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武臣政權 )-10 -윤인첨, 두경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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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5-06 20:10 조회1,587회 댓글0건본문
윤인첨(尹鱗瞻)
1110(예종 5)∼1176(명종 6).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태조(胎兆).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언이(彦#이96)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의종 때 시어사(侍御史)가 되었으나 일을 논하다가 고관의 뜻에 거슬려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
1153년(의종 7)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던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 최광균(崔光均)이 정8품에 임명되고 식목록사
(式目錄事)를 겸하게 되자 사대부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는데, 왕의 독촉을 두려워한 나머지
간관으로서 여기에 서경(署經)하여 비웃음을 샀다.
1165년 형부시랑으로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었는데, 그때 금의 군사가 침입하여 정주(靜州:의주)의
방수별장(防守別將) 원상(元尙) 등 16인을 잡아가자, 의주판관 조동희(趙冬曦) 등과 은밀히 상의하여
첩문(牒文)을 금의 대부(大夫) 영주(營主)에게 보내어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받았으나, 이를 왕에게
숨기고 알리지 않았다.
1169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즉위하자 국자감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172년(명종 2) 동북면병마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이 반기를 들자 이의방(李義方)이 그가 김보당과 모의하였을 것이라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유응규(庾應圭)의 힘을 입어 면하게 되었으며, 뒤이어 상장군을 겸하여
중방(重房)에 참여하게 되고 수태사(守太師)의 벼슬이 가하여졌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기를 들자 원수가 되어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치게 되었으나
절령(#절05嶺:慈悲嶺)에서 패하였다. 다시 원수가 되어 부원수 기탁성(奇卓成), 좌군병마사
진준(陳俊), 우군병마사 경진(慶珍), 중군병마사 최충렬(崔忠烈) 등과 더불어 서경을 쳐서
1176년 이를 평정하고 조위총을 죽였다. 그 공으로 추충정란광국공신 상주국 감수국사
(推忠靖亂匡國功臣上柱國監修國史)에 올랐다.
무신정권이 서고나서는 무신들과 일을 함께 하였으나 그들에게 견제되어 유약하게 스스로를
보존하는 데 그쳤다.
죽은 뒤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이 증직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리어
매년 녹(祿)을 주었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 윤인첨= 파평윤씨의 중시조 윤관장군의 손자이다. 윤관-[윤언이],윤언민,윤언식윤언순-
윤관의 네 아들
윤언이(尹彦#이96)
?∼1149(의종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 문하시중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 인종 때 기거랑(起居郎)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왕으로 하여금 실시하도록 하였다.
1128년(인종 6)에 예부시랑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 수립을 청하고 돌아왔다.
1132년에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하사받았다. 일찍이 예종 때 아버지 관이 왕명을 받들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었는데, 그 글이 좋지 못하므로 그 문도(門徒)가 은밀히 왕에게 말하여 김부식(金富軾)을 시켜 다시 짓게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으므로 그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1133년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고 윤언이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는데, 이때 《주역》에 매우 정통하였으므로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김부식으로 하여금 대답이 궁하게 하였다.
1135년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하여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이때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과 지난날의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1148년(의종 2) 정당문학(政堂文學)·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예종·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말년에는 불교를 매우 좋아하였고 은퇴하여서는 파평(坡平: 坡州)에서 살았으며, 중 관승(貫乘)과 친교가 있었다.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이때문에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려 매년 녹(祿)을 주었다.
저서로는 《역해 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윤언민(尹彦旼)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윤관(尹瓘)의 아들이며, 언이(彦#이96)의 동생이다.
1135년(인종 13) 김단(金旦)·이유(李愈)·이유개(李有開)와 함께 좌군수(左郡帥) 김부의(金富儀)의 보좌로 출정하여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143년 상식봉어(尙食奉御)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원래 성품이 총명하고 영오함이 뛰어났으며 특히 서화(書畵)를 잘하였다고 한다.
윤언식(尹彦植)
?∼1149(의종 3). 고려의 관인. 본관은 파평(坡平). 문하시중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인종을 태자 시절부터 시위하여 인종의 즉위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1136년(인종 14) 금나라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상(喪)이 있자, 전중감(殿中監)으로서 조제사(弔祭使)에 임명되어 금나라를 방문하였다.
1148년(의종 2) 수사공(守司空)이 가하여졌으며, 1149년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죽었다.
천성이 고결하고, 뜻이 높았으며 빈객(賓客)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윤언순(尹彦純)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본관은 파평(坡平).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1115년(예종 10) 시어사(侍御史)로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는데, 당시 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길이 막힌데다가, 또 고영창(高永昌)이라는 자가 요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동경(東京)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요나라에 함께 사신으로 갔었던 진봉사(進奉使) 서방(徐昉), 하정사(賀正使) 이덕윤(李德允) 등과 함께 귀국하던 도중 고영창에게 붙잡혀 억류되었다.
한편, 이들의 귀국이 늦어지자 고려에서는 비서교서랑(#비58書校書郎) 정양직(鄭良稷)을 몰래 보내어 그 사정을 상세히 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동경에 억류당하고 있는 동안 고영창의 핍박을 받아 그의 건국을 찬양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는데, 돌아온 뒤에 이 일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다가 들통이 나서 탄핵을 받아 징계당하였다. 뒤에 풀려나 남원부사에 이르렀다.
****************************************************************************************
두경승(杜景升)
?∼1197(신종 즉위년). 고려의 무신이며 재상(宰相). 전주 만경현(萬頃縣)사람으로
만경두씨(萬頃杜氏)의 시조이다.
학식은 없었으나 성품이 순후하고 가식이 적으며 용기와 힘이 세었다. 의종 때
공학군(控鶴軍)에 뽑혔다가 대정(隊正)이 되어 후덕전(厚德殿)의 견룡(牽龍)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무인들이 남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나 홀로 전문(殿門)을 지키면서 남의 재산을
범하지 않았다. 명종초 산원(散員)이 되었다가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내순검군지유
(內巡檢軍指諭)가 되었으며 뒤이어 낭장(郎將)이 되었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뒤이어 장군이 되었으며,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어 창주(昌州:지금의 평안북도 창성)를 진수하였다.
이때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개성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동로가발병마부사
(東路加發兵馬副使)가 되어 고산(孤山)·선주(宣州:지금의 선천)·맹주(孟州:지금의 맹산)·무주
(撫州:지금의 덕천군) 등지에서 무공을 세운 후 개성으로 개선하였으며 다시 후군총관사
(後軍摠管使)가 되어 연주(漣州:지금의 개천)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176년에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서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죽였는데,
그뒤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영청(永淸:지금의 평원)을 진수했다.
이듬해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를 겸하였고, 뒤이어 상장군·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올랐다.
1180년에 공부상서, 이듬해 호부상서, 1185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1190년에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다.
뒤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가 1193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다시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였다.
이듬해 이의민(李義旼)과 함께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96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이듬해 새로 정권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자연도(紫燕島)로 귀양갔다가 울분에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가 금을 가지고 있어 그의 종이 도둑질하려고 은밀히 죽였다고도 전한다.
******절령=자비령 慈悲嶺
개요
황해도 황주군 ·봉산군 ·서흥군(현 황북 연탄군 ·봉산군) 경계에 있는 고개.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절령(悰嶺)이라고도 한다. 높이 489m. 황주 남동쪽 25km에 있으며, 예로부터 개성에서 평양으로 통하는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역신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서경(西京)을 비롯한 북계(北界) 54성(城)과 자비령 이북 6성을 가지고 몽골[蒙古]에 귀순하여, 이곳을 동녕부(東寧府)라 칭함으로써 1270년(원종 11)~1290년(충렬왕 16)까지 자비령이 여 ·원(麗元)의 국경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11월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이 고개에 방책을 쌓고 방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세조(世祖) 때에는 이 고개에 호환(虎患)이 많았으며, 또 명(明)의 사신들이 황주 남쪽 10 km에 있는 극성진(棘城鎭)의 극성로(棘城路)를 통하여 왕래하므로 이 고갯길을 폐하기도 하였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 김재원 - 연일 자료 찾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두경승이 의인으로 그려져서 호감이 가던데요. 대중매체의 영향력을 새삼 느낍니다.
▣ 김은회 -
1110(예종 5)∼1176(명종 6).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태조(胎兆).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언이(彦#이96)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의종 때 시어사(侍御史)가 되었으나 일을 논하다가 고관의 뜻에 거슬려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
1153년(의종 7)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던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 최광균(崔光均)이 정8품에 임명되고 식목록사
(式目錄事)를 겸하게 되자 사대부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는데, 왕의 독촉을 두려워한 나머지
간관으로서 여기에 서경(署經)하여 비웃음을 샀다.
1165년 형부시랑으로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었는데, 그때 금의 군사가 침입하여 정주(靜州:의주)의
방수별장(防守別將) 원상(元尙) 등 16인을 잡아가자, 의주판관 조동희(趙冬曦) 등과 은밀히 상의하여
첩문(牒文)을 금의 대부(大夫) 영주(營主)에게 보내어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받았으나, 이를 왕에게
숨기고 알리지 않았다.
1169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즉위하자 국자감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172년(명종 2) 동북면병마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이 반기를 들자 이의방(李義方)이 그가 김보당과 모의하였을 것이라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유응규(庾應圭)의 힘을 입어 면하게 되었으며, 뒤이어 상장군을 겸하여
중방(重房)에 참여하게 되고 수태사(守太師)의 벼슬이 가하여졌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기를 들자 원수가 되어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치게 되었으나
절령(#절05嶺:慈悲嶺)에서 패하였다. 다시 원수가 되어 부원수 기탁성(奇卓成), 좌군병마사
진준(陳俊), 우군병마사 경진(慶珍), 중군병마사 최충렬(崔忠烈) 등과 더불어 서경을 쳐서
1176년 이를 평정하고 조위총을 죽였다. 그 공으로 추충정란광국공신 상주국 감수국사
(推忠靖亂匡國功臣上柱國監修國史)에 올랐다.
무신정권이 서고나서는 무신들과 일을 함께 하였으나 그들에게 견제되어 유약하게 스스로를
보존하는 데 그쳤다.
죽은 뒤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이 증직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리어
매년 녹(祿)을 주었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 윤인첨= 파평윤씨의 중시조 윤관장군의 손자이다. 윤관-[윤언이],윤언민,윤언식윤언순-
윤관의 네 아들
윤언이(尹彦#이96)
?∼1149(의종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 문하시중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 인종 때 기거랑(起居郎)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왕으로 하여금 실시하도록 하였다.
1128년(인종 6)에 예부시랑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 수립을 청하고 돌아왔다.
1132년에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하사받았다. 일찍이 예종 때 아버지 관이 왕명을 받들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었는데, 그 글이 좋지 못하므로 그 문도(門徒)가 은밀히 왕에게 말하여 김부식(金富軾)을 시켜 다시 짓게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으므로 그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1133년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고 윤언이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는데, 이때 《주역》에 매우 정통하였으므로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김부식으로 하여금 대답이 궁하게 하였다.
1135년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하여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이때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과 지난날의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1148년(의종 2) 정당문학(政堂文學)·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예종·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말년에는 불교를 매우 좋아하였고 은퇴하여서는 파평(坡平: 坡州)에서 살았으며, 중 관승(貫乘)과 친교가 있었다.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이때문에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려 매년 녹(祿)을 주었다.
저서로는 《역해 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윤언민(尹彦旼)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윤관(尹瓘)의 아들이며, 언이(彦#이96)의 동생이다.
1135년(인종 13) 김단(金旦)·이유(李愈)·이유개(李有開)와 함께 좌군수(左郡帥) 김부의(金富儀)의 보좌로 출정하여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143년 상식봉어(尙食奉御)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원래 성품이 총명하고 영오함이 뛰어났으며 특히 서화(書畵)를 잘하였다고 한다.
윤언식(尹彦植)
?∼1149(의종 3). 고려의 관인. 본관은 파평(坡平). 문하시중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인종을 태자 시절부터 시위하여 인종의 즉위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1136년(인종 14) 금나라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상(喪)이 있자, 전중감(殿中監)으로서 조제사(弔祭使)에 임명되어 금나라를 방문하였다.
1148년(의종 2) 수사공(守司空)이 가하여졌으며, 1149년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죽었다.
천성이 고결하고, 뜻이 높았으며 빈객(賓客)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윤언순(尹彦純)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본관은 파평(坡平).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1115년(예종 10) 시어사(侍御史)로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는데, 당시 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길이 막힌데다가, 또 고영창(高永昌)이라는 자가 요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동경(東京)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요나라에 함께 사신으로 갔었던 진봉사(進奉使) 서방(徐昉), 하정사(賀正使) 이덕윤(李德允) 등과 함께 귀국하던 도중 고영창에게 붙잡혀 억류되었다.
한편, 이들의 귀국이 늦어지자 고려에서는 비서교서랑(#비58書校書郎) 정양직(鄭良稷)을 몰래 보내어 그 사정을 상세히 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동경에 억류당하고 있는 동안 고영창의 핍박을 받아 그의 건국을 찬양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는데, 돌아온 뒤에 이 일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다가 들통이 나서 탄핵을 받아 징계당하였다. 뒤에 풀려나 남원부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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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杜景升)
?∼1197(신종 즉위년). 고려의 무신이며 재상(宰相). 전주 만경현(萬頃縣)사람으로
만경두씨(萬頃杜氏)의 시조이다.
학식은 없었으나 성품이 순후하고 가식이 적으며 용기와 힘이 세었다. 의종 때
공학군(控鶴軍)에 뽑혔다가 대정(隊正)이 되어 후덕전(厚德殿)의 견룡(牽龍)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무인들이 남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나 홀로 전문(殿門)을 지키면서 남의 재산을
범하지 않았다. 명종초 산원(散員)이 되었다가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내순검군지유
(內巡檢軍指諭)가 되었으며 뒤이어 낭장(郎將)이 되었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뒤이어 장군이 되었으며,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어 창주(昌州:지금의 평안북도 창성)를 진수하였다.
이때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개성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동로가발병마부사
(東路加發兵馬副使)가 되어 고산(孤山)·선주(宣州:지금의 선천)·맹주(孟州:지금의 맹산)·무주
(撫州:지금의 덕천군) 등지에서 무공을 세운 후 개성으로 개선하였으며 다시 후군총관사
(後軍摠管使)가 되어 연주(漣州:지금의 개천)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176년에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서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죽였는데,
그뒤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영청(永淸:지금의 평원)을 진수했다.
이듬해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를 겸하였고, 뒤이어 상장군·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올랐다.
1180년에 공부상서, 이듬해 호부상서, 1185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1190년에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다.
뒤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가 1193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다시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였다.
이듬해 이의민(李義旼)과 함께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96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이듬해 새로 정권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자연도(紫燕島)로 귀양갔다가 울분에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가 금을 가지고 있어 그의 종이 도둑질하려고 은밀히 죽였다고도 전한다.
******절령=자비령 慈悲嶺
개요
황해도 황주군 ·봉산군 ·서흥군(현 황북 연탄군 ·봉산군) 경계에 있는 고개.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절령(悰嶺)이라고도 한다. 높이 489m. 황주 남동쪽 25km에 있으며, 예로부터 개성에서 평양으로 통하는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역신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서경(西京)을 비롯한 북계(北界) 54성(城)과 자비령 이북 6성을 가지고 몽골[蒙古]에 귀순하여, 이곳을 동녕부(東寧府)라 칭함으로써 1270년(원종 11)~1290년(충렬왕 16)까지 자비령이 여 ·원(麗元)의 국경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11월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이 고개에 방책을 쌓고 방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세조(世祖) 때에는 이 고개에 호환(虎患)이 많았으며, 또 명(明)의 사신들이 황주 남쪽 10 km에 있는 극성진(棘城鎭)의 극성로(棘城路)를 통하여 왕래하므로 이 고갯길을 폐하기도 하였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 김재원 - 연일 자료 찾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두경승이 의인으로 그려져서 호감이 가던데요. 대중매체의 영향력을 새삼 느낍니다.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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