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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武臣政權 )-12-망이,망소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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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5-09 19:56 조회1,736회 댓글0건

본문

1176년

공주 명학소, 망이.망소이의 민란이 일어납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



개요

고려 정중부(鄭仲夫) 집권기에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봉기.

언제 : 고려시대 무신정권기

어디서 : 충남 공주

누가 : 망이, 망소이

무엇을 : 민중봉기

왜 : 사회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관리의 탐학이 심해짐







무신란(武臣亂)에 의한 무신정권의 출현을 전후해서 사회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관리의 탐학으로 유망민이 속출하였다. 1176년(명종 6) 1월, 공주에 딸린 천민부락 명학소(鳴鶴所)에



살던 망이 ·망소이 등은 도당을 모아 자칭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일컫고, 본읍인 공주를 공격해



함락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천민부락의 지위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파견



하였음에도 응하지 않고 예산(禮山)을 공략해서 감무(監務)를 살해하였다. 망이 ·망소이 등은 계속



난동을 하다가 이듬해 1월에 항복하여, 조정에서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곡식을 주고 고향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망이는 2월에 다시 난을 일으켜 서산(瑞山)의 가야사(伽倻寺)를 점거하고 3월에는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워 승려 10여 명을 죽이는 등 일대를 휩쓴 다음 아산(牙山)까지 점령하였다.



이어 이들은 청주목(淸州牧)의 치소(治所)를 제외한 관할구역 내의 모든 군현(郡縣)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전면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차차 기세를 잃고, 7월에 망이 ·망소이 등이 붙잡힘으로써



망이 ·망소이의 난은 끝났다.







망이와 망소이가 살던 명학소는 공주 고을에 딸린 특수 행정 구역으로서, 천민들이 거주하면서



금, 은, 동, 철, 종이, 먹, 숯 따위의 수공업품과 특산물을 생산하여 중앙 정부에 바치는 소의



하나였습니다.





1176년 1월 명학소의 천민 몇 백 명은 망이와 망소이를 지도자로 하여 봉기의 첫 봉화를 올렸습니다.



이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와 가혹한 수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차별에 대한 철폐로 모아졌습니다.



이들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공주 고을로 쳐들어가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자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와 가혹한 수탈을 직접적으로 일삼고 있는 것이 바로 공주 관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주 고을로 쳐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공주 일대 여러 고을의 농민들이 이들의 봉기에 합류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삽시간에 봉기의 물결은 공주 일대로 번져갔고, 남도 지방의 농민 봉기에 불을 당기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명학소 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된 봉기가 엄청난



위세로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무신 정권은 이 봉기를 진압할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 때는 서경 유수 조위총의 반란을 겪은 지



1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던 데다가 그 반란의 여파로 서경 지방 군민과 서북 지방의 농민들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아직 진압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무렵 중앙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온통 서북 지방에 몰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신 정권은



망이와 망소이의 봉기에 대해서는 회유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신 정권은 봉기의 핵심 부대인 명학소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그들을 다른 고을의 농민들과



갈라서게 하면 봉기가 수그러들 것으로 판단하고, 그 해 6월에 왕을 내세워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고을의 격을 올리고 현령과 현위를 파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이 회유책을 들고나오자 봉기군은 갈팡질팡하다가, 명학소에 파견된 현령과 현위의 활동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명학소가 현으로 승격된 것은 그 고을 주민들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애초에 봉기를 일으켰던 목표는 이룬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청과 투쟁하면서 정치 의식, 사회 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한 농민들과 천민들은 그까짓 현으로



승격한 데에 만족해서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해 9월에 예산현을 습격하여 무신 정권이 파견한 지방관인 감무를 처단하고 투쟁의 기세를



계속 올려 나갔습니다. 그들은 명학소가 현으로 승격한 것은 받아들이면서도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공주 일대의 통치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투쟁 기세가 불타오르는데도 봉기의 지도자 망이는 무신 정권의 거듭되는 회유



공작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인 1177년 1월 개경의 중앙 정부와 화의를 맺었습니다. 그가 회유



공작에 견디지 못한 것은 봉기에 대한 전망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학소의 주민들이 천민 거주 집단에 묶여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보겠다는 의지



이상의 전망은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식 수준은 자신들에 대한 신분적 차별의 원인이



공주 관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이 들어선 개경 정부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 지배 체제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배층과 천민들 사이의 냉혹한 대립은 망이의 소박한 생각을 산산이 부수어 놓았습니다.



망이가 지휘하는 봉기군과 개경 정부가 화의를 맺은 뒤 농민들과 천민들이 무장을 풀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관군은 그 뒤에 다시 봉기를 일으킬 수 없도록 하려고 봉기의 지도부를 잡아들이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망이를 잡아들이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망이의 어머니와 아내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에 격분한 망이는 다시 봉기군을 조직하여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봉기군은 새로운 봉기에서는 황려현(여주), 진주(진천) 같은 곳들을 점령하고, 가야사와 흥경원이라는



절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 때 망이는 포로가 된 승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선언서를 주어서



개경으로 보냈습니다.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결코 항복하여 너희들에게 잡히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까지 가서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망이도 이제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이 개경의 중앙



정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망이의 봉기군은 새롭게 봉기를 일으킨 뒤로 날이 갈수록 투쟁 규모와 활동 지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봉기군은 아주(아산)를 점령하고 청주 관아에 딸린 고을들을 모조리 차지했습니다.



청주 관아에는 55개의 군과 현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향, 소, 부곡 같은 천민 거주 지역도 많았습니다.



망이의 봉기군이 점령하는 대로 천민 거주 지역은 해방이 선포되었습니다.



명학소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걸고 시작된 봉기가 오늘날의 충청남북도의 거의



대부분과 경기도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을 차지할 정도로 발전했으며, 그 안에 포함된 천민 거주



지역에 대한 차별은 사실상 모두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4월에 접어들면서 망이의 봉기군은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고을의 관리들을 응징하는 데 성공한 농민들과 천민들은 좀체 다른 고을로 진격해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고을의 벼슬아치들만을 타도 대상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와 함께 농번기로 접어든 계절의 탓도 있었습니다. 대다수가 농민인 봉기군은 농번기가 되면서



봉기 참여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이어지다가 그 해 6월에 마침내 망이는 국왕과 화평을 맺으려고 개경으로 찾아갔다가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망이의 봉기군은 차츰 흩어져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망이와 망소이의 봉기를 통해 우리는 신분 차별을 부르짖는 신분 해방 운동이 피지배층의 힘이



강화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봉기가 역사



발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배층의 많은 양보를 이끌어냈습니다. 고대 사회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향, 소,



부곡 따위의 천민 거주 지역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 체제의 발전을 한층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노예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노비와 천민의 수가 줄어들고 양인 농민이 늘어나는 것은 봉건제에서



생산력 발전을 촉진하고 더욱 완성에 가까운 봉건 체제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그러나 지배층의 양보보다 중요한 것은 양인 농민들과 천민들의 사회 의식, 정치 의식의 성장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농민들과 천민들이 이후 몽고의 침략에 항전하는 주요 동력이 되게 하고,



조선 시대 이후에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신분 해방 운동이 있게 합니다.



그런데 망이와 망소이의 신분 해방 운동은 우리에게 또다른 교훈 한 가지를 줍니다. 그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투쟁에서 진정한 화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망이와 망소이를 기만한 당시



지배층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요.

















▣ 김윤만 - 천민 출신 이의민의 출세가 연이은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겠지요?

▣ 김재원 -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영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학교 다닐 때 고려사는 거의 배우지 못했는데 큰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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