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 07 --- 석사학위논문02 (1993.8, 류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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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31 20:54 조회1,637회 댓글0건본문
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 07 --- 석사학위논문02 (1993.8, 류선영)
1281년 제2차 일본정벌을 다녀오신 이후의 충렬공 할아버지의 말년 행적을 7-8회 정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존에 소개되어 있는 자료입니다만 다시한번 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석사학위논문에 충렬공의 정치활동과 성격에 대한 분석내용이 있어 만년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충렬왕대로 접어들면서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서 그 간섭 아래에 놓이게 되자 정국은 새로운 판도로 전개되었다. 우선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실이나 또는 기존세력을 억압하려는 부원배가 진출하였다.
그런가 하면 충렬왕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새롭게 내료배를 키워 갔다. 원 조정과 충렬왕을 두축으로 하여 부원배와 내료배가 새롭게 성장한 것이다.
이러한 정국에서 기존의 전통가문을 중심으로 한 세력 집단은 충렬왕과 원, 그리고 부원배와 내료배를 사이에 두고 세력 다툼을 벌여야 했다.
이러한 때 김방경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그의 충렬왕과의 관계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김방경이 충렬왕과 관계를 맺은 것은 고려왕실에 의해 개경환도정책이 추진되던 때로부터였다.
당시 태손이었던 충렬왕에 의해 환도정책이 추진되면서 김방경은 출배별감으로 임명되어 환도준비를 담당하였다. 이어 원종복위 과정에서 김방경은 군사적 실력자로서 당시 세자였던 충렬왕의 편에 섬으로써 둘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했을 때 김방경이 즉위 표문을 바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것은 둘의 밀착 관계를 잘 알려 준다. 그리고 원의 일본정벌 요구에 대해 충렬왕은 1차 일본정벌에서 김방경을 통해 그것을 추진하였고, 그 공을 내세워 원에서 호두금패를 그에게 주게 하였다.
또 충렬왕은 자신이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마련한 萬戶를 첨의중찬이던 김방경에게 더해 줌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더욱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는 김방경의 세력성장을 막기 위한 충렬왕이나 그의 측근의 견제 또한 적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277년(충렬왕3) 위득유, 노진의 등에 의한 무고때 충렬왕은 처음에 중립적인 위치에서 김방경을 견제하였다.
또 충렬왕이나 그 측근의 김방경 견제는 다음해 설치된 필도치의 구성에서 잘 나타난다. 필도치는 충렬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김주정, 박구, 염승익, 이지저 등 그의 측근 인물들로 구성한 기구로서 재추회의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런데 김방경은 첨의중찬이라는 최고의 관직에 있으면서도 필도치의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충렬왕과 그 측근에 의한 견제에 대해 김방경은 사직으로 맞섰다. 1280년(충렬왕6) 김방경은 원의 일본정벌을 앞둔 시점에서 연이어 세차례나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김방경의 사직 수락 요구에 대해 충렬왕은 원의 일본정벌에서 그가 필요함을 들어 그것을 불허하였다. 이때는 국내적으로 일본정벌 준비가 완료되어 이를 원에 알렸고, 원에서도 흔도,다구 등에게 출정을 명한 때였다.
이러한 때 원의 신임을 받아 일본정벌에 책임을 맡을 것으로 기정 사실화되어 있는 김방경의 사직 요청은 충렬왕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충렬왕은 일본정벌을 위한 원수를 김방경으로 임명하지 않을 때 원으로부터 혹 오해가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사직을 허락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일본정벌 출정에서 도원수를 맡음으로써 그의 위세는 다소 만회되었을지 모르나 그는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점차 밀려 났다. 충렬왕은 박구, 김주정 등 측근세력을 원에 거듭 요청하여 만호에 임명받게 하였고, 또 이들에게 김방경 다음가는 위치인 좌우부도통을 각각 임명하여 새로이 일본정벌을 수행하게 했다.
특히 제2차 일본정벌은 충렬왕이 제1차 일본정벌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도에는 홍다구 등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관계를 호전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또한 충렬왕의 군사권 통제의 강화를 통한 왕권강화의 의도도 있었다.
충렬왕은 일본정벌에 앞서 그가 추천한 고려 군민에게 몽고 관직, 곧 총관, 천호, 총파 등을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자신이 직접 합포에 가서 크게 사열을 받았다. 이러한 것은 출정을 기회로 군사통제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왕권강화 작업에서 자연 김방경의 위치는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원종의 복위과정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고, 또 강화파로서 원과도 관계가 깊었던 김방경은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부원배와 내료배 등 새로운 세력과 대립하였다. 그는 원을 등에 업은 홍다구 같은 원의 주구와 대립하였다.
또한 그는 권문을 억압하는 왕의 폐행세력인 이분희, 이습 등을 제거하였고, 또 안렴사 권의를 탄핵하였다. 그는 왕실 및 기존세력을 위협하는 원의 주구와도 대립하였고, 왕의 폐행세력과도 대립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권력재편의 시기에 김방경이 폐행,부원세력과 대립하였던 이유는 물론 그의 정치적 성격이 이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김방경은 음서나 과거 등 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진출하여 기득권을 유지한 문벌의 후예로서, 원 또는 왕과의 인연으로 급속히 성장한 폐행, 부원배와는 근본이 달랐던 것이다.
원나라에 대해 강화파로서 역할하였던 기방경은 큰 아들을 원 조정의 사재경 설인검의 딸과 혼인시키는 등 적극적인 친원자세를 취하였다. 충렬왕 즉위 이전 세 번 入元하였던 그는 이후에도 공식적 사신으로 세 번, 무고사건으로 인한 원제의 부름에 의해 한번 입원하였다.
공식적인 사신으로서 한번은 충렬왕 즉위 표문을 바치기 위해서, 두 번은 성절 및 신정 하례를 위해서였다. 그때 그는 원으로부터 호두금패를 받고, 일본정벌 도원수직을 제수받았다.
이러한 김방경의 원으로부터의 환대는 그의 친원적 성격을 강하게 하였고, 그의 손자가 원의 최고 실력자인 좌승상의 딸과 혼인하는 관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원의 간섭 아래 놓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원의 벼슬을 받았지만, 그러나 부원배처럼 원에 적극적으로 의부하지는 않았다.
전통 문벌가문 출신으로 권력을 잡고 있었던 그는 새롭게 원에 나라를 팔아 권력을 장악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위치는 원종 말년(1274) 문하시중에 으른 이래 비록 기복은 있었지만 충렬왕 9년(1283, 72세) 첨의중찬으로 치사할 정도로 고려 국내에서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여 확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고려 국가의 독립성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과 고려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의 후손들은 역시 원과 더욱 밀착되어 갔다.
▣ 솔내영환 - 손자가 원의최고 실력자인 좌승상의 딸과 혼인--- 여기서 좌승상은 누구이며, 이 손자는 누구인가요?
▣ 김주회 - 날카로운 지적 감사합니다. 논문 제출자인 류선영 이라는 분이 잘못 분석한 것 같습니다. 김순묘지명(1321,민지 찬) 에 ---3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에게로 출가하였다.--- 라는 기록과 김순처허씨묘지명(1332,이제현 찬) 에 ---막내 딸은 王人 별리가불화에게 출가하였으니 절강성 참지정사라 --- 라는 기록으로 볼때 손자가 아니고 손녀(문영공 김순의 막내딸)가 원나라 좌승상의 아들과 혼인한 것 같습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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