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115) 시해당시의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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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5-09 20:01 조회1,913회 댓글0건본문
오호! 민족의 광망(光芒) 김구선생
삼천만의 비분(悲憤)은 중천(中天)
천야(天耶) 인야(人耶) 사방(斯邦)의 불행여(不幸歟)
김구선생 피습(被襲)절명(絶命)
묻노라 범행자야 무슨 심사냐
팔십평생을 민족을 위하여 한결같이 싸워 온 애국자 김구선생은 괴한(怪漢)의 흉탄에 쓰러졌다.
항일투쟁의 급선봉이요, 해방이후 남북통일을 위하여 한결같이 싸워온 선생이 아직 전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하기도 전에 포악한 마수에 스러졌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만일에 이 하수를 감행한자, 개인의 정견의 차이로 저지를 범죄라면 어찌 무도몽매한
작란이냐? 애국애족의 결정체인 백범 김구선생의 거룩한 정신은 전 민족의 가슴속에 깊이 깊이
아로새겨저 선생의 애족의 신념은 반드시 이룩되어 청사에 오점을 지은 부리들이 삼천만의 단죄를
받을 날이 머지 않을 것이다.
김구선생의 피실을 계기로 우리는 정치운동에 있어 일대반성을 하여야 한다. 냉정한 지성으로
돌아가 참으로 귀대한 민족인 것을 세계에 증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만풍(蠻風)을 일소하는 동시에
우리는 김구선생의 거룩한 뜻을 살리어 하루 속히 납북통일을 이루어 삼천만 겨레가 단연(團 )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꾸밀 것을 가슴깊이 맹서하여야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목표로
칠십평생을 쓰라린 유랑 폭풍 천신만고 속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워온 오로지 우리 민족만이
자랑할 수 있는 희망의 혜성 위대한 삼천만의 지도자인 한국독립당 당수 백범 김구선생은 재작(再昨)
이십육일(일요일) 12시 5분경 시재 충장로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정복을 착용한 안두희에게 권총
저격을 받고 1시 40분경 정의의 속에 피로 물들인 오랜 투쟁의 경력을 우리의 가슴속에 사모치게
남기고 절명하시었다. 이날 측근자인 이풍식씨의 말에 의하면 아침 11시경 전기 육군소위 안두희가
선생에게 면회를 요청하여 왔다. 안(安)은 약 1개월 전에도 선생에게 면화하여 화병등의 선사도
하고 간 일이 있으며 마침 선생은 2층 서재에서 휴식중이므로 측근자는 조금도 이를 의심치 않고
수부(受付)실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주로 군사문제에 관한 잡담을 하다가
무기를 차고 선생을 뵈일 수 없다 하여 자기 허리에 소지했던 권총을 방에 놓고 선우진씨의 안내로
혼자 2층에 올라가 의자에 앉아 계시던 선생의 안부(顔部)와 어깨를 향해 세발을 발사하였다.
마침 범인 안(安)이 2층에 올라가는 사이에 전화의 벨이 울리므로 이(李)씨와 선우씨는 전화를 받고
그리고 또한 라디오 소리가 요란스러웠으므로 전연 1층에서는 총성을 듣지 못했는데 대문에
수비하고 있던 2명의 경관이 [카빙]을 겨누고 현관에 달여올 때 안(安)이 유유히 2층 계단을
내려오므로 이를 무난히 체포하여 곧 서대문서에 보고한 후 약 20분 후에 헌병대에 인도하였다 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범인의 화병 선물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배후관계에 관해서는 헌병대의 수사전전에
따라 앞으로 백일하에 발표될 것이라 한다.
(단기 4282년 6월 28일 자유신문 제 2면 기사)
▣ 김윤만 -
▣ 김재원 -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단기 4282년이라면 서기로 1949년인가요?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배후도 언젠가는 낱낱히 밝혀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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