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서> 최순우 선생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4-04 03:59 조회1,730회 댓글0건

본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서> 최순우 선생





(조선일보/사설칼럼)

[만물상] 문화 유산 (2003.01.28)



런던 템즈강가의 고즈넉한 주택지 첼시. 이집 저집 기웃거리고 다니는 관광객들이 적잖다. 때로는 작은 메가폰을 든 안내자까지 앞세워 이 골목 저 골목 무리지어 다니기도 한다. 작가들 집 구경에 나선 이들이다. 여성작가 조지 엘리어트가 1880년까지 살았던 집은 파란 명패를 자랑스레 내붙였다. 제일 인기있는 집은 007작가 이언 플레밍이 살았던 타운하우스. 19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녁마다 들러서 맥주를 마셨다는 술집도 그대로다.





서울에서 최근 옛 집 두 채가 풍진(風塵)으로 돌아갔다. 신체시(新體詩)를 써서, 현대 한국 문학의 길을 열었던 최남선의 우이동 자택 ‘소원’(素園)이 철거된 데 이어 연세대학 구내의 연합신학대학원(연신원) 건물은 철거 반대 농성을 하던 교수들이 자리를 비운 새벽을 틈타 사라지고 말았다. 1929년 지은 여덟칸짜리 기와집 소원 자리에는 빌라가 들어서고, 담쟁이로 뒤덮였던 고색창연한 연신원 터엔 현 규모의 15배 면적 빌딩이 계획되어 있다.





‘서울문학기행’이란 책을 쓴 장태동씨는 소원을 일러 “일제 말, 육당이 이곳으로 이사할 때 트럭 7대분, 17만권의 책을 실어갔다”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향나무, 전나무 숲을 빙 두른 이 집 곳곳엔 육당의 체취가 서려있었으나, 지난해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그의 친일 행각 때문에 굳이 문화재로 남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선왕조 600년 도읍지에, 100년 넘는 근대사를 지닌 서울이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은 70곳 뿐이다. 법으로 문화재 등록을 시행한 것도 불과 2년 전부터다. 김영삼 정부에서 허문 중앙청은 그때까지 법적으로 아무 지위도 없었다. 1860년대부터 1941년까지 지은 근대건축물 중 등록 대상 건축물은 62건인데, 그나마 목록은 비공개다. 소유주가 알면 당장 철거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대조적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서’로 잘 알려진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의 성북동 고택은 문화 유산을 지켜내는 시민 운동의 첫 결실로 6월부터 일반 공개된다. 외양을 지키면서 찻집으로 변신한 시인 이태준 가옥도 근대 건축물 지키기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땅 값보다 문화 유산 값이 더 비싸게 치일 날이 머잖았다. 그때가서 무릎 칠 일은 막아야한다.

(朴善二 논설위원 sunnyp@chosun.com )









(조선일보/사설칼럼)

[이규태 코너] 崔淳雨 古宅 (2002.12.06)



언젠가 덕수궁 박물관으로 미술사학자 ★최순우선생을 찾아갔을때 작업복 차림으로 도자기를 운반하면서 도자기들에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 했다. 범인(凡人)에게 와닿을 리 없는 도자기 휴가다. 많은 관람객에게 노출될수록 도자기에 피로한 기색이 쌓이는 것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정한 시일 동안 사람들의 안광(眼光)으로부터 휴식시키는 것으로 미를 아낀다는 것이었다.

고려청자와 수십년을 더불어 살다보니 청자의 색이 살결에 스며든 것을 느낀다고도 했다. 특히 부슬비 오는 날 오후 청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체의 잡념이 청자에 빨려들고 대신 청자가 뿜어대는 청색이 방안에 가득한 착각을 갖게 된다고도 했다. 속인으로서 이를 수 없는 미의 차원에서 ★최순우선생은 이렇게 평생을 살았다.





서울에 살게 되면서 그는 달빛이 비치는 영창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 꿈이었고 성북동 외딴 데 그 꿈을 이루었다. 늦가을 달밤에 불을 끄면 영창에 감나무가 추상화같은 구도로 비치고 이른봄이면 아침 안개가 옅은 보라색으로 영창을 물들이며 겨울밤에는 문살에 눈이 소복히 고여 밤을 은은히 밝혀준다했다.

어느해던가 옆집에 그 동창(東窓)을 가리는 높은 빌딩이 서 반대편 용(用)자 문살의 서창(西窓)으로 영창의 꿈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수가 싫어 잡목을 아무렇게나 심어놓은 이 서창으로 그의 반(反)도시성 향수를 유지시켰던 것이다. 일본집처럼 섬세하거나 근시안적인 미도 아니요, 중국집처럼 밀폐성이나 장대한 호화미도 없으며 자연환경에 조화하여 시샘이나 존대나 가식·허세를 부리지 않은ㅡ 그저 그 속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라앉는ㅡ그런 집이다.



소박하고 가식없고 허세부리지 않은 한국의 미는 그런 집에서만 탄생할 수 있다던 ★최순우선생이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눈부신 당채(唐彩)나 페르시아 도기(陶器)와는 달리 회청(灰靑) 회백(灰白)색인 것은 바로 한국 집의 겸손한 으스름한 공간의 투영이라 했다. 이 ★최순우 선생의 미의 산실인 성북동 고택이 시민 기부금으로 구입 보존하는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1호 문화재가 됐다는 보도가 있었다.보존할 것은 외형인 고택만이 아니라 그 속에 어떻게 선생의 미의 철학을 담느냐는 것일게다.









(조선일보/문화)

[문화] ‘시민 문화재’로 거듭나는 ‘★최순우 古宅’ (2002.12.05)



시민들이 문화 유산을 지켜내는 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문화ㆍ자연 유산을 매입, 보존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운동’(대표 김상원)은 4일 “미술사학자 고 ★최순우씨 고택(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을 시민 기부금으로 매입, 내부 수리를 거친 뒤 내년 6월부터 전시관으로 운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지 120평에 안채와 사랑채 등으로 이뤄진 ★최순우 고택은 조선 말기 선비 집의 운치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씨는 1984년 작고하기까지 30년 간 이 집에 살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등을 집필했다.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우찬규 학고재 사장 등 독지가 10여명으로부터 총 10억원을 기부받아 매입비와 내부 수리비 등에 충당한다고 밝혔다.



최씨 고택을 문화 유산으로 지키도록 하는 데 실무를 맡아온 미술 사학자 김홍남교수(이화여대)는 “★최순우 관장 고택은 ‘시민문화재 1호’가 된 셈”이라고 자평했다.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5일 오전 11시 ★최순우씨 고택에서 기념식을 갖는다.

(愼亨浚기자 hjshin@chosun.com )











(주간조선)

[책마을] 새 책 (2002.09.02)



■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한국미에 미쳐 살았던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산문집. 저자의 대표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깨우쳐 주는었다면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는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마음씨를 엿보게 해준다. ‘함께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때로 아픔이 된다’는 저자의 따뜻함이 묻어난다. ★최순우 지음. 학고재. 9500원.











(조선일보/문화)

[문화] “한국美는 자연을 느끼고 닮는 것” (2002.08.23)



▲사진설명 : 생전의 ★최순우.분청사기와 목가구 등에 어린 조선 장인(匠人)의 꾸밈없는 손맛을 사랑했던 미술사학자였다./조선일보 DB사진



그는 당대 최고의 미적 감식안을 바탕으로 한국미를 우리 뿐 아니라 세계에도 알렸지만, 지인들은 그를 따듯했던 사람으로 우선 기억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관계자의 회상. “내남없이 가난했던 70년대 초, 아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한 국립박물관 직원 하나가 무작정 관장실로 뛰어갔어요. 선생은 원고료로 갓 들어온 돈을 몽땅 내주셨지요. 회식이라도 있으면 장차 쓰러질 망정, 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소줏잔을 나누면서 집안 대소사까지 이야기하셨던 분이지요.”



★최순우(崔淳雨·1916~1984). 그는 수식이 필요 없는 우리의 대표적 미술사학자이다. 한국미술사학의 개척자였던 고유섭에게 이끌려 1943년 개성 부립박물관에서 박물관 인생을 시작한 뒤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타계할 때까지, 만 41년 동안 우리 문화유산을 지켰던 한국미의 전도사였다. ‘한국미술사 개설’ ‘한국공예사’ ‘한국회화’ 등 쟁쟁한 저서는 지금도 미술사학도들의 필독서이며, 유고 수필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스테디셀러로 자리했다.



이제, 유고집 하나가 추가됐다. 60여편의 짧은 글들을 모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학고재간)다. 전집도 이미 나왔고, ‘무량수전…’을 통해 그가 이끄는 대로 한국미에 대해 산책할 수도 있는데, 또 무슨 유고집인가?



이 책은 ★최순우의 살내음 물씬 풍기는 글을 통해 ‘내(우리) 것이 왜 아름다운가’를 깨단하도록 하는 글을 모았다. ‘무량수전…’처럼 국보나 보물 등 개개 유물에 대한 설명은 때문에 많지 않다. 오히려 안개가 부드럽게 감싼 세종로 풍경과 호젓한 밤, 미닫이창에 비친 나무 그림자, 잘생긴 김장무 윗 토막에서 자라는 연둣빛 무순과 보랏빛 청초한 꽃 등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혹은 있었던) 대상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끼는 즐거움이 매우 소중하며 그에 따라 인생의 즐거움이 크게 달라진다… 참아름다움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진리의 갈피임이 틀림없다.”(‘세상을 살아가는 맛’ 중)



그 자연 속에서 느낀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한 것이 한국 미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한국의 산 석은 흙’과 ‘아름드리 소나무 장작불’로 만든 ‘가식없고 소박하며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탐탁스러운, 시작된 곳도 끝간 데도 모르는 어리숙한 선’(‘분청사기의 아름다움’ 중)의 분청사기를 그가 가장 사랑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전시회 때문에 파리로 떠날 무렵, 공항으로 전송하는 길에서 팔뚝시계를 바꾸어차며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간송 전형필(간송미술관 설립자)과의 교유, 6·25로 피난을 떠나며 넉달 동안 집을 비웠는데도 주인을 기다리며 집을 지켰던 바둑이에 대한 애틋한 회상 등에서는 그의 인간미를 민낯처럼 읽어낼 수 있다.



지난 84년, 당시로서는 평균 수명 이상의 나이였던 만 68세로 타계했음에도 지음(知音)이었던 한국화가 김기창은 “그가 너무 일찍 갔다”고 아쉬워했다. 그 아쉬움은, 그때껏 우리가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한국의 아름다움을 자각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했던 큰 등대랄까, 지남(指南)이 사라졌음에 대한 통분이었다.

( 愼亨浚기자 hjshin@chosun.com )













▣ 김윤식 -

▣ 김항용 -

▣ 솔내영환 -

▣ 김발용 -

▣ 김윤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