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방경(金方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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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4-11 10:03 조회1,545회 댓글0건본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방경(金方慶)
▣ 제2권 p408<마전군 사묘(祠廟)>
--숭의전(崇義殿) : 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禮曹)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太祖)·혜종(惠宗)·성종(成宗)·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충렬왕(忠烈王) 및 공민왕(恭愍王)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祭田)을 주었다. 세종(世宗) 7년이 되어 유사(有司)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宗廟)에도 다만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前朝)의 사당은 팔위(八位)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 하므로,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二仲朔)으로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後孫)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유금필(庾금弼)·배현경(裵玄慶)·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김취려(金就礪)·조충(趙冲)·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했다.
▣ 제2권 p410<마전군 배향>
--김방경(金方慶) : 자는 본연(本然)인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락공(三重大匡 僉議中贊 上洛公)에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김방경(金方慶) :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처음에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구름과 노을을 먹었다.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구름 기운이 아직도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아기는 반드시 신선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출생한 뒤에는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시가(市街)의 큰 길에 누어서 울었는데 소와 말이 피해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었다. 고종조(高宗朝)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는데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日本)을 정벌하여 다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을 근검(勤儉)하게 다루었다. 늙어서도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며 추위나 더위에도 병드는 일이 없었다. 비록 치사(致仕)하고 한가하게 살 때일지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자기집 일과같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諮問)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제3권 p435<안동대도호부 제영>
--산수무비구안청(山水無非舊眼靑) 고려 김방경(金方慶)의 시에, “산과 물은 어느 것이아 예대로 있어 반가워라. 누대(樓臺) 또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슬프다, 고국의 끼친 풍속으로서 남아있는, 거문고와 노래소리를 수습(收拾)하여 나의 길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 제3권 p578<밀양도호부 고적>
--수산제(守山堤) : 수산현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이 둑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 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마름·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문(水門)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 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 둔전이 되었다.
▣ 제4권 p64<상주목 불우(佛宇)>
--승장사(勝長寺) : 장천(長川) 부곡(部曲)에 있다.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重創記)에 말하기를, “고려 충렬왕이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倭寇)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金海府)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천태종(天台宗)에 붙이었다. 하였다.
▣ 제4권 p328<김해도호부 사묘(祠墓)>
--송악당(松岳堂) : 금강사(金剛祠) 서북쪽 2백 보쯤 되는 작은 언덕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송악당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려 원종(元宗)이 원 나라의 명을 받들고 장군 김만경(金萬慶 ☞ 원문으로 볼 때 김방경(金方慶)의 오기임)을 보내어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금강사에 머물렀다. 그때에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한다.
--금강사(金剛社) : 부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제4권 p325)
▣ 제4권 p341<창원도호부 산천(山川)>
--합포(合浦) :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려 원종 15년 봄 정월에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현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에게 조서하여, 김방경(金方慶) 등과 함께 합포에서 전함 건조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방경 등이 원나라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 등과 함께, 몽고 장병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 뱃사공·수군인도수(水軍引導手) 6천 7백, 전함 9백여 채로써 일본을 정벌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갔으나 왜병에게 패(敗)하고, 복형은 난데 없는 화살에 맞아 죽어서, 드디어 합포로 환군(還軍)하였다. 7년만에 황제가 또 흔도(忻都)·다구에게 방경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토록 명하였고, 임금이 친히 합포에 와서 열병(閱兵)하였다. 황제가 또 범문호(范文虎)에게 만병(蠻兵) 10만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 제4권 p524<나무목 사묘(祠墓)>
--금성산사(錦城山祠) :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었다. 사당이 다섯이 있으니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下室祠)의 남쪽에 있으며, 미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 ○ 고려 충렬왕 4년에 이 사당의 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의 정벌에 나의 공이 있었는데, 장병들은 모두 상을 타고 나만 빠졌으니 어째서인가.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여야 한다." 하였다. 고을 사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흥(鄭興)이 왕에게 귀띔을 하여 작위(爵位)를 주게 하고, 또 그 고을의 녹미(祿米)를 모두 받지 않고 해마다 5석을 이 사당에 바쳐 춘추로 향과 축문과 폐백(幣帛)을 내려 제사지냈다. 본조(本朝)에 와서도 향과 축문을 내린다. 속설에, "사당의 신은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므로, 매년 춘추에 이 고을 사람뿐 아니라 온 전라도 사람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연락부절하였다. 남녀가 혼잡하게 온 산에 가득하여 노천에서 자므로 남녀가 서로 간통하여 부녀를 잃는 자가 많았다." 한다. 매일밤 기생 4명이 사당 안에 윤번으로 숙직했는데, 성종 10년에 예조에 명해서 금하게 했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옛 사당이 빈 산 속에 있는데, 봄바람에 초목 향기 아름답도다. 안개 구름은 웅장한 기운을 보태고, 우레와 비는 위엄을 돕는다. 장구와 북은 한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하고, 돼지 다리는 지은 농사 풍년들기를 비는도다. 늙은이들은 취해서 부축임을 받아 돌아가는데, 막걸리는 제상에 흥건하도다." 하였다.
▣ 제5권 p67<진도군 고적(古蹟)>
--용장성(龍藏城) : 지금의 치소 동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만 8천 7백 41자, 높이가 5자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모반하여 강화부(江華府)로부터 들어와 이 섬에 자리잡고 궁전(宮殿)을 크게 지었으나 김방경(金方慶)이 그것을 쳐서 평정하였는데, 이것이 그 옛터이다. 고진도성(古珍島城) : 지금의 치소 동북쪽 1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8백 74자, 높이가 8자이고, 안에 샘이 셋이 있다. 지금은 반쯤 허물어졌는데 정통(正統) 정사년에 해남현으로부터 본도 외이리(外耳里)로 돌아왔고, 경신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기었다. 지금까지 외이(外耳)라고 부르던 것이 새 성이다.
▣ 제5권 p94<제주목 건치연혁>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4년에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 제5권 p100<제주목 산천(山川)>
--추자도(楸子島) : 주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가 30리이고 수참(水站)의 옛 터가 있다. 모든 제주에 가는 자가 나주(羅州)에서 떠나면 무안(務安)ㆍ대굴포(大崛浦)ㆍ영암(靈巖)ㆍ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ㆍ해남(海南)ㆍ오란량(於蘭梁)을 거쳐 이 섬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로 좇아 거요량(巨要梁)ㆍ삼내도(三內島)를 거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로 좇아 고자황이 노슬도(高子黃伊露瑟島)ㆍ삼내도를 거치는데, 모두 삼 주야라야 이 섬에 이른다. 여기를 경유하여 사서도(斜鼠島)와 대화탈도(大火脫島)ㆍ소화탈도(小火脫島)를 지나 애월포(涯月浦)와 조천관(朝天館)에 이른다. ○ 고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탐라에 들어와서 내외성을 쌓고 험함을 믿고 더욱 창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흔도(忻都)와 더불어 추자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밤중에 바람이 급하여 지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더니, 새벽에 보니 이미 탐라에 가까워졌는데 바람과 큰 파도가 세차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이 한 번 싸움에 달렸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니, 조금 뒤에 풍랑이 그쳐 마침내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탐라 사람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 제5권 p114<제주목 고적(古蹟)>
--고토성(古土城) : 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고성(古城) : 주 성 서북쪽에 고성의 남은 터가 있다. 고장성(古長城) : 바닷가에 따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백여 리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高汝林)의 무리를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비하고, 인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성 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여 물리칠 때,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종(尹邦賨)을 시켜 원 나라 군사 4백 명과 관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 제5권 p121<제주목 성지>
--고성(古城) : 제주성 서북쪽에 있으며 옛 터가 남아 있다.
--고토성(古土城) : 서남쪽으로 36리에 있으며 둘레는 15리이고 삼별초가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 서쪽으로 20리에 있으며 가운데 커다란 샘물이 있다. 삼별초가 이 성을 근거지로 삼고 항거하니, 김방경(金方慶)이 공격하여 정벌하였는데, 원(元) 나라 병사 4백 명과 더불어 진에서 1천여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고장성(古長城) : 바다에 연하여 둥그렇게 쌓였으며 길이는 모두 3백여 리이다. 삼별초의 반란군이 근거지로 삼았으며 왕이 파견한 시랑 고여림(高汝霖) 등이 진도에서 이곳으로 와서 탐라의 반란군 1천여 명에 대비하여 긴 성을 쌓았다.
▣ 제6권 p37<춘천도호부 인물 고려>
--박항(朴恒) : 처음 이름은 동보(東甫)이다.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였다. 고종(高宗) 때 몽고군이 고을을 함락시키자, 박항은 전란에 죽은 부모의 시체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얼굴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매장하니 그 수가 무려 3백여 인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함ㆍ군량ㆍ무기ㆍ기계 등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나라는 몹시 피폐하여 있었는데, 원 나라 장수 흔도(忻都) 등이 감독하는 것을 매우 급하게 하여 우리의 힘이 견딜 수가 없었다. 박항이 임금께 고하여 원 나라 황제에게 아뢰어서 김방경(金方慶)으로써 원수(元帥)를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권한이 외국 사람의 손에 돌아가지 않게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그의 처사가 능숙하다고 칭찬하였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제6권 p64<횡성군 인물 고려>
--조변(趙抃) : 계순의 아들이다. 김방경(金方慶)을 좇아 일본을 정벌하여 공(功)이 있었다. 얼굴과 몸가짐이 크고 의젓하고 세련되었으며 자못 전고(典故)에 능통하였다.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 제6권 p453-p454 정주목 산천(山川)>
--위도(葦島) : 주의 동쪽 50리에 있다. ○고려 고종 때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니, 위도로 들어가 은신하는데 그 곳이 10여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한데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믿고 활발하였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방경은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고종 14년에 섬에 누렁 뱀이 있는데 크기가 주혈(柱穴)만 한데, 가산(椵山)에 초동(樵童)이 있어 지나면 부르는 소리가 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어 가 보면 뱀이었다. 그런데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섬 사람들이 멀지 않아 난을 일으킬 것이니, 돌아가 감창(監倉)에게 알려 절대로 근신하게 하라.” 하였다. 감창사는 이상하였지만 비밀로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 제6권 p474 가산군 인물 고려>
--한희유(韓希愈) : 이 고을 아전이며, 본관은 평주(平州)다. 말타고 활쏘기에 능하고 담략(膽略)이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을 따라서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日本)을 토벌해서 모두 공이 있었다. 뒤에 원나라 설도우(薛闍于)와 함께 연기(燕岐)에서 합단(哈丹)을 깨치니 원나라 황제가 포상하여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을 제수하고 삼주 호부 궁시 옥대(三珠 虎符 弓矢 玉帶) 등을 하사했다.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고 시호는 장렬(壯烈)이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본 홈 <시조란>에 올리겠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부회 - (11) 성석리(城石里)
▣ 김부회 - 11) 성석리(城石里)
▣ 김주회 - 귀하고 굉장한 내용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정중 -
▣ 김부회 - 윤만 종친님 김자점의 역사적 사건을 연구에 도움이되는 자료인 것으로 보입니다 진밭[니전촌(泥田村)] 니전(泥田)이란 한자명(漢字名)을 풀이하면 진흙밭이므로 진밭이
▣ 김부회 - 다음(duam)에서 김자점을 검색하면 성석리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에 김자점님의 자손들이 김해김씨로 고쳐서 살아가고 있는 세거지라고 합니다. 연구에 도움이 될까해서 알려드립니다.
▣ 김부회 -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자점 할아버지는 역사적 평가를 떠나서 자기를 죽이고 안동김 가문을 생각한 존경할 할아버지 입니다. 이들과의 재결합도 검토해야할 사항입니다.
▣ 김윤만 - 김포굴포
▣ 김윤만 - 원통이
▣ 제2권 p408<마전군 사묘(祠廟)>
--숭의전(崇義殿) : 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禮曹)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太祖)·혜종(惠宗)·성종(成宗)·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충렬왕(忠烈王) 및 공민왕(恭愍王)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祭田)을 주었다. 세종(世宗) 7년이 되어 유사(有司)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宗廟)에도 다만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前朝)의 사당은 팔위(八位)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 하므로,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二仲朔)으로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後孫)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유금필(庾금弼)·배현경(裵玄慶)·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김취려(金就礪)·조충(趙冲)·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했다.
▣ 제2권 p410<마전군 배향>
--김방경(金方慶) : 자는 본연(本然)인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락공(三重大匡 僉議中贊 上洛公)에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김방경(金方慶) :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처음에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구름과 노을을 먹었다.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구름 기운이 아직도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아기는 반드시 신선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출생한 뒤에는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시가(市街)의 큰 길에 누어서 울었는데 소와 말이 피해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었다. 고종조(高宗朝)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는데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日本)을 정벌하여 다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을 근검(勤儉)하게 다루었다. 늙어서도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며 추위나 더위에도 병드는 일이 없었다. 비록 치사(致仕)하고 한가하게 살 때일지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자기집 일과같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諮問)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제3권 p435<안동대도호부 제영>
--산수무비구안청(山水無非舊眼靑) 고려 김방경(金方慶)의 시에, “산과 물은 어느 것이아 예대로 있어 반가워라. 누대(樓臺) 또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슬프다, 고국의 끼친 풍속으로서 남아있는, 거문고와 노래소리를 수습(收拾)하여 나의 길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 제3권 p578<밀양도호부 고적>
--수산제(守山堤) : 수산현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이 둑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 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마름·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문(水門)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 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 둔전이 되었다.
▣ 제4권 p64<상주목 불우(佛宇)>
--승장사(勝長寺) : 장천(長川) 부곡(部曲)에 있다.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重創記)에 말하기를, “고려 충렬왕이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倭寇)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金海府)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천태종(天台宗)에 붙이었다. 하였다.
▣ 제4권 p328<김해도호부 사묘(祠墓)>
--송악당(松岳堂) : 금강사(金剛祠) 서북쪽 2백 보쯤 되는 작은 언덕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송악당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려 원종(元宗)이 원 나라의 명을 받들고 장군 김만경(金萬慶 ☞ 원문으로 볼 때 김방경(金方慶)의 오기임)을 보내어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금강사에 머물렀다. 그때에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한다.
--금강사(金剛社) : 부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제4권 p325)
▣ 제4권 p341<창원도호부 산천(山川)>
--합포(合浦) :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려 원종 15년 봄 정월에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현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에게 조서하여, 김방경(金方慶) 등과 함께 합포에서 전함 건조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방경 등이 원나라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 등과 함께, 몽고 장병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 뱃사공·수군인도수(水軍引導手) 6천 7백, 전함 9백여 채로써 일본을 정벌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갔으나 왜병에게 패(敗)하고, 복형은 난데 없는 화살에 맞아 죽어서, 드디어 합포로 환군(還軍)하였다. 7년만에 황제가 또 흔도(忻都)·다구에게 방경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토록 명하였고, 임금이 친히 합포에 와서 열병(閱兵)하였다. 황제가 또 범문호(范文虎)에게 만병(蠻兵) 10만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 제4권 p524<나무목 사묘(祠墓)>
--금성산사(錦城山祠) :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었다. 사당이 다섯이 있으니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下室祠)의 남쪽에 있으며, 미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 ○ 고려 충렬왕 4년에 이 사당의 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의 정벌에 나의 공이 있었는데, 장병들은 모두 상을 타고 나만 빠졌으니 어째서인가.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여야 한다." 하였다. 고을 사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흥(鄭興)이 왕에게 귀띔을 하여 작위(爵位)를 주게 하고, 또 그 고을의 녹미(祿米)를 모두 받지 않고 해마다 5석을 이 사당에 바쳐 춘추로 향과 축문과 폐백(幣帛)을 내려 제사지냈다. 본조(本朝)에 와서도 향과 축문을 내린다. 속설에, "사당의 신은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므로, 매년 춘추에 이 고을 사람뿐 아니라 온 전라도 사람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연락부절하였다. 남녀가 혼잡하게 온 산에 가득하여 노천에서 자므로 남녀가 서로 간통하여 부녀를 잃는 자가 많았다." 한다. 매일밤 기생 4명이 사당 안에 윤번으로 숙직했는데, 성종 10년에 예조에 명해서 금하게 했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옛 사당이 빈 산 속에 있는데, 봄바람에 초목 향기 아름답도다. 안개 구름은 웅장한 기운을 보태고, 우레와 비는 위엄을 돕는다. 장구와 북은 한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하고, 돼지 다리는 지은 농사 풍년들기를 비는도다. 늙은이들은 취해서 부축임을 받아 돌아가는데, 막걸리는 제상에 흥건하도다." 하였다.
▣ 제5권 p67<진도군 고적(古蹟)>
--용장성(龍藏城) : 지금의 치소 동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만 8천 7백 41자, 높이가 5자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모반하여 강화부(江華府)로부터 들어와 이 섬에 자리잡고 궁전(宮殿)을 크게 지었으나 김방경(金方慶)이 그것을 쳐서 평정하였는데, 이것이 그 옛터이다. 고진도성(古珍島城) : 지금의 치소 동북쪽 1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8백 74자, 높이가 8자이고, 안에 샘이 셋이 있다. 지금은 반쯤 허물어졌는데 정통(正統) 정사년에 해남현으로부터 본도 외이리(外耳里)로 돌아왔고, 경신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기었다. 지금까지 외이(外耳)라고 부르던 것이 새 성이다.
▣ 제5권 p94<제주목 건치연혁>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4년에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 제5권 p100<제주목 산천(山川)>
--추자도(楸子島) : 주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가 30리이고 수참(水站)의 옛 터가 있다. 모든 제주에 가는 자가 나주(羅州)에서 떠나면 무안(務安)ㆍ대굴포(大崛浦)ㆍ영암(靈巖)ㆍ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ㆍ해남(海南)ㆍ오란량(於蘭梁)을 거쳐 이 섬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로 좇아 거요량(巨要梁)ㆍ삼내도(三內島)를 거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로 좇아 고자황이 노슬도(高子黃伊露瑟島)ㆍ삼내도를 거치는데, 모두 삼 주야라야 이 섬에 이른다. 여기를 경유하여 사서도(斜鼠島)와 대화탈도(大火脫島)ㆍ소화탈도(小火脫島)를 지나 애월포(涯月浦)와 조천관(朝天館)에 이른다. ○ 고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탐라에 들어와서 내외성을 쌓고 험함을 믿고 더욱 창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흔도(忻都)와 더불어 추자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밤중에 바람이 급하여 지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더니, 새벽에 보니 이미 탐라에 가까워졌는데 바람과 큰 파도가 세차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이 한 번 싸움에 달렸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니, 조금 뒤에 풍랑이 그쳐 마침내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탐라 사람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 제5권 p114<제주목 고적(古蹟)>
--고토성(古土城) : 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고성(古城) : 주 성 서북쪽에 고성의 남은 터가 있다. 고장성(古長城) : 바닷가에 따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백여 리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高汝林)의 무리를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비하고, 인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성 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여 물리칠 때,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종(尹邦賨)을 시켜 원 나라 군사 4백 명과 관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 제5권 p121<제주목 성지>
--고성(古城) : 제주성 서북쪽에 있으며 옛 터가 남아 있다.
--고토성(古土城) : 서남쪽으로 36리에 있으며 둘레는 15리이고 삼별초가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 서쪽으로 20리에 있으며 가운데 커다란 샘물이 있다. 삼별초가 이 성을 근거지로 삼고 항거하니, 김방경(金方慶)이 공격하여 정벌하였는데, 원(元) 나라 병사 4백 명과 더불어 진에서 1천여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고장성(古長城) : 바다에 연하여 둥그렇게 쌓였으며 길이는 모두 3백여 리이다. 삼별초의 반란군이 근거지로 삼았으며 왕이 파견한 시랑 고여림(高汝霖) 등이 진도에서 이곳으로 와서 탐라의 반란군 1천여 명에 대비하여 긴 성을 쌓았다.
▣ 제6권 p37<춘천도호부 인물 고려>
--박항(朴恒) : 처음 이름은 동보(東甫)이다.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였다. 고종(高宗) 때 몽고군이 고을을 함락시키자, 박항은 전란에 죽은 부모의 시체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얼굴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매장하니 그 수가 무려 3백여 인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함ㆍ군량ㆍ무기ㆍ기계 등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나라는 몹시 피폐하여 있었는데, 원 나라 장수 흔도(忻都) 등이 감독하는 것을 매우 급하게 하여 우리의 힘이 견딜 수가 없었다. 박항이 임금께 고하여 원 나라 황제에게 아뢰어서 김방경(金方慶)으로써 원수(元帥)를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권한이 외국 사람의 손에 돌아가지 않게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그의 처사가 능숙하다고 칭찬하였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제6권 p64<횡성군 인물 고려>
--조변(趙抃) : 계순의 아들이다. 김방경(金方慶)을 좇아 일본을 정벌하여 공(功)이 있었다. 얼굴과 몸가짐이 크고 의젓하고 세련되었으며 자못 전고(典故)에 능통하였다.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 제6권 p453-p454 정주목 산천(山川)>
--위도(葦島) : 주의 동쪽 50리에 있다. ○고려 고종 때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니, 위도로 들어가 은신하는데 그 곳이 10여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한데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믿고 활발하였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방경은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고종 14년에 섬에 누렁 뱀이 있는데 크기가 주혈(柱穴)만 한데, 가산(椵山)에 초동(樵童)이 있어 지나면 부르는 소리가 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어 가 보면 뱀이었다. 그런데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섬 사람들이 멀지 않아 난을 일으킬 것이니, 돌아가 감창(監倉)에게 알려 절대로 근신하게 하라.” 하였다. 감창사는 이상하였지만 비밀로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 제6권 p474 가산군 인물 고려>
--한희유(韓希愈) : 이 고을 아전이며, 본관은 평주(平州)다. 말타고 활쏘기에 능하고 담략(膽略)이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을 따라서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日本)을 토벌해서 모두 공이 있었다. 뒤에 원나라 설도우(薛闍于)와 함께 연기(燕岐)에서 합단(哈丹)을 깨치니 원나라 황제가 포상하여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을 제수하고 삼주 호부 궁시 옥대(三珠 虎符 弓矢 玉帶) 등을 하사했다.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고 시호는 장렬(壯烈)이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본 홈 <시조란>에 올리겠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부회 - (11) 성석리(城石里)
▣ 김부회 - 11) 성석리(城石里)
▣ 김주회 - 귀하고 굉장한 내용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정중 -
▣ 김부회 - 윤만 종친님 김자점의 역사적 사건을 연구에 도움이되는 자료인 것으로 보입니다 진밭[니전촌(泥田村)] 니전(泥田)이란 한자명(漢字名)을 풀이하면 진흙밭이므로 진밭이
▣ 김부회 - 다음(duam)에서 김자점을 검색하면 성석리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에 김자점님의 자손들이 김해김씨로 고쳐서 살아가고 있는 세거지라고 합니다. 연구에 도움이 될까해서 알려드립니다.
▣ 김부회 -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자점 할아버지는 역사적 평가를 떠나서 자기를 죽이고 안동김 가문을 생각한 존경할 할아버지 입니다. 이들과의 재결합도 검토해야할 사항입니다.
▣ 김윤만 - 김포굴포
▣ 김윤만 - 원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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