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역사적 인물.. 다산 정약용. 영랑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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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4-16 00:45 조회1,775회 댓글0건본문
다산 정약용
연 보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아버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씨 와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 4째아들로 태어남.
1783년 22세 되던 봄에 소과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성.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용을 가르침.
(※ 소과시험이란 : 양반자녀만 응시할 수 있는 진사. 생원의 자격시험임(500명 합격) 소과합격자 중 5차례의 시험을 거쳐 성적이 우수한 200명에 한하여 대과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짐)
그러다가 28세가 되던 1789년에 과거시험 문과에 2등 급제함
(※ 과거시험이란- 대과시험으로서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누어져 있었음)
과거시험 합격 후 경기도 암행어사, 병조참의(정3품) 부승지(종4품)를 지내며 배다리 발명, 화성 설계.축조, 거중기 발명 등으로 정조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12년동안 정조를 보좌함.
1800년 정조가 돌아가시고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력쟁탈을 위한 사색(노론,소론,남인,서인) 당파싸움에 휘말려 남인을 제거하기위한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또는“신유박해”)이 일어남.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천주교리를 공부한 이승훈, 청나라 주문모 교리, 이가환, 셋째형인
정약종 등 남인세력이 사형을 당하고, 본인 다산은 경상북도 장기(영일)로, 둘째형 정약전은
완도 신지도(섬)로 유배를 가게됨.
(※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았음)
당시 다산 선생님의 사상(思想)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현재 실학사상)인지라 당시 왜세를 배척하고 불교문화와 유교사상(인간과 자연의 일치론을 주장한 성리학)을 장려하는 세도의 권력에 탄압됨.
(12살의 순조를 왕에 보위하고 딸을 순조와 결혼시킨 후 실권을 잡은 김조순 권력에 의함 -
안동김씨 세도정치라 함.)
동년 11월 황사영(약현의 사위)이란 조카사위가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건들을
적어 중국(청)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써 보내려다 발각이 됨. (황사영 백서사건이라 함.)
이로 인하여 본인 황사영은 사형을 당하고 약용과 약전형님이 공범으로 지목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혐의사실이 없음을 인정받고도,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본인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1801년 당시나이 40세) 18년동안의 유배생활이 시작됨.
읍내 동문안 주막에서 5년을 거주하였고(당시 관의 감시가 심함- 주막 담장을 철거했고, 현감(군수)의 동향보고가 수시로 이루어짐)
(※주막담장을 철거하고 연감(군수)의 동향보고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등 당시 관의 감시가 심하였으나, 1805년 정순대비가 하야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작으로 인하여 감시가 다소 풀려 주거 이동이 가능해짐.)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1년(제자6명, 장남을 가르침), 목리 이청이란 제자집에서 2년, 모두 8년을
읍내에서 지내시고, 1808년 봄에 귤동마을 외족인 윤단씨의 배려로 이곳 초당으로 이거하여 10년동안 생활을 하게 됨.
초당에서 생활하시면서 후학을 가르치시고 제자 18명과 함께 500여권의 책을 저술함(다산이
초안을 작성하면 제자들이 기록을 했다고 함.)
1818년 당년 58세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미완성된 책을 마무리 하면서 여생을 보내시다
1836년 당년 75세로 생을 마침.
가 족
다산 선생님께서는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씨와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 4째아들로 태어남.
정재원씨는 세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부인은 남씨로서 장남 약현과 딸 1명을 낳고 요절하시고, 다산은 둘째부인 해남윤씨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음, 다산이 9살 되던 해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2살 되던 해에 세번째 부인 김씨를 새어머니로 맞이함.
- 실제 김씨가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함.
※총 5남5녀- 의령남씨(1남1녀) 해남윤씨(3남1여) 김해김씨(1남3녀)
어머니 해남윤씨는 당시 초상화의 선구자였던 공제 윤두서 선생님의 증손녀였으며, 고산 윤선도선생의 6대 후손녀임.
셋째형 약종은 신유사옥 때 사형을 당하고
둘째형 손암 약전은 1801년 유배당시 나주까지 함께 온 후 헤어졌는데 단 한차례도 만나지
못한체 해배 2년을 앞둔 1816년에 흑산도에서 돌아가심.
초당에 오시기 전에는 정약용 선생님의 호는 삼미자, 용보, 미용 등 여러가지 호를 사용했는데 이곳에 와서야 다산이란 호를 사용했다고 함.
※ 삼미자란 : 다산선생이 어려서 천연두로 인하여 본인의 왼쪽 눈썹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여 불리어진 호라고 함.
다산이란 호를 사용한 이유 : 현재 초당에 위치한 만덕산은 자연의 차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부르기를 다산이라고 불렀으며, 이름도 모르는 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해서 다산 정씨 또는 정다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이때부터 호를 다산이라고 사용함.
영랑 김윤식
영랑의 발자취
1902년 강진의 오백석지기 부유한 김종호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 보통학교(현 강진 중앙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중퇴
1919년 휘문의숙 재학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하였으며,
1920년 동경 유학시절 박열(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김현구, 차부자, 김길수등과 강진에서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를 발간
1903년 동경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 창간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독립 촉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
1950년 6.25전쟁시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져 9월 29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랑의 작품세계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시문학」 동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영랑의 시는 순수한 탐미주의(耽美主義)적 문학관에 입각하여 섬세하면서도 영롱한
정서를 잘 다듬고 깎아낸 언어와 시형(詩型)에 담은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다. 소월이
북도(北道)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곱살스러운
방언을 그의 시에 담았다. 그의 시 가운데는 4행시가 많다.
이 역시 민요의 형식에 가깝게 표현하려고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섬세한 정서, 언어의
조탁, 미묘한 음악성은 우리 순수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휘문고 시절에는 축구선수를 지낼 정도로 운동을 즐겨했으며, 본가에 정구장을 마련해
놓고 운동을 했던 영랑은 또한 동서양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에 정통하고 북(鼓)
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거문고에도 심취하는 등 이러한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뒷날 그의
시세계의 독특한 언어에 표현되어 나타나기도 했던 것 같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작품 감상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데뷔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시문학」 창간호1930.3 , 「영랑시선」1949)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시문학」 3호 1931)
내 마음을 아실 이(「시문학」 3호 1931)
모란이 피기 까지는(「문학3호」 1935 ,「영랑시집」 1935)
북 (「영랑시집」1935)
두견 (「영랑시집」 1935)
오월(五月 「문장6호」 1937)
독을 차고 (「문장」 10호 1939)
거문고 (「조광」 1939)
춘향 (「문장」 18호 1940,7)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메 단풍 들것네)
가늘한 내음
마당앞 맑은 새암은
아파 누워 혼자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창우 -
▣ 김태환 - 잘읽었습니다!정약용 3형제분이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에위치한 예봉산정상에있는철문봉에서 수학하면서 학문에 열중했다고합니다.....
▣ 경기 광주에서 .. - 아마 해남윤씨 사이에서태어난 3형제분이신가봅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연 보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아버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씨 와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 4째아들로 태어남.
1783년 22세 되던 봄에 소과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성.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용을 가르침.
(※ 소과시험이란 : 양반자녀만 응시할 수 있는 진사. 생원의 자격시험임(500명 합격) 소과합격자 중 5차례의 시험을 거쳐 성적이 우수한 200명에 한하여 대과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짐)
그러다가 28세가 되던 1789년에 과거시험 문과에 2등 급제함
(※ 과거시험이란- 대과시험으로서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누어져 있었음)
과거시험 합격 후 경기도 암행어사, 병조참의(정3품) 부승지(종4품)를 지내며 배다리 발명, 화성 설계.축조, 거중기 발명 등으로 정조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12년동안 정조를 보좌함.
1800년 정조가 돌아가시고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력쟁탈을 위한 사색(노론,소론,남인,서인) 당파싸움에 휘말려 남인을 제거하기위한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또는“신유박해”)이 일어남.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천주교리를 공부한 이승훈, 청나라 주문모 교리, 이가환, 셋째형인
정약종 등 남인세력이 사형을 당하고, 본인 다산은 경상북도 장기(영일)로, 둘째형 정약전은
완도 신지도(섬)로 유배를 가게됨.
(※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았음)
당시 다산 선생님의 사상(思想)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현재 실학사상)인지라 당시 왜세를 배척하고 불교문화와 유교사상(인간과 자연의 일치론을 주장한 성리학)을 장려하는 세도의 권력에 탄압됨.
(12살의 순조를 왕에 보위하고 딸을 순조와 결혼시킨 후 실권을 잡은 김조순 권력에 의함 -
안동김씨 세도정치라 함.)
동년 11월 황사영(약현의 사위)이란 조카사위가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건들을
적어 중국(청)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써 보내려다 발각이 됨. (황사영 백서사건이라 함.)
이로 인하여 본인 황사영은 사형을 당하고 약용과 약전형님이 공범으로 지목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혐의사실이 없음을 인정받고도,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본인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1801년 당시나이 40세) 18년동안의 유배생활이 시작됨.
읍내 동문안 주막에서 5년을 거주하였고(당시 관의 감시가 심함- 주막 담장을 철거했고, 현감(군수)의 동향보고가 수시로 이루어짐)
(※주막담장을 철거하고 연감(군수)의 동향보고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등 당시 관의 감시가 심하였으나, 1805년 정순대비가 하야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작으로 인하여 감시가 다소 풀려 주거 이동이 가능해짐.)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1년(제자6명, 장남을 가르침), 목리 이청이란 제자집에서 2년, 모두 8년을
읍내에서 지내시고, 1808년 봄에 귤동마을 외족인 윤단씨의 배려로 이곳 초당으로 이거하여 10년동안 생활을 하게 됨.
초당에서 생활하시면서 후학을 가르치시고 제자 18명과 함께 500여권의 책을 저술함(다산이
초안을 작성하면 제자들이 기록을 했다고 함.)
1818년 당년 58세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미완성된 책을 마무리 하면서 여생을 보내시다
1836년 당년 75세로 생을 마침.
가 족
다산 선생님께서는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씨와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 4째아들로 태어남.
정재원씨는 세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부인은 남씨로서 장남 약현과 딸 1명을 낳고 요절하시고, 다산은 둘째부인 해남윤씨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음, 다산이 9살 되던 해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2살 되던 해에 세번째 부인 김씨를 새어머니로 맞이함.
- 실제 김씨가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함.
※총 5남5녀- 의령남씨(1남1녀) 해남윤씨(3남1여) 김해김씨(1남3녀)
어머니 해남윤씨는 당시 초상화의 선구자였던 공제 윤두서 선생님의 증손녀였으며, 고산 윤선도선생의 6대 후손녀임.
셋째형 약종은 신유사옥 때 사형을 당하고
둘째형 손암 약전은 1801년 유배당시 나주까지 함께 온 후 헤어졌는데 단 한차례도 만나지
못한체 해배 2년을 앞둔 1816년에 흑산도에서 돌아가심.
초당에 오시기 전에는 정약용 선생님의 호는 삼미자, 용보, 미용 등 여러가지 호를 사용했는데 이곳에 와서야 다산이란 호를 사용했다고 함.
※ 삼미자란 : 다산선생이 어려서 천연두로 인하여 본인의 왼쪽 눈썹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여 불리어진 호라고 함.
다산이란 호를 사용한 이유 : 현재 초당에 위치한 만덕산은 자연의 차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부르기를 다산이라고 불렀으며, 이름도 모르는 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해서 다산 정씨 또는 정다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이때부터 호를 다산이라고 사용함.
영랑 김윤식
영랑의 발자취
1902년 강진의 오백석지기 부유한 김종호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 보통학교(현 강진 중앙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중퇴
1919년 휘문의숙 재학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하였으며,
1920년 동경 유학시절 박열(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김현구, 차부자, 김길수등과 강진에서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를 발간
1903년 동경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 창간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독립 촉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
1950년 6.25전쟁시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져 9월 29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랑의 작품세계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시문학」 동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영랑의 시는 순수한 탐미주의(耽美主義)적 문학관에 입각하여 섬세하면서도 영롱한
정서를 잘 다듬고 깎아낸 언어와 시형(詩型)에 담은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다. 소월이
북도(北道)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곱살스러운
방언을 그의 시에 담았다. 그의 시 가운데는 4행시가 많다.
이 역시 민요의 형식에 가깝게 표현하려고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섬세한 정서, 언어의
조탁, 미묘한 음악성은 우리 순수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휘문고 시절에는 축구선수를 지낼 정도로 운동을 즐겨했으며, 본가에 정구장을 마련해
놓고 운동을 했던 영랑은 또한 동서양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에 정통하고 북(鼓)
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거문고에도 심취하는 등 이러한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뒷날 그의
시세계의 독특한 언어에 표현되어 나타나기도 했던 것 같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작품 감상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데뷔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시문학」 창간호1930.3 , 「영랑시선」1949)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시문학」 3호 1931)
내 마음을 아실 이(「시문학」 3호 1931)
모란이 피기 까지는(「문학3호」 1935 ,「영랑시집」 1935)
북 (「영랑시집」1935)
두견 (「영랑시집」 1935)
오월(五月 「문장6호」 1937)
독을 차고 (「문장」 10호 1939)
거문고 (「조광」 1939)
춘향 (「문장」 18호 1940,7)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메 단풍 들것네)
가늘한 내음
마당앞 맑은 새암은
아파 누워 혼자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창우 -
▣ 김태환 - 잘읽었습니다!정약용 3형제분이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에위치한 예봉산정상에있는철문봉에서 수학하면서 학문에 열중했다고합니다.....
▣ 경기 광주에서 .. - 아마 해남윤씨 사이에서태어난 3형제분이신가봅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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