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에 대하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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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3-03-28 21:24 조회1,935회 댓글0건본문
◎사망과 조정의포상
김시민장군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인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중 죽은체 하고 숨어 있던 왜병의 저격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가 며칠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 장군의 사망일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음력 10월 18일(임진잡록)과 12월 26일(족보)이 있다. (규명 필요)
그후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사 선조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상락군에 추록하였으며, 숙종때에는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였다.
◎ 역사적평가
▧김시민장군은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진몰(陳沒)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훈련원 판관 재직시 낡고 녹슨 병기(兵器)와 해이된 군기(軍紀)를 보고 일조유사시 국가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상관인 병조판서에게 충심으로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자 분연히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자신의 정당한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키려 한 올곧은 선비정신이 뛰어났으며
▧위난에 처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함에 있어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등 솔선수범하였고
▧3,800명의 적은 군사로 8배에 가까운 왜병 3만여명을 맞아 다양한 전략전술로 적을 격퇴시킨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적의 저격 등 위험이 농후한 상황에서 예하장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을 둘러보며 부하장병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케 한 것은 위험을무릎쓰고 맡은바 소임을 완수하려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것이며
▧또한 총탄에 맞아 쓰러져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는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애국충절의 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다.
▣ 김항용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 솔내영환 -
▣ 김시민기념사업회 - 정말 고맙습니다. 향후 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의 추진계획 등도 소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보내 드리겠습니다.(전화 : 041-577-5757)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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