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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과서의 고려사>-삼별초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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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4-08 01:53 조회1,5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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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과서의 고려사>-삼별초편(3)


삼별초에 대한 정사와 왜곡사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정사에 바르게 기록되어 있고 많은 논문에서 이미 옳게 밝히고 있는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오늘날 국가 공공 교육기관에서는 어떤 史觀과 어떤 기준으로 재해석하거나 기술하여 국민에게 교육하거나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현 국가의 史觀과 삼별초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현 교과서가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1)명칭 : 고등학교 국사(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2)편찬자 : <국사 편찬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위원회>
 3)저작권자 : 교육인적자원부
 4)발행인 : (주) 두산
 5)발행일 : 2002. 3. 1 발행
 6)관련 면수 : 86P-87P

<몽고와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단위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에 쫒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평양 동쪽)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고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고는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고 사신 일행이 귀국하던 길에 국경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고군이 침입해 왔다(1231).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고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 들이게 되었고 몽고군도 큰 소득이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고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윤식 -
▣ 김완식 - 항용어른 씨디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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