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동김문 제 선조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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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4-24 08:49 조회1,588회 댓글0건본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동김문 제 선조님(1)
▣ 제3권 p236<경주부 고적(古蹟) ; 김알지(金閼智)>
--시림(始林)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에 임금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사이에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황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임금이 궤를 가져다가 여니,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보내줌이 아니겠는가?" 하고, 곧 거두어 양육하였다.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였으며,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인하여 그 숲을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숲 속에 쌓은 돌이 있는데 높이가 3척이나 된다. 속설에 전하기를, "알지(閼智)의 태(胎)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았던 돌로서, 가위의 흔적이 있다." 한다. 알지의 7대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왕녀[딸]에게 장가들었더니, 아들이 없어서 미추가 대신하여 섰는데[즉위하였는데],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였다.
▣ 제1권 p489 <개성부 하 고적(古蹟) ; 김부>
--정승원(政丞院) : 신라 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태조가 정승으로 봉하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 처를 삼아주고, 궁전 동쪽 한 구역을 하사하여 집을 짓게 하니, 후에 정승원이라고 칭하였다.
▣ 제3권 p233<경주부 사묘(祠墓) ; 경순왕(敬順王)>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 본부의 동북쪽 4리에 있다. 절일(節日)마다 주(州)의 수석(首席) 아전이 삼반(三班)을 거느리고 제사한다.
▣ 제6권 p72<회양도호부 산천(山川) ; 경순왕(敬順王)>
--금강산(金剛山) : 장양현(長楊縣)의 동쪽 30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1백 67리이다. 산의 이름이 다섯있는데, 첫째 금강(金剛), 둘째 개골(皆骨), 셋째 열반(涅槃), 넷째 풍악(楓嶽), 다섯째 지달(只怛)이니, 백두산의 남쪽 가지다. 회령부(會寧府)의 우라한현(우羅漢峴)으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러 동쪽은 두리산(頭里山)이 되고, 영흥(永興)의 서북쪽에서 검산(劒山)이 되었으며, 부의 서남쪽에서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서북쪽으로는 철령(鐵嶺)이 되며, 통천(通川)의 서남쪽에서 추지령(楸池嶺)이 되고, 장양(長楊)의 동쪽, 고성(高城)의 서쪽에서 이 산이 되었다. 분수령(分水嶺)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8백 30여 리다. 산은 무릇 1만 2천 봉이니, 바위가 우뚝하게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창해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의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산과 외산에 모두 1백 8곳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表訓寺)ㆍ정양사(正陽寺)ㆍ장안사(長安寺)ㆍ마하연(摩訶衍)ㆍ보덕굴(普德窟)ㆍ유점사(楡岾寺)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외롭다고 하여 국토(國土)를 들어서 고려에 항복하기를 모의하니, 왕자(王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忠臣)ㆍ의사(義士) 더불어 백성의 마음을 거두고 단합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칠 일이지, 어찌 1천 년의 사직(社稷)으로써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사세가 보전할 수 없는데,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싸워 죽어서> 간(肝)과 뇌수(腦髓)를 땅에 깔아 버리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사자(使者)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을 청하니, 왕자가 울부짖으며 임금을 하직하고, 곧 이 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방을 만들고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그 몸을 마쳤다고 한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창(金敞)>
--김창(金敞) : 처음 이름은 효공(孝恭)이다. 한림(翰林) 민성(敏成)의 아들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14세손이다. 희종 조(熙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효인(金孝印)>
--김효인(金孝印) : 창(敞)의 아우이다. 예자(隸字)를 잘 썼으며,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실력을 중외(中外)에 드날렸다.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 제3권 p96<연기현 산천(山川) ; 김흔(金忻)>
--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元)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闍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忻)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상(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흔(金忻)>
--김흔(金忻) :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에 뽑히고, 세 번 영전(榮轉)하여 장군(將軍)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탐라(耽羅)를 쳐서 승첩(勝捷)하고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또 일본 정벌(日本征伐)에 나가서 공(功)을 세워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이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승습하여 상락공(上洛公)에 봉직되었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순(金恂)>
--(金恂) :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방경(方慶)이 일본을 치니 순(恂)이 몰래 배에 올라서 좇아갔다. 돌아와 전중(殿中)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 제2권 p383<풍덕군 산천(山川) ; 김영돈(金永暾)>
--백마산(白馬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에서 이 산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고종 37년에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신집평(愼執平) 등을 보내 비로소 대궐을 이 산 남쪽 임해원(臨海院) 옛터에 지었다. ○ 고려 김영돈(金永暾)의 호종(扈從)시에, "비취빛 일산 푸른 바다 위에 거둥하니, 옥 퉁소 부는 소리 흰 구름 사이에 흘러가네. 여기는 티끌 한 점 날아오기 어렵구나. 수 많은 푸른 산, 비 온 뒤에 분명하네." 하였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영돈(金永旽)>
--김영돈(金永旽) : 순(恂)의 아들이다. 충렬왕 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조적(曹頔)의 난리에 시종(侍從)한 공로가 있어서 훈일등(勳一等)에 기록되고 추성병의익찬공신(推誠秉義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아들 진(縝)은 벼슬이 중대광(重大匡) 상락백(上洛伯)에 이르렀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영후(金永煦)>
--김영후(金永煦) : 순(恂)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침중하였다. 친척이나 친구 중에 빈곤한 사람이 있으면 구휼해 주지 않음이 없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 나라에 붙잡혔을 때에 모든 관원들은 다 달아나 숨었으나 홀로 영후(永煦)만은 왕을 호위(護衛)하다가 창에 찔리었다. 그의 손자는 사형(士衡)ㆍ사안(士安)이다. 나이가 20세를 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외손자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손자들이 과연 현능(賢能)하다면 국가가 스스로 등용할 것이며, 현능하지 않다면 비록 벼슬을 얻은들 그 벼슬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제3권 p429<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제안(金齊顔)>
--김제안(金齊顔) :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공민왕 조에 급제하였다.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서 전록생(田祿生)을 좇아 하남왕(河南王)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에게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연경(燕京)에 이르니 황태자(皇太子)가 그와 통신(通信)하는 것을 미워하여 저지(沮止)시켰다. 녹생(祿生)은 곧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제안(齊顔)이 홀로 연경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국서(國書)를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달하였다. 뒤에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일이 누설(漏泄)되어서 죽었다.
▣ 제3권 p429<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구덕(金九德)>
--김구덕(金九德) : 제안(齊顔)의 아우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서 숭정(崇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여러 번 이름난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죽은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함이 있었다.
▣ 제4권 p340<창원도호부 형승(形勝) ; 김구덕(金九德)>
형승 합포는 큰 진(鎭)이다 : 이첨(李詹)의 영성기(營城記)에 있다. 범이 웅크린 듯, 용이 서린 듯하다 : 김구덕(金九德)의 시에 있다.
▣ 제1권 p502<개성부 하 고적(古蹟) ; 김사안(金士安)>
--(전략)--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지금은 합좌사(合坐司)라 한다.--(중략)--전하께서 비로소 문하시중(門下侍中) 신 심덕부(沈德符),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신 이성계(李成桂) 우리 태조(太祖)의 어휘(御諱)이다. 를 판사(判事)로 삼고, 삼사에는 판사 신 왕안덕(王安德) 이하, 문하에는 찬성사 신 정몽주(鄭夢周) 이하를 동판사(同判事)로 삼으며, 밀직에는 판사 신 김사안(金士安)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로잡으니, 사사의 직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당(唐) 나라에서 다른 관원으로서 동평장사(同平章事)의 직함을 띤 이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곧 그 제도이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 솔내영환 -
▣ 김주회 -
▣ 김항용 - 귀하고 중요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 김태영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제3권 p236<경주부 고적(古蹟) ; 김알지(金閼智)>
--시림(始林)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에 임금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사이에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황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임금이 궤를 가져다가 여니,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보내줌이 아니겠는가?" 하고, 곧 거두어 양육하였다.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였으며,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인하여 그 숲을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숲 속에 쌓은 돌이 있는데 높이가 3척이나 된다. 속설에 전하기를, "알지(閼智)의 태(胎)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았던 돌로서, 가위의 흔적이 있다." 한다. 알지의 7대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왕녀[딸]에게 장가들었더니, 아들이 없어서 미추가 대신하여 섰는데[즉위하였는데],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였다.
▣ 제1권 p489 <개성부 하 고적(古蹟) ; 김부>
--정승원(政丞院) : 신라 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태조가 정승으로 봉하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 처를 삼아주고, 궁전 동쪽 한 구역을 하사하여 집을 짓게 하니, 후에 정승원이라고 칭하였다.
▣ 제3권 p233<경주부 사묘(祠墓) ; 경순왕(敬順王)>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 본부의 동북쪽 4리에 있다. 절일(節日)마다 주(州)의 수석(首席) 아전이 삼반(三班)을 거느리고 제사한다.
▣ 제6권 p72<회양도호부 산천(山川) ; 경순왕(敬順王)>
--금강산(金剛山) : 장양현(長楊縣)의 동쪽 30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1백 67리이다. 산의 이름이 다섯있는데, 첫째 금강(金剛), 둘째 개골(皆骨), 셋째 열반(涅槃), 넷째 풍악(楓嶽), 다섯째 지달(只怛)이니, 백두산의 남쪽 가지다. 회령부(會寧府)의 우라한현(우羅漢峴)으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러 동쪽은 두리산(頭里山)이 되고, 영흥(永興)의 서북쪽에서 검산(劒山)이 되었으며, 부의 서남쪽에서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서북쪽으로는 철령(鐵嶺)이 되며, 통천(通川)의 서남쪽에서 추지령(楸池嶺)이 되고, 장양(長楊)의 동쪽, 고성(高城)의 서쪽에서 이 산이 되었다. 분수령(分水嶺)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8백 30여 리다. 산은 무릇 1만 2천 봉이니, 바위가 우뚝하게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창해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의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산과 외산에 모두 1백 8곳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表訓寺)ㆍ정양사(正陽寺)ㆍ장안사(長安寺)ㆍ마하연(摩訶衍)ㆍ보덕굴(普德窟)ㆍ유점사(楡岾寺)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외롭다고 하여 국토(國土)를 들어서 고려에 항복하기를 모의하니, 왕자(王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忠臣)ㆍ의사(義士) 더불어 백성의 마음을 거두고 단합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칠 일이지, 어찌 1천 년의 사직(社稷)으로써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사세가 보전할 수 없는데,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싸워 죽어서> 간(肝)과 뇌수(腦髓)를 땅에 깔아 버리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사자(使者)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을 청하니, 왕자가 울부짖으며 임금을 하직하고, 곧 이 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방을 만들고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그 몸을 마쳤다고 한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창(金敞)>
--김창(金敞) : 처음 이름은 효공(孝恭)이다. 한림(翰林) 민성(敏成)의 아들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14세손이다. 희종 조(熙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효인(金孝印)>
--김효인(金孝印) : 창(敞)의 아우이다. 예자(隸字)를 잘 썼으며,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실력을 중외(中外)에 드날렸다.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 제3권 p96<연기현 산천(山川) ; 김흔(金忻)>
--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元)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闍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忻)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상(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 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흔(金忻)>
--김흔(金忻) :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에 뽑히고, 세 번 영전(榮轉)하여 장군(將軍)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탐라(耽羅)를 쳐서 승첩(勝捷)하고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또 일본 정벌(日本征伐)에 나가서 공(功)을 세워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이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승습하여 상락공(上洛公)에 봉직되었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순(金恂)>
--(金恂) :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방경(方慶)이 일본을 치니 순(恂)이 몰래 배에 올라서 좇아갔다. 돌아와 전중(殿中)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 제2권 p383<풍덕군 산천(山川) ; 김영돈(金永暾)>
--백마산(白馬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에서 이 산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고종 37년에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신집평(愼執平) 등을 보내 비로소 대궐을 이 산 남쪽 임해원(臨海院) 옛터에 지었다. ○ 고려 김영돈(金永暾)의 호종(扈從)시에, "비취빛 일산 푸른 바다 위에 거둥하니, 옥 퉁소 부는 소리 흰 구름 사이에 흘러가네. 여기는 티끌 한 점 날아오기 어렵구나. 수 많은 푸른 산, 비 온 뒤에 분명하네." 하였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영돈(金永旽)>
--김영돈(金永旽) : 순(恂)의 아들이다. 충렬왕 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조적(曹頔)의 난리에 시종(侍從)한 공로가 있어서 훈일등(勳一等)에 기록되고 추성병의익찬공신(推誠秉義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아들 진(縝)은 벼슬이 중대광(重大匡) 상락백(上洛伯)에 이르렀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영후(金永煦)>
--김영후(金永煦) : 순(恂)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침중하였다. 친척이나 친구 중에 빈곤한 사람이 있으면 구휼해 주지 않음이 없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 나라에 붙잡혔을 때에 모든 관원들은 다 달아나 숨었으나 홀로 영후(永煦)만은 왕을 호위(護衛)하다가 창에 찔리었다. 그의 손자는 사형(士衡)ㆍ사안(士安)이다. 나이가 20세를 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외손자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손자들이 과연 현능(賢能)하다면 국가가 스스로 등용할 것이며, 현능하지 않다면 비록 벼슬을 얻은들 그 벼슬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제3권 p429<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제안(金齊顔)>
--김제안(金齊顔) :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공민왕 조에 급제하였다.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서 전록생(田祿生)을 좇아 하남왕(河南王)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에게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연경(燕京)에 이르니 황태자(皇太子)가 그와 통신(通信)하는 것을 미워하여 저지(沮止)시켰다. 녹생(祿生)은 곧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제안(齊顔)이 홀로 연경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국서(國書)를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달하였다. 뒤에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일이 누설(漏泄)되어서 죽었다.
▣ 제3권 p429<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구덕(金九德)>
--김구덕(金九德) : 제안(齊顔)의 아우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서 숭정(崇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여러 번 이름난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죽은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함이 있었다.
▣ 제4권 p340<창원도호부 형승(形勝) ; 김구덕(金九德)>
형승 합포는 큰 진(鎭)이다 : 이첨(李詹)의 영성기(營城記)에 있다. 범이 웅크린 듯, 용이 서린 듯하다 : 김구덕(金九德)의 시에 있다.
▣ 제1권 p502<개성부 하 고적(古蹟) ; 김사안(金士安)>
--(전략)--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지금은 합좌사(合坐司)라 한다.--(중략)--전하께서 비로소 문하시중(門下侍中) 신 심덕부(沈德符),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신 이성계(李成桂) 우리 태조(太祖)의 어휘(御諱)이다. 를 판사(判事)로 삼고, 삼사에는 판사 신 왕안덕(王安德) 이하, 문하에는 찬성사 신 정몽주(鄭夢周) 이하를 동판사(同判事)로 삼으며, 밀직에는 판사 신 김사안(金士安)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로잡으니, 사사의 직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당(唐) 나라에서 다른 관원으로서 동평장사(同平章事)의 직함을 띤 이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곧 그 제도이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 솔내영환 -
▣ 김주회 -
▣ 김항용 - 귀하고 중요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 김태영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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