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강진- 남도답사 일번지-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3-04-16 00:43 조회1,633회 댓글0건본문
드디어 내일 강진으로 떠납니다.
강진하면 유흥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말 [ 남도답사 일번지-강진]이
생각납니다.
강진에 대해서 강진군청 자료를 인용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대구면 도요지
지정번호 : 사적 제 68호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규 모 : 183기
소 재 지 : 강진군 대구면 일대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강진의 고려청자 요지는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에 산재해있다.
1914년 이곳 고려자기 요지가 널리 알려진 이래 세계에서 도자기에 관심있는 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진 청자 요지의 핵심은 대구면이다. 대구면 중에서도 용문천인데 상류는 용운리로, 동북쪽 산골짜기에 정수사가 있으며, 요지는 정수사 밑 운곡마을로부터 용문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해변에 까지 산재해 있다. 용운리 가마는 몇 개소를 제외하고는 10세기 후반경으로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사이의 초기 요지로 중국의 월주요, 여요와의 관계를 살필수 있는 파편들이 각 요지에서 산견된다.
한편 계치 골짜기를 지나 용문천 하류의 넓은 들을 지나면 사당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고려청자의 절정기를 맞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양질의 청자를 굽던 유일한 관요지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출토 청자에는 국립 박물관 소장의 청자기와가 있어 명성이 높다.
**이 대구면에 우리고 뵙고 싶어하는 재이씨가 살고 계십니다.
정다산 유적지
ㅁ Home > 강진나들이 > 관광나들이 > 정다산유적지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 유물전시관
전 시 관 : 122평
주 차 장 : 600평
개 관 일 : 1999.8.7
관람 시간 : 09:00 ∼18:00 / 동절기(11∼2월) : 09:00 ∼17:00
연중 휴무일 없음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전시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관광 코스
다산유물전시관 → 다산초당 →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유물전시관을 관람하고 오솔길로 걸어가 다산초당 을 관람한 후 다시 되돌아 오는 코스
가족단위의 승용차 이용 관광에 적합하다.
다산유물전시관 → 다산초당 → 백련사
다산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차량은 백련사로 가서 대기하고 관광객은 전시관 및 다산초당을 관람한 후 초당에서 산중턱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는 코스
이 오솔길은 지난날 초당에 거처하시던 다산선생과 백련사에 거처하던 해장선사가 서로 교우를 위해 오가던 길이며, 산길을 가는 동안 강진만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여 경치가 좋다.
대형버스를 이용한 단체관광에 좋은 코스 (약 1시간 소요)
백련사로 먼저 갈 경우에는 코스를 반대로 관광해도 좋음
알아두면 좋은 점!
다산유물전시관이 개관되기 전에는 귤동마을 앞에 주차하고 다산초당을 관람하였으나 유물전시관이 개관된 지금은 유물전시관으로 가서 주차하는 것이 전시관도 관람할 수 있고 또 다산초당을 관람하는 데도 거리가 더 가까워 좋다.
특히 단체관광일 경우 유물전시관 안내소에 요청하여 다산초당에 대한 설명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유물전시관을 먼저 관람하여 다산선생에 대해 이해를 더한 후 다산초당 을 관람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영랑생가
ㅁ Home > 강진나들이 > 관광나들이 > 영랑생가
영랑생가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89호
지정일 : 1986년 2월 7일
규 모 : 생가일원(4,422㎡)
건립년도 : 1906년
소재지: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7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백련사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
지 정 일 : 1986년 2월 7일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시 대 : 조선후기
소 재 지 :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장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무위사
무위사 극락보전
지정번호 : 국보 제13호
지 정 일 : 1962년 12월 20일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시 대 : 조선시대
소 재 지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서기 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 만은 최근(1956년경)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보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서기 1476년)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 무위사의 늙은 개 ... 생각나시죠..
▣ 김발용 - 대구면 도요지가 강진의 재이종친님 고향입니다. 대구면 사무소에 근무하시죠.
▣ 김항용 - 아! 가 보고 싶은 곳
▣ 김윤만 - 한여름 다산초당에서 지내보고 싶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네, 그 개가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재이 대부님 내일 뵙겠습니다.
강진하면 유흥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말 [ 남도답사 일번지-강진]이
생각납니다.
강진에 대해서 강진군청 자료를 인용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대구면 도요지
지정번호 : 사적 제 68호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규 모 : 183기
소 재 지 : 강진군 대구면 일대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강진의 고려청자 요지는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에 산재해있다.
1914년 이곳 고려자기 요지가 널리 알려진 이래 세계에서 도자기에 관심있는 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진 청자 요지의 핵심은 대구면이다. 대구면 중에서도 용문천인데 상류는 용운리로, 동북쪽 산골짜기에 정수사가 있으며, 요지는 정수사 밑 운곡마을로부터 용문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해변에 까지 산재해 있다. 용운리 가마는 몇 개소를 제외하고는 10세기 후반경으로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사이의 초기 요지로 중국의 월주요, 여요와의 관계를 살필수 있는 파편들이 각 요지에서 산견된다.
한편 계치 골짜기를 지나 용문천 하류의 넓은 들을 지나면 사당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고려청자의 절정기를 맞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양질의 청자를 굽던 유일한 관요지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출토 청자에는 국립 박물관 소장의 청자기와가 있어 명성이 높다.
**이 대구면에 우리고 뵙고 싶어하는 재이씨가 살고 계십니다.
정다산 유적지
ㅁ Home > 강진나들이 > 관광나들이 > 정다산유적지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 유물전시관
전 시 관 : 122평
주 차 장 : 600평
개 관 일 : 1999.8.7
관람 시간 : 09:00 ∼18:00 / 동절기(11∼2월) : 09:00 ∼17:00
연중 휴무일 없음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전시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관광 코스
다산유물전시관 → 다산초당 →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유물전시관을 관람하고 오솔길로 걸어가 다산초당 을 관람한 후 다시 되돌아 오는 코스
가족단위의 승용차 이용 관광에 적합하다.
다산유물전시관 → 다산초당 → 백련사
다산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차량은 백련사로 가서 대기하고 관광객은 전시관 및 다산초당을 관람한 후 초당에서 산중턱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는 코스
이 오솔길은 지난날 초당에 거처하시던 다산선생과 백련사에 거처하던 해장선사가 서로 교우를 위해 오가던 길이며, 산길을 가는 동안 강진만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여 경치가 좋다.
대형버스를 이용한 단체관광에 좋은 코스 (약 1시간 소요)
백련사로 먼저 갈 경우에는 코스를 반대로 관광해도 좋음
알아두면 좋은 점!
다산유물전시관이 개관되기 전에는 귤동마을 앞에 주차하고 다산초당을 관람하였으나 유물전시관이 개관된 지금은 유물전시관으로 가서 주차하는 것이 전시관도 관람할 수 있고 또 다산초당을 관람하는 데도 거리가 더 가까워 좋다.
특히 단체관광일 경우 유물전시관 안내소에 요청하여 다산초당에 대한 설명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유물전시관을 먼저 관람하여 다산선생에 대해 이해를 더한 후 다산초당 을 관람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영랑생가
ㅁ Home > 강진나들이 > 관광나들이 > 영랑생가
영랑생가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89호
지정일 : 1986년 2월 7일
규 모 : 생가일원(4,422㎡)
건립년도 : 1906년
소재지: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7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백련사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
지 정 일 : 1986년 2월 7일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시 대 : 조선후기
소 재 지 :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장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무위사
무위사 극락보전
지정번호 : 국보 제13호
지 정 일 : 1962년 12월 20일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시 대 : 조선시대
소 재 지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서기 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 만은 최근(1956년경)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보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서기 1476년)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 무위사의 늙은 개 ... 생각나시죠..
▣ 김발용 - 대구면 도요지가 강진의 재이종친님 고향입니다. 대구면 사무소에 근무하시죠.
▣ 김항용 - 아! 가 보고 싶은 곳
▣ 김윤만 - 한여름 다산초당에서 지내보고 싶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네, 그 개가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재이 대부님 내일 뵙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