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武臣政權 ) -7-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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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5-02 20:04 조회1,582회 댓글0건본문
KBS대하드라마 [武人時代]에서 요염한 자태를 뽑내는 김성령이 맡은 무비가 있습니다.
이 무비는 의종의 후비인줄 알고 있었으나 그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울러 무비는 한자로 쓰면 . 無妃가 아니라 無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론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염문이 많았던 것은 틀림 없는 모양입니다.
역사적 기록;
백선연 白善淵
개요
고려 후기의 환관(宦官).
활동분야 : 환관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래 남경(南京)의 관노(官奴)였는데, 의종(毅宗)이 난징[南京]에 있을 때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의종이 총애하는 궁녀 무비(無比)와 눈이 맞아 추문이 있었으며, 같은 환관 왕광취(王光就)와 함께 의종의 침전에까지 무상 출입하며 권세를 부렸다. 왕을 충동해서 예성강(禮成江)에서 유연(遊宴)을 베풀게 하는 등 국민의 원성과 비난을 받았다. 이에 좌정언(左正言) 문극겸(文克謙)이 그를 참형(斬刑)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도리어 왕의 비위를 거슬러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
박육화(朴育和)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1156년(의종 10)에 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를 지내고 1157년에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61년 급사중으로 왕이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인 김광균(金光均)의 고신(告身)에 서명하도록 하자 그 부당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서명하였다.
1163년에는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를 겸임하였다. 좌정언 문극겸(文克謙)이 환관 백선연(白善淵)·무비 등을 탄핵할 때 연서(連書)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문극겸이 좌천되어도 자신의 직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1173년(명종 3)에는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올랐다.
이지심(李知深)
?∼1170(의종 24). 고려의 문신. 주로 간관(諫官)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151년(의종 5)정언으로 있으면서 간관들이 3일 동안 시사(時事)를 논하여 간하는 것을 의종이 듣지 않자 홀로 2일 동안 복합(伏閤)하여 간쟁하였다.
1157년 급사중(給事中)으로서 당시 의종이 환관 정함(鄭#함19)에게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를 제수하자 그의 고신(告身)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1160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다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1162년 의종이 궁인(宮人) 무비(無比)의 사위 최광균(崔光鈞)에게 8품 관직을 주고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초수(超授)하려 하자 이번에도 그 고신에 서명하지 않다가 끝내는 왕의 종용에 못 이겨 서명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들었다.
관직이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에 이르렀고, 1170년 무신란이 일어난 직후에 다른 문신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충렬왕..
충렬왕때에도 같은 이름의 無比가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무비가 단순히 이름이 아니고, 다른 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료;
숙창원비(淑昌院妃)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의 비.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언양(彦陽).
취려(就礪)의 손녀이며, 양감(良鑑)의 딸, 문연(文衍)의 누이동생이다. 뛰어난 미인으로 처음 최문(崔文)에게 시집갔으나 젊어서 과부가 되었다.
제국공주(齊國公主)가 죽은 뒤 충렬왕이 궁인 무비(無比)를 총애하여 폐단이 생기자 충선왕이 이를 죽이고 그 대신 김씨를 궁중에 들여보내고 숙창원비로 봉하였다.
충렬왕이 죽은 뒤 오빠 문연의 집에 자주 찾아온 충선왕과 관계를 맺고 곧 숙비(淑妃)로 진봉(進封)되었다. 이후 왕을 미혹하여 정사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해서도 향연을 하는 등 절도가 없고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드라마속에서 무비에 대해 소개합니다.
무 비 (김성령)
-無比 30대 중반
-노비출신의 의종의 애첩이 되었을 만큼 경국지색의 미모로서 의종과의 사이에 3남9녀를 둠.
여인구실을 하면서부터 출산을 하였고 12명의 자녀를 둔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미모와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의종이 폐위되고 거제로 유배되었을 때 따라갔다가 이의방의 명을 받은 이의민에 의해 개경으로
압송되어 이의방과 재회한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이의방이 산원이 되었을 무렵 궁궐후원에서였다.
이의방은 어느 궁녀의 미색에 첫눈에 반해 애정고백을 한다. 그때 궁녀는 이의방에게
“황궁의 주인만이 나를 취할수있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다.
이의방은 후에 그 궁녀가 무비임을 알고 놀란다.
무비 역시 이의방의 출중한 용모와 기백에 끌린다. 그러나 왕의 애첩과 친위군장교였던
두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기에 서로를 가슴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다.
-이의방은 실질적인 황궁의 주인으로써 무비를 취하고 무비 역시 순순히 이의방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이후 무비는 개경 성밖 사찰에 머물게 되면서 이의방이 믿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연인이자
정치적 조언자의 역할을 하게된다. 지난 십수년의 황궁생활동안 노비로써 의종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살아남았던 터득한 그녀의 경험이 이의방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김보당의 난때 의종을 시해하라는 언질을 준것도 그녀였다.
-무비는 이의방에게 안하무인 행동으로 지탄을 받는 이준의를 멀리하고 문극겸과 이인을 곁에 두라고
조언한다. 이 일로 무비와 이준의는 견원지간이 된다.
-하지만 이준의보다 무비의 마음에 걸리는것은 이의방이 새로 첩으로 취한 임씨다.
투기따위는 버린지 오래다. 사내가 욕정 때문에 여인을 취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녀는 공예태후의
동기가 아니던가?
-서경에 대한 대대적인 진격이 있기 전날 무비는 적성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불안한 그녀는
이의방에게 급하게 전갈을 넣었지만 이미 그는 살해당한 뒤였다.
-저자거리에 방치되어있던 이의방의 시신을 거둬준 무비는 머리를 깍고 출가함으로써
이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그것이 왕의 애첩이자 왕을 시해한 권력자를 연인으로 두었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막연히 그러려니 하고 잘못 알고 있던 걸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 김윤만 - 의종(毅宗)이 송의 난징[南京]에는 왜 갔었나요? 처음 접하는 내용입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우회 - 현재 드라마속의 역사라 귀에 번뜩 들어오고 기억에 확실히 남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이 무비는 의종의 후비인줄 알고 있었으나 그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울러 무비는 한자로 쓰면 . 無妃가 아니라 無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론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염문이 많았던 것은 틀림 없는 모양입니다.
역사적 기록;
백선연 白善淵
개요
고려 후기의 환관(宦官).
활동분야 : 환관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래 남경(南京)의 관노(官奴)였는데, 의종(毅宗)이 난징[南京]에 있을 때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의종이 총애하는 궁녀 무비(無比)와 눈이 맞아 추문이 있었으며, 같은 환관 왕광취(王光就)와 함께 의종의 침전에까지 무상 출입하며 권세를 부렸다. 왕을 충동해서 예성강(禮成江)에서 유연(遊宴)을 베풀게 하는 등 국민의 원성과 비난을 받았다. 이에 좌정언(左正言) 문극겸(文克謙)이 그를 참형(斬刑)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도리어 왕의 비위를 거슬러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
박육화(朴育和)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1156년(의종 10)에 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를 지내고 1157년에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61년 급사중으로 왕이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인 김광균(金光均)의 고신(告身)에 서명하도록 하자 그 부당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서명하였다.
1163년에는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를 겸임하였다. 좌정언 문극겸(文克謙)이 환관 백선연(白善淵)·무비 등을 탄핵할 때 연서(連書)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문극겸이 좌천되어도 자신의 직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1173년(명종 3)에는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올랐다.
이지심(李知深)
?∼1170(의종 24). 고려의 문신. 주로 간관(諫官)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151년(의종 5)정언으로 있으면서 간관들이 3일 동안 시사(時事)를 논하여 간하는 것을 의종이 듣지 않자 홀로 2일 동안 복합(伏閤)하여 간쟁하였다.
1157년 급사중(給事中)으로서 당시 의종이 환관 정함(鄭#함19)에게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를 제수하자 그의 고신(告身)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1160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다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1162년 의종이 궁인(宮人) 무비(無比)의 사위 최광균(崔光鈞)에게 8품 관직을 주고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초수(超授)하려 하자 이번에도 그 고신에 서명하지 않다가 끝내는 왕의 종용에 못 이겨 서명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들었다.
관직이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에 이르렀고, 1170년 무신란이 일어난 직후에 다른 문신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충렬왕..
충렬왕때에도 같은 이름의 無比가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무비가 단순히 이름이 아니고, 다른 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료;
숙창원비(淑昌院妃)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의 비.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언양(彦陽).
취려(就礪)의 손녀이며, 양감(良鑑)의 딸, 문연(文衍)의 누이동생이다. 뛰어난 미인으로 처음 최문(崔文)에게 시집갔으나 젊어서 과부가 되었다.
제국공주(齊國公主)가 죽은 뒤 충렬왕이 궁인 무비(無比)를 총애하여 폐단이 생기자 충선왕이 이를 죽이고 그 대신 김씨를 궁중에 들여보내고 숙창원비로 봉하였다.
충렬왕이 죽은 뒤 오빠 문연의 집에 자주 찾아온 충선왕과 관계를 맺고 곧 숙비(淑妃)로 진봉(進封)되었다. 이후 왕을 미혹하여 정사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해서도 향연을 하는 등 절도가 없고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드라마속에서 무비에 대해 소개합니다.
무 비 (김성령)
-無比 30대 중반
-노비출신의 의종의 애첩이 되었을 만큼 경국지색의 미모로서 의종과의 사이에 3남9녀를 둠.
여인구실을 하면서부터 출산을 하였고 12명의 자녀를 둔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미모와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의종이 폐위되고 거제로 유배되었을 때 따라갔다가 이의방의 명을 받은 이의민에 의해 개경으로
압송되어 이의방과 재회한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이의방이 산원이 되었을 무렵 궁궐후원에서였다.
이의방은 어느 궁녀의 미색에 첫눈에 반해 애정고백을 한다. 그때 궁녀는 이의방에게
“황궁의 주인만이 나를 취할수있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다.
이의방은 후에 그 궁녀가 무비임을 알고 놀란다.
무비 역시 이의방의 출중한 용모와 기백에 끌린다. 그러나 왕의 애첩과 친위군장교였던
두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기에 서로를 가슴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다.
-이의방은 실질적인 황궁의 주인으로써 무비를 취하고 무비 역시 순순히 이의방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이후 무비는 개경 성밖 사찰에 머물게 되면서 이의방이 믿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연인이자
정치적 조언자의 역할을 하게된다. 지난 십수년의 황궁생활동안 노비로써 의종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살아남았던 터득한 그녀의 경험이 이의방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김보당의 난때 의종을 시해하라는 언질을 준것도 그녀였다.
-무비는 이의방에게 안하무인 행동으로 지탄을 받는 이준의를 멀리하고 문극겸과 이인을 곁에 두라고
조언한다. 이 일로 무비와 이준의는 견원지간이 된다.
-하지만 이준의보다 무비의 마음에 걸리는것은 이의방이 새로 첩으로 취한 임씨다.
투기따위는 버린지 오래다. 사내가 욕정 때문에 여인을 취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녀는 공예태후의
동기가 아니던가?
-서경에 대한 대대적인 진격이 있기 전날 무비는 적성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불안한 그녀는
이의방에게 급하게 전갈을 넣었지만 이미 그는 살해당한 뒤였다.
-저자거리에 방치되어있던 이의방의 시신을 거둬준 무비는 머리를 깍고 출가함으로써
이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그것이 왕의 애첩이자 왕을 시해한 권력자를 연인으로 두었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막연히 그러려니 하고 잘못 알고 있던 걸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 김윤만 - 의종(毅宗)이 송의 난징[南京]에는 왜 갔었나요? 처음 접하는 내용입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우회 - 현재 드라마속의 역사라 귀에 번뜩 들어오고 기억에 확실히 남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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