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 06 --- 석사학위논문01 (1993.8, 류선영)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3-31 02:14 조회1,676회 댓글0건

본문



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 06 --- 석사학위논문01 (1993.8, 류선영)



1281년 제2차 일본정벌을 다녀오신 이후의 충렬공 할아버지의 말년 행적을 7-8회 정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존에 소개되어 있는 자료입니다만 다시한번 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석사학위논문에 충렬공의 정치활동과 성격에 대한 분석내용이 있어 만년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元帝와 충렬왕을 둘러싸고 새로운 세력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때 그(=김방경)는 원의 요구에 의해 제1,2차 일본정벌(1274,1281년)을 총관하였고, 원으로부터 萬戶를 제수받는 등 원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두 차례 무고를 당하는 등 충렬왕의 폐행세력, 그리고 부원배의 견제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필도치의 구성에서 제외되는등 점차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다.





전통 문벌가문의 후예였지만 낙향했다가 최씨정권에 발탁되었던 김방경의 가문적 배경은 그의 정치적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최씨집권기에 김방경은 최씨정권과 밀착되어 있었지만 왕실을 존중하는 등 최씨정권 아래 다른 무인과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최씨정권이 몰락하자 그는 김준,임연 정권에 반대하였고, 왕과 문신편에 서서 개경환도에 앞장섰으며 삼별초 토벌에 적극 노력하였다.





또한 김방경은 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반역배와는 입장을 달리 하였다. 그는 몽고와의 항전의 어려움 때문에 강화에는 찬성하였지만, 그는 원에 깊이 예속되는 것만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몽고 군사가 대동강 이남에 오는 것을 막으려 하였고, 최탄,한신 등이 서북면을 장악하여 몽고에 항복하고 몽가독을 끌어 들여 왕경을 정복하자고 했던 것에도 반대하였다.







충렬왕대의 새로운 권력 재편기에 김방경은 폐행세력과 대립하여 갔다. 두 차례의 김방경 무고사건 발생이나 충렬왕의 폐행인 이분희 형제 제거와 권의 탄핵, 필도치 구성에서의 탈락 등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가 폐행세력과 대립했던 이유는, 우선 충렬왕의 왕권강화 작업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충렬왕의 왕권강화 작업은 원과 연결되어 원종대부터 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방경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면을 가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폐행세력과 김방경은 성장배경이 달랐던 점에서 대립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폐행세력은 충렬왕의 총애에 의지하여 성장하였으며, 김방경은 음서나 과거등 정통적인 방법에의해 진출하여 기득권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기존세력을 억압하려는 부원배와 김방경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가 한때 조인규와 대립하기도 하였지만, 뒤에 사돈관계를 맺는 것 등에서 그의 일정한 타협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는 고려 왕실을 부정하는 반역배와는 대립했지만, 원 간섭기 아래 원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 세력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김방경의 가족 및 혼인관계에 대해 알아 보겠다. (김방경후대가계도 참조) 김방경은 첫부인으로 박익정의 딸을 맞이하였다. 기거랑지제고중서사인을 지낸 박익정은 무인집권기에 고급관인을 배출하여 세족으로 성장한 죽산박씨의 후예였고, 인천이씨 이장용과는 사돈관계였다. ---박익정의 장남 휘가 이장용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의 처남의 장인이 이장용이었다. (김광철, 고려후기 세족층과 그 동향에 관한 연구) --- 박씨는 3남3녀를 두고 김방경에 앞서 사망하였다.

김방경은 재취로 손씨를 맞아 1녀를 두었으나 손씨에 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 서북면에 있을 때 김방경은 관기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다.





김방경의 큰 아들 선은 황조정대부사재경 설인검의 여와 결혼하여 전법판서 상장군에 올랐다.

둘때아들 흔은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여 판밀직사사찬성사상락공에 이르렀지만, 그의 혼인관계는 알 수 없다.

셋째아들 순(1258-1321)은 문과에 합격하고 도첨의중찬 허공의 여와 결혼하여 중대광상락군판삼사사보문각대제학상호군에 이르렀다. 순의 장인 허공은 최씨정권 말기부터 출세길에 올랐던 인물이었고, 공암허씨는 고려후기 권문에 속하였다.



김방경의 첫째사위인 조변은 참지정사 조계순의 아들인데, 횡천조씨 조계순은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이 집안은 무인집권기에 세족으로서 기반을 갖추었다.

막내 사위인 평강 채홍철은 뒤에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찬성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김방경의 큰 손자 승용(선의 큰 아들)은 문과에 합격하여 첨의찬성사 원관의 여와 결혼하였고, 밀직사 만호에 올랐다. 원관은 충렬왕대 중찬에 오른 원부의 아들로 이 원주원씨는 원부 이래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가문이다.

둘째손자 승택은 삼중대광도첨의사 정승에 올랐다.

또 큰 손녀(흔의 첫딸)은 찬성사 조련과 혼인하였는데, 조련은 평양조씨 조인규의 아들이었다.



또 순에게서 난 세 손녀는 각기 무인집권기 무반을 배출하였고 충렬왕때 찬성사를 지낸 청주정씨 정계의 아들인 정책(판선공시사), 성리학을 수용한 남포 백이정(대광상당군), 원의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야영돈(절강성참지정사)과 혼인하였다.

순의 아들 영돈은 좌정승 판정치도감사에 이르렀다.



김방경의 증손자 후(승용의 큰 아들)는 검교첨의평리 만호에 이르렀고, 묘(승택의 아들)은 찬성사 민적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상락군에 봉해졌다.





이상과 같이 김방경은 죽산박씨를 처가로 두었고, 그의 자손들은 공암허씨, 횡천조씨, 원주원씨, 평양조씨, 청주정씨, 남포백씨 등 당대의 세력가문 및 원의 고위층과 혼인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혼인관계가 김방경과 그후의 안동김씨의 정치활동과 세력형성의 기반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김항용 -

▣ 김영윤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태영(군) 아저씨가 여러 차례 말씀하신 이야기(충렬공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혼맥 관계)와 연결시켜 보면 큰 수확이 있을 것 같습니다.

▣ 김윤만 - 할아버지와 이장용과의 관계가 사돈지간이었군요.

▣ 솔내영환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