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공의 아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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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4-24 18:35 조회1,547회 댓글0건본문
상락공의 아드님 김군이 누군가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기문을 지은 안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안진(安震)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상헌(常軒).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예문검열(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밀직부사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안산군(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346년에는 이제현(李齊賢) 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에서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된 조일신(趙日新)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일파가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동(銅)을 바치게 하였다.
뒤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이를 근거로 함벽루의 기문에 대입하면
정사년 가을 중국에 과거에 응시하러 가면서...---정사년은 1317년이니
1318년 중국에서 제과에 급제한 사실로 보아 틀림이 없고..
5년뒤 진주목사로 나갔다고 했으니 이해가 1321년(1317년부터 5년이면 옛날 햇수계산으로 하면 1321년)
이 될 것이고...
이때 함벽루에 기문을 지으면서 이때 이 함벽루를 창건한 사람이
[여러대에 공신인 상락공의 아들인 김군이 태수였고 그가 이 함벽루를 지었다]
라고 했으며,
함벽루 자료에 의하면 1321년에 태수 김군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하였으니
함벽루를 지은 것은 1321년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면 1321년에 상락공을 충렬공으로 추정하면
당시 아드님으로서 생존해계신분은 문영공 휘 순, 동생인 론. 돈. 이렇게 세분이 됩니다.
그러나 1321년 문영공께서는 판삼사로서 계셨고, 또 이해8월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면
태수로 있었다라는 것과, 안진이 기문에 김군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문영공이 제외 되면
론. 돈 선조님이실 것이나
론 선조님은 족보상 중현대부 지밀직사사 대장군으로 나오며
돈 선조님의 기록은 전혀 없으니 고증할 길이 없다.
휘 흔 선조님은 아버님의 상락공의 봉작을 습봉하신 기록이 있으므로
상락공을 휘 흔 선조님으로 가정하면.
상락공(흔)은 1251년생이시며 1309년에 돌아가셨으니
사위인 민적은 1269년생, 조련은 생년 미상이다.
그 아드님이신 휘 승고선조님의 생년을 1270-1290으로 추정하면
1321년에는 30-50세에 해당된다.
승고 선조님은 숭복도감판사를 지내신 것으로만 되어 있으니,
이로서도 추론 할 수 없으나, 년대로 보아 아마도 이분이 함벽루를 지은 상락공의
아드님 김군에 해당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 김주회 - 명쾌한 분석! 시원합니다.
▣ 김윤만 - 김군. 군이란 호칭은 평교간 또는 손아래사이에 쓸 수 있는 호칭으로 기문 저자 안진과 승고 선조님간에 쓸 수 있는 호칭으로 생각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함벽루를 우리 집안 선조님께서 창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 단서를 찿을 수 있는 범위가 아주 좁혀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영 - 이제야 단서가 잡히는군요.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거듭 읽어보아야겠습니다.
▣ 김태서 - 몇번 읽어보아야 감이 잡히겠습니다.
▣ 김항용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안진(安震)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상헌(常軒).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예문검열(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밀직부사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안산군(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346년에는 이제현(李齊賢) 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에서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된 조일신(趙日新)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일파가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동(銅)을 바치게 하였다.
뒤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이를 근거로 함벽루의 기문에 대입하면
정사년 가을 중국에 과거에 응시하러 가면서...---정사년은 1317년이니
1318년 중국에서 제과에 급제한 사실로 보아 틀림이 없고..
5년뒤 진주목사로 나갔다고 했으니 이해가 1321년(1317년부터 5년이면 옛날 햇수계산으로 하면 1321년)
이 될 것이고...
이때 함벽루에 기문을 지으면서 이때 이 함벽루를 창건한 사람이
[여러대에 공신인 상락공의 아들인 김군이 태수였고 그가 이 함벽루를 지었다]
라고 했으며,
함벽루 자료에 의하면 1321년에 태수 김군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하였으니
함벽루를 지은 것은 1321년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면 1321년에 상락공을 충렬공으로 추정하면
당시 아드님으로서 생존해계신분은 문영공 휘 순, 동생인 론. 돈. 이렇게 세분이 됩니다.
그러나 1321년 문영공께서는 판삼사로서 계셨고, 또 이해8월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면
태수로 있었다라는 것과, 안진이 기문에 김군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문영공이 제외 되면
론. 돈 선조님이실 것이나
론 선조님은 족보상 중현대부 지밀직사사 대장군으로 나오며
돈 선조님의 기록은 전혀 없으니 고증할 길이 없다.
휘 흔 선조님은 아버님의 상락공의 봉작을 습봉하신 기록이 있으므로
상락공을 휘 흔 선조님으로 가정하면.
상락공(흔)은 1251년생이시며 1309년에 돌아가셨으니
사위인 민적은 1269년생, 조련은 생년 미상이다.
그 아드님이신 휘 승고선조님의 생년을 1270-1290으로 추정하면
1321년에는 30-50세에 해당된다.
승고 선조님은 숭복도감판사를 지내신 것으로만 되어 있으니,
이로서도 추론 할 수 없으나, 년대로 보아 아마도 이분이 함벽루를 지은 상락공의
아드님 김군에 해당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 김주회 - 명쾌한 분석! 시원합니다.
▣ 김윤만 - 김군. 군이란 호칭은 평교간 또는 손아래사이에 쓸 수 있는 호칭으로 기문 저자 안진과 승고 선조님간에 쓸 수 있는 호칭으로 생각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함벽루를 우리 집안 선조님께서 창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 단서를 찿을 수 있는 범위가 아주 좁혀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영 - 이제야 단서가 잡히는군요.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거듭 읽어보아야겠습니다.
▣ 김태서 - 몇번 읽어보아야 감이 잡히겠습니다.
▣ 김항용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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