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과미술관 서찰 자료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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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4-15 01:22 조회1,467회 댓글0건본문
옥과 미술관 내 소장 작품 및 자료를 주회 종친께서 올려 주신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사라져 버려 제가 다시 올려 드립니다. 강진 시제 참배행 여러분의 자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옥과 미술관 서찰 자료 종합>(안동김씨 선조님)
1. 김종덕(金宗德)-도평의공파
1) 298 金宗德 - 친지에게 보낸 안부서한 - 1784년 - 391 - (?∼1785)
2) 299 金宗德 - 친지에게 보낸 작명관계의 서한 - 甲辰12월 - 1784년 - 392 - (?∼1785)
김종덕(金宗德) 1724(경종 4)∼1797(정조 21)
점곡면 사촌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종덕의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송은 김광수의 10세손이다.아버지는 안동인 남응이고 어머니는 순천 김씨다.
그는 남보다 재주가 뛰어나 언어 행동을 항상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학문을 익힘에도 소홀함이 없었고 뜻세움이 또한 원대했다.
효우의 행실도 남달라 6, 7세때 가마귀 소리가 들리면 악기가 서린단 남의 말을 듣고는 매양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모한테 해가 돌아갈까 실색하고 두려워했다 한다.
한 번은 여러 동생과 공부하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감염되었지만 억지로 먼저 일어나 몸져 누운 동생들이 완쾌되도록 백방으로 힘썼고, 부모 마음을 항상 편히 하고 그 거처하는 방의 문을 바르거나 구들고치는 것을 다른 이한테 시키지 않고 자기가 늙을 때까지 손수 하였고, 퇴도(退陶)의 학문을 사숙창명한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입재 정종로, 후산 이종수와 세칭 호문 삼종의 한 사람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30세인 1753년(영조 2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사마시에 합격, 통문이 왔을 때 마침 남의 글을 쓰고 있어 그 글을 다 마무리한 뒤에야 뜯어보는 신중성도 보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태지의 유자정(1890년 소실)에서 학문을 강론, 원근 안동, 예안, 예천, 청송 등지에 많은 문사들이 나게 했다.
1997년(정조 21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74, 저서로는 ≪천사집 川沙集 ≫·≪성학입문 聖學入門≫·≪예문일통 禮門一統≫·≪석학정론 釋學正論≫·≪정본고증 政本考證≫·≪초려문답 草廬問答≫·≪예서 禮書≫ 등이 있다.
공의 사후 18년 사림서 불천위로 정하였다
2. 김상윤(金相潤) -제학공파
1) 391 金相潤 - 草原察訪 - 草原察訪에게 보낸 안부서한 - 丁卯12월 - 484
광해군(光海君)2년(161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0(丙科10)
인적사항
생년(生年) : 1577년, 정축 . 자(字):수부(<수0x6740>夫). 본관(本貫) :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가족사항 : 부(父) 김사준(金士俊)
이력 및 기타 : 소과(小科) 1609(기유) 생원시 .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 생원(生員) . 품계(品階)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사정&(寺正&)
3. 김회빈(金晦彬) --군사공파
1) 435 金晦彬 - 姜生員 - 친지 姜生員에게 보낸 안부서한 - 丙午2월 - 528 - 14권
영조(英祖)51년(1775년), 별시(別試) 병과16(丙科16).
인적사항 :생년(生年) 1737년, 정사 . 본관(本貫) :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죽산(竹山)
가족사항 : 부(父)-김광익(金光翊) 조부(祖父)-김담(金湛). 증조부(曾祖父)-김수기(金壽基)
외조부(外祖父)-박필수(朴弼脩), 처부(妻父)-어용우(魚用雨)
4. 김희수(金希壽)-서운관정공파
1) 447 金希壽 - 某種의 풍경을 읊은 五言詩句 - 540 - (1475~1527)
김희수(金希壽) 1475(성종6)∼1527(중종22).
조선의 문신. 자는 몽정(夢精), 호는 유연재(悠然齋),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 1507 년(중종2)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이 되고,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1523년 도승지(都丞旨)에 승진, 1527년 경상도 관찰사로서 과로로 죽었다. 해서(楷書)를 잘 썼다.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 享) 되었다. <이가서법>이 전한다.
<묘소>(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81번지 광곡산. 2002. 12. 22. 항용(제) 제공)
5. 김 흠(金欽)--익원공파
1) 448 김흠(金欽) - 회갑을 맞은 종친에게 축시를 보낸다는 서한 - 541
김 흠(金 欽) 1537(중종32)∼1592(선조25)
(2002. 윤만씨(문) 조사. 자료 제공. 출전 : 壬亂功臣遺史誌(임란공신유사지) pp175/1994년/임란공신숭모회출판부)
자(字)는 거경(居敬), 조선조 개국공신인 김사형의 7대손이고 충의위전도부위 김승석의 장남이다. 김흠은 1583년(선조 16)에 직장(直長)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하여 노산현감으로 출사하였으며, 통훈대부 품계로 청주목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군자감정감군으로 신입장군과 충주 달래강에서 배수진을 치고 군사를 지휘하여 사력을 다하여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리하여 아군 장졸들이 모두 탄금대하에서 원통하게 전사할 때 같이 순절하였다. 7년간이나 전란이 계속되어 시체를 거두지 못하여 황해도 금천(金川)에 있는 선고묘하에 초혼장을 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 이등에 녹훈하고 증가선대부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렸다
충남 논산군 상월면 산성리는 안동김씨 충민공의 자손들이 세거지라 이곳에다 김흠의 단소를 설단하고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그 곁에 충민재를 건립하여 해마다 향사를 모시고 있다.
※ 참고자료 : 선무원종공신녹권. 화보 pp13--김흠공 표충비. 김흠공재소 충민재 사진이 있음.
6. 김복원(金復元)--안렴사공파
1) 467 金復元 - 仁同현감으로 재임 중 饌需를 선물한 친지에게 보낸 감사의 답서 - 18C후기 - 560
▣ 김복원 (1729-1808)
<오창지>
공은 직제학 공예의 7세손이다. 을유년 문과에 올라 이조의 정랑과 좌랑, 사헌부와 사간원, 병조참의를 지내고 벼슬이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러 삼대를 추증하였다.
<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14. 金復元신도비
돈녕부동지사 忍窩(인와) 金復元(1729-1808)의 신도비는 1978년 청원군 오창면 괴정리 입동에 있는 그의 묘소 아래 세웠으며 비문은 고종20년 (1883)에 이조참판 閔丙承이 짓고 글씨는 1978년에 서봉 金思達이 썼다.
7. 김사형(金士亨)--도평의공파
1) 476 金士享 - 新築江舍의 도벽을 위해 친지에게 해당 油紙를 부탁한 서한 - 1월 - 569
<의성군지 1987>
▣ 金士亨 1541-
자 士兼(사겸) 호 獨秀軒(독수헌) 송은 광수의 증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에 올랐다.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란때 아우 士貞과 더불어 火旺山에 들어가 곽망우당(=곽재우)과 같이 창의했다.
<의성군지 1987>
▣ 金士貞 1552-1620
자 正叔 호 後松齋, 송은 광수의 증손이며 만취당 士元의 아우이다. 젊어서 재예와 총명이 과인했으며, 가훈에 따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퇴계를 사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때에는 중형 士亨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왜적에게 항전하여 크게 전과를 올린 바 있다.
창녕 火旺山城에서 섶을 깔아 맹서하되
"피로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몸은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 하였다.
증직으로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고 文集과 溪門禮設이 전하여 道潭祠에 제항되었다.
그 후손에 이름있는 선비와 대소 과한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손자 옥계 尙瑜는 장사랑을 지내고 문행이 있었으며 文集이 전한다. 현손인 북오 履中은 무과에 올라
---<후략>---
관람시간 3월~10월 : 09:00~18:00 11월 ~2월 : 09:00~17: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
교통편
버스: 광주-옥과 (매 15분 간격 운행, 25분 소요)
옥과면 소재지에서 미술관까지 도보로 30분(3.5km)
승용차로 5분
미술관 개요
전라남도 옥과미술관은 아산 조방원화백(雅山 趙邦元 畵伯)이 평생동안 수집한 간찰(簡札-오늘날 편지) 5,770점, 서화(書畵), 서첩류(書帖類), 99점, 성리대전 목판각(性理大全 木版刻) 939점과 부지 4,263평을 1988년 전라남도 에 기증함으로써 설립되었다. 또한 그 외 소장품으로 백제·통일신라 시대 암·수막새 6점, 고문서 2점, 전라남도 중진작가 작품, 역대 전라남도 도전 대상 수상 작품 80여 점, 탁본 43점과 함께 1996년 9월 13일 개관되었다.
516-910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1-3번지 ☏ 061-363-7278~9, Fax: 061-363-7279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옥과미술관! 꼭 들려보고 싶습니다.
▣ 김영윤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천사 김종덕 선조님 기사내용중 몰년1997 수정 바랍니다
▣ 김윤만 - 귀한 선조님들의 서찰이 있는 옥과미술관 꼭 들려보고 싶은 곳 입니다.
▣ 솔내영환 - 이번 강진 시제참여시 확인 촬영 예정입니다.
▣ 김발용 - 프린팅 완료
▣ 김윤식 -
<옥과 미술관 서찰 자료 종합>(안동김씨 선조님)
1. 김종덕(金宗德)-도평의공파
1) 298 金宗德 - 친지에게 보낸 안부서한 - 1784년 - 391 - (?∼1785)
2) 299 金宗德 - 친지에게 보낸 작명관계의 서한 - 甲辰12월 - 1784년 - 392 - (?∼1785)
김종덕(金宗德) 1724(경종 4)∼1797(정조 21)
점곡면 사촌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종덕의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송은 김광수의 10세손이다.아버지는 안동인 남응이고 어머니는 순천 김씨다.
그는 남보다 재주가 뛰어나 언어 행동을 항상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학문을 익힘에도 소홀함이 없었고 뜻세움이 또한 원대했다.
효우의 행실도 남달라 6, 7세때 가마귀 소리가 들리면 악기가 서린단 남의 말을 듣고는 매양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모한테 해가 돌아갈까 실색하고 두려워했다 한다.
한 번은 여러 동생과 공부하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감염되었지만 억지로 먼저 일어나 몸져 누운 동생들이 완쾌되도록 백방으로 힘썼고, 부모 마음을 항상 편히 하고 그 거처하는 방의 문을 바르거나 구들고치는 것을 다른 이한테 시키지 않고 자기가 늙을 때까지 손수 하였고, 퇴도(退陶)의 학문을 사숙창명한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입재 정종로, 후산 이종수와 세칭 호문 삼종의 한 사람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30세인 1753년(영조 2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사마시에 합격, 통문이 왔을 때 마침 남의 글을 쓰고 있어 그 글을 다 마무리한 뒤에야 뜯어보는 신중성도 보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태지의 유자정(1890년 소실)에서 학문을 강론, 원근 안동, 예안, 예천, 청송 등지에 많은 문사들이 나게 했다.
1997년(정조 21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74, 저서로는 ≪천사집 川沙集 ≫·≪성학입문 聖學入門≫·≪예문일통 禮門一統≫·≪석학정론 釋學正論≫·≪정본고증 政本考證≫·≪초려문답 草廬問答≫·≪예서 禮書≫ 등이 있다.
공의 사후 18년 사림서 불천위로 정하였다
2. 김상윤(金相潤) -제학공파
1) 391 金相潤 - 草原察訪 - 草原察訪에게 보낸 안부서한 - 丁卯12월 - 484
광해군(光海君)2년(161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0(丙科10)
인적사항
생년(生年) : 1577년, 정축 . 자(字):수부(<수0x6740>夫). 본관(本貫) :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가족사항 : 부(父) 김사준(金士俊)
이력 및 기타 : 소과(小科) 1609(기유) 생원시 .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 생원(生員) . 품계(品階)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사정&(寺正&)
3. 김회빈(金晦彬) --군사공파
1) 435 金晦彬 - 姜生員 - 친지 姜生員에게 보낸 안부서한 - 丙午2월 - 528 - 14권
영조(英祖)51년(1775년), 별시(別試) 병과16(丙科16).
인적사항 :생년(生年) 1737년, 정사 . 본관(本貫) :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죽산(竹山)
가족사항 : 부(父)-김광익(金光翊) 조부(祖父)-김담(金湛). 증조부(曾祖父)-김수기(金壽基)
외조부(外祖父)-박필수(朴弼脩), 처부(妻父)-어용우(魚用雨)
4. 김희수(金希壽)-서운관정공파
1) 447 金希壽 - 某種의 풍경을 읊은 五言詩句 - 540 - (1475~1527)
김희수(金希壽) 1475(성종6)∼1527(중종22).
조선의 문신. 자는 몽정(夢精), 호는 유연재(悠然齋),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 1507 년(중종2)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이 되고,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1523년 도승지(都丞旨)에 승진, 1527년 경상도 관찰사로서 과로로 죽었다. 해서(楷書)를 잘 썼다.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 享) 되었다. <이가서법>이 전한다.
<묘소>(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81번지 광곡산. 2002. 12. 22. 항용(제) 제공)
5. 김 흠(金欽)--익원공파
1) 448 김흠(金欽) - 회갑을 맞은 종친에게 축시를 보낸다는 서한 - 541
김 흠(金 欽) 1537(중종32)∼1592(선조25)
(2002. 윤만씨(문) 조사. 자료 제공. 출전 : 壬亂功臣遺史誌(임란공신유사지) pp175/1994년/임란공신숭모회출판부)
자(字)는 거경(居敬), 조선조 개국공신인 김사형의 7대손이고 충의위전도부위 김승석의 장남이다. 김흠은 1583년(선조 16)에 직장(直長)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하여 노산현감으로 출사하였으며, 통훈대부 품계로 청주목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군자감정감군으로 신입장군과 충주 달래강에서 배수진을 치고 군사를 지휘하여 사력을 다하여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리하여 아군 장졸들이 모두 탄금대하에서 원통하게 전사할 때 같이 순절하였다. 7년간이나 전란이 계속되어 시체를 거두지 못하여 황해도 금천(金川)에 있는 선고묘하에 초혼장을 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 이등에 녹훈하고 증가선대부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렸다
충남 논산군 상월면 산성리는 안동김씨 충민공의 자손들이 세거지라 이곳에다 김흠의 단소를 설단하고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그 곁에 충민재를 건립하여 해마다 향사를 모시고 있다.
※ 참고자료 : 선무원종공신녹권. 화보 pp13--김흠공 표충비. 김흠공재소 충민재 사진이 있음.
6. 김복원(金復元)--안렴사공파
1) 467 金復元 - 仁同현감으로 재임 중 饌需를 선물한 친지에게 보낸 감사의 답서 - 18C후기 - 560
▣ 김복원 (1729-1808)
<오창지>
공은 직제학 공예의 7세손이다. 을유년 문과에 올라 이조의 정랑과 좌랑, 사헌부와 사간원, 병조참의를 지내고 벼슬이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러 삼대를 추증하였다.
<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14. 金復元신도비
돈녕부동지사 忍窩(인와) 金復元(1729-1808)의 신도비는 1978년 청원군 오창면 괴정리 입동에 있는 그의 묘소 아래 세웠으며 비문은 고종20년 (1883)에 이조참판 閔丙承이 짓고 글씨는 1978년에 서봉 金思達이 썼다.
7. 김사형(金士亨)--도평의공파
1) 476 金士享 - 新築江舍의 도벽을 위해 친지에게 해당 油紙를 부탁한 서한 - 1월 - 569
<의성군지 1987>
▣ 金士亨 1541-
자 士兼(사겸) 호 獨秀軒(독수헌) 송은 광수의 증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에 올랐다.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란때 아우 士貞과 더불어 火旺山에 들어가 곽망우당(=곽재우)과 같이 창의했다.
<의성군지 1987>
▣ 金士貞 1552-1620
자 正叔 호 後松齋, 송은 광수의 증손이며 만취당 士元의 아우이다. 젊어서 재예와 총명이 과인했으며, 가훈에 따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퇴계를 사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때에는 중형 士亨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왜적에게 항전하여 크게 전과를 올린 바 있다.
창녕 火旺山城에서 섶을 깔아 맹서하되
"피로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몸은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 하였다.
증직으로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고 文集과 溪門禮設이 전하여 道潭祠에 제항되었다.
그 후손에 이름있는 선비와 대소 과한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손자 옥계 尙瑜는 장사랑을 지내고 문행이 있었으며 文集이 전한다. 현손인 북오 履中은 무과에 올라
---<후략>---
관람시간 3월~10월 : 09:00~18:00 11월 ~2월 : 09:00~17: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
교통편
버스: 광주-옥과 (매 15분 간격 운행, 25분 소요)
옥과면 소재지에서 미술관까지 도보로 30분(3.5km)
승용차로 5분
미술관 개요
전라남도 옥과미술관은 아산 조방원화백(雅山 趙邦元 畵伯)이 평생동안 수집한 간찰(簡札-오늘날 편지) 5,770점, 서화(書畵), 서첩류(書帖類), 99점, 성리대전 목판각(性理大全 木版刻) 939점과 부지 4,263평을 1988년 전라남도 에 기증함으로써 설립되었다. 또한 그 외 소장품으로 백제·통일신라 시대 암·수막새 6점, 고문서 2점, 전라남도 중진작가 작품, 역대 전라남도 도전 대상 수상 작품 80여 점, 탁본 43점과 함께 1996년 9월 13일 개관되었다.
516-910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1-3번지 ☏ 061-363-7278~9, Fax: 061-363-7279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옥과미술관! 꼭 들려보고 싶습니다.
▣ 김영윤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천사 김종덕 선조님 기사내용중 몰년1997 수정 바랍니다
▣ 김윤만 - 귀한 선조님들의 서찰이 있는 옥과미술관 꼭 들려보고 싶은 곳 입니다.
▣ 솔내영환 - 이번 강진 시제참여시 확인 촬영 예정입니다.
▣ 김발용 - 프린팅 완료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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