞춘 사사처(射蛇處)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관직생활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하면서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군기(軍器)시 판관(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 김항용 -
▣ 김주회 -
▣ 김윤만 -
▣ 김윤식 - 대부님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시민회 - 김은회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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