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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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14 09:20 조회1,536회 댓글0건본문
묵재일기 1(?齋日記一)
반정시사(反正時事)
갑인년(1614, 광해 6). 박재(朴?)가 대간이 되어, 신이 일찍이 상신(相臣) 정인홍을 배척했다고 하여, 장차 죽을 곳에 떨어뜨리고자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시종 굳게 거절하시고 삭직만을 명했습니다.
병진년에 대간이 신을 논의하는데 죄명이 한층 심하였으나, 전하께서는 부처라라고만 명하시고, 얼마 안 가서 전리(田里)로 방귀(放歸)시켰다가 곧 서용하여 지방관의 책임을 주시었으니, 특별한 은총과 남다른 예우가 전후 거듭함에 대하여 신은 항상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격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죽을 바를 알지 못했는데, 어찌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나쁜 이름이 도리어 신의 몸에 더할 줄 생각했겠습니까?
지금 신을 논의하는 자는, ‘신이 김자점과 더불어 반역의 말을 하였다.’ 합니다. 알지 못하겠지만 어느 곳에서 말한 것이며, 누가 듣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김자점과 신은 비록 사돈의 정분이 있어, 때로 왕래하여 만난다 할지라도 어찌 이것으로써 모의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김자점은 한낱 한미한 선비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김자점을 들추는 것은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김자점은 바로 유대건의 생질입니다. 유대건이 당시 무리배에게 꺼림을 당해 여러 가지로 공격하다가 꾀가 모자라고 힘이 다하자, 곧 말을 전파했다고 칭탁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말을 지어내어 차례로 제거할 계획을 하는 것입니다. 김자점이 유대건에게 연좌된 것도 이미 원통한 일인데, 하물며 신이겠습니까? 이 무리가 이같은 말을 조작하여 서로 부르고 화답하면서, 매양 남을 함정에 떨어뜨리려는 것은 성상께서 환히 아시는 사실이고, 온 나라 사람도 다 아는 바입니다.
이 말이 대간에서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들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한 근거를 잡아서 신과 더불어 대변한 다음에야 신의 원통한 실상을 비로소 해명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곧 칼로 배를 갈라서 신의 마음을 밝히고자 했지만, 꾹 참고 이에 이르도록 오히려 자결하지 않은 것은 신이 죽은 후에 신의 원통함을 끝내 밝힐 수 없음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신을 형조 판서에게 내리시어 말을 조작한 자와 더불어 허실을 대변하여 말의 근거를 알아내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상소문이 들어갔으나 오래도록 회보가 없었다. 공은 세 아들을 거느리고 대궐 밖에서 거의 두 달이나 명을 기다렸다. 이로써 의심을 없앨 바탕을 삼는 한편 제공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일을 도모하게 하여 거사할 기일을 빨리 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옥건(趙玉乾)이 공청 우후(公淸虞候)로서 사변에 대비하고 수원에 와서 진무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은 일을 같이 하려고 먼저 구굉(具宏)을 보내서 그 의사를 떠보았더니 소득없이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다시 가서 달래보자고 하니, 심기원과 이시방은 말하기를,
“처음 가서 달래다가 듣지 않았으니, 무사히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오. 지금 다시 가서 달래다가 혹 붙잡아두고 고변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그만두기를 힘껏 주장하였다. 이때 주상(主上 인조)은 백금(百金)을 내어 심기원 등 여러 사람을 시켜서 이미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집결하게 하였으나 이것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웠으므로, 또 도감병(都監兵)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써 걱정하였다.
공은 본디 대장 이흥립(李興立)과 같은 마을에 살아 서로 아는 교분이었으므로 직접 통하고자 했으나, 이흥립이 박승종(朴承宗)과 혼인한 사이기에 말을 내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장유(張維)와 더불어 상의하고 그 아우 장신(張紳)을 시켜 일을 함께 하자는 뜻으로써 말하도록 했는데, 대개 장신은 바로 이흥립의 사위였다. 곧 이흥립과 더불어 장유의 집으로 모임을 약속하였다. 그 당시 함께 모의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위태롭게 여기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드디어 이흥립이 직접 쓴 편지를 장단 부사 이서와 이천 부사 이중로(李重老)에게 전하니, 두 사람은 이 편지를 보고 3월 13일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공은 여러 공들에게 이르기를,
“이때의 대장은 나같이 노쇠한 자가 할 직임이 아니오. 김류는 본디 장수의 물망이 있었으니, 잘 통솔할 수 있을 것이오.”
하니, 여러 사람은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이괄(李适)이 북병사(北兵使)로서 미처 부임하지 못했는데, 그 군관 20여 인을 인솔하고 먼저 가서 기다렸다. 공도 김자점ㆍ송영망(宋英望)ㆍ한교 등과 함께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 약속대로 가서 모였다. 조금 지나서 장유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하여 벌써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체포하려는 군사가 사방으로 나섰는데,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확(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으로부터 나왔다.”
고 하였다. 이때 약속한 모든 군사는 태반이나 이르지 않았고, 장단 군사 또한 오지 않았다. 다만 수백 명 오합지졸로서 체통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이 기별을 듣자 모두 두려움을 품어 장차 흩어지려 하였다.
공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류가 미처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영공(令公)이 대장이 되어야 군사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평소 군사의 일을 익히지 못했으므로 급작스러운 때에 힘이 되기 어려울 것이오.”
하고, 드디어 이괄로 대장을 삼고 말하기를,
“나로부터 이하로 그대의 통제를 어기는 자는 베시오.”
하고, 모병(募兵)을 거느리고 벌여 서서 절하였다. 그러자 이괄은 흔연히 따랐다. 이괄은 곧 군관을 불러서 써놓았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고 입은 옷 후면에 붙여 표시하도록 했다. 이시백은 말하기를,
“군사가 계통이 없으면 변화에 대처하기가 어려우니, 빨리 모든 장수에게 분배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게 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괄은 그 말대로 군사의 대오를 엄하게 단속하니 군사의 상황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지나, 김류가 심기원ㆍ원두표(元斗杓) 등 여러 사람과 모화관(慕華館)에 모여서 전령을 시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은 크게 노하여 가고자 하지 않았다. 공은 힘껏 권하여 가게 하였다. 그래서 이괄은 처음 약속대로 대장을 김류에게 양보하고 대오를 정돈하여 사현(沙峴 모래내)을 넘어 홍제원에 이르니, 장단 군사가 잇달아 이르고 심기원이 인솔한 가동(家?)ㆍ무사가 또한 2백여 인이나 되어, 군사의 형세가 조금 떨치었다. 이때에 김류가 군사를 점고해서 행군하려 하자, 심기원ㆍ이시백 등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점고한 다음에 출발한다면 장차 새벽이 될 것이니, 거느리는 장수들에게 분담시켜서 각각 그 군사를 인솔하고 나가도록 하소서.”
하니, 김류가,
“그렇소.”
하였다. 그래서 심기원ㆍ김자점ㆍ최명길(崔鳴吉)ㆍ송영남ㆍ신경유(申景裕) 등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창의문에 들이닥치게 했더니, 선전관이 문 잠그는 것을 적간(摘奸)하려 나왔기에 앞장선 군사가 쳐서 베었다. 성중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면서 부르짖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바로 창덕궁 궐문 밖에 이르니, 이흥립이 도감(都監)의 군사를 거느리고 궐문 동구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명령을 내리기를,
“모든 군사는 반드시 나의 말머리 돌림을 보아서 활을 쏘라.”
하고, 마침내 말을 돌리지 않았으며, 이확도 후퇴하여 다리 가에 둔치고 교전하지 않았다.
박승종ㆍ이이첨 등 모든 사람이 다 비국에 모였으므로, 어떤 사람은 먼저 국청(鞫廳)을 치자고 하였으나, 반정하는 일을 빨리 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앞 군사가 곧장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니, 광해군과 세자(世子) 지(?)는 벌써 달아나 버렸다.
주상은 대비의 명을 미처 받지 못한 까닭에 다만 전폐(殿陛) 위에서 높은 의자에 앉아 모든 신하를 보았다. 이때에 폐조(廢朝)양궁(兩宮)은 모두 간 곳을 모르고 모든 적신도 미처 잡지 못했다. 도승지 이덕형(李德泂)과 보덕 윤지경(尹知敬)ㆍ주서 이행원(李行遠) 등은 입직하다가 와서 보고, 이덕형과 윤지경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여 처음에는 꼿꼿하게 서서 절하지 않다가 반정의 의거임을 안 다음에야 비로소 숙배하였다. 이 두 사람은 급박한 상황에 행하는 바에 실수가 없었으니 가상하다고 하겠다. 조금 뒤에 병조 판서 권진(權縉)과 참판 박정길(朴鼎吉)이 먼저 스스로 궐내에 들어와 그 직무를 다스렸으니, 대개 공을 세워서 죽음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시 명패(命牌)를 내어 이광정(李光庭)ㆍ이정귀(李廷龜) 등 여러 사람을 부르니, 파루(罷漏)를 칠 시각이 되었다. 이시방이 빨리 가서 자전에게 문안하기를 계청하니, 상은 김자점에게 명하여 함께 가도록 하였다.
김자점 등이 빨리 경운궁(慶運宮)에 이르러 수문장을 불러 문을 열게 하니, 유순익(柳舜翼)이 분병조 참판으로서 나와 맞이했는데, 대개 거의(擧義)하기 하루 전에 자전을 받들기 위하여 입직하게 하였던 것이다. 곧 대문에 나아가 승전 내관을 불러내어 반정한다는 뜻으로써 아뢰었다. 대비는 하교하기를,
“10년동안 유폐되어 있어도 어느 사람 하나 와서 묻는 이가 없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史官)도 없이 이같이 직접 아뢰느냐. 공주는 이미 죽어서 담밑에 묻었다.”
하고, 또 온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들이게 하였다. 김자점 등이 곧 승지 민호(閔頀)를 불러서 또 계달(啓達)하였으나 끝내 하답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이런 뜻으로써 회계하였다.
상은 공이 가서 계달하고 인해 모시고 오라고 명하므로, 공은 주상이 친히 가서 모시고 오지 않을 수 없는 뜻으로써 아뢰었는데, 어떤 사람이 저지하였다. 대개 거의(擧義)하던 초기에 공이 일을 같이 하는 사람과 더불어 최명길의 집에 모여서 모든 일을 의정할 즈음에, 공이 먼저 말하기를,
“이 일이 광명하고 정대하니 누가 감히 어길 것인가? 이흥립도 이미 동맹을 허락하였으니, 그 거의하는 날 의병으로써 궐문을 지키고 주상께서 몇 명의 의병과 이흥립의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서궁에 가서 의거를 일으킨 연유를 직접 아뢴 다음 자전을 모시고 창덕궁에 돌아와 곤극(坤極 왕후의 위)의 자리를 바르게 하고, 자전이 광해군을 불러서 수죄(數罪)하여 창읍왕(昌邑王)처럼 폐위한 뒤에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울 것이다.”
하였으나, 그때의 의논이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따르지 않았는데, 지금 또 그 의논에 저지되었다. 그래서 공은 자전을 모셔 오기 위해서 의물(儀物)을 훌륭하게 갖추고 가니, 도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성세(聖世)를 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였다. 공은 서궁으로 나아가 궐문에서 통곡하고 승전 내관을 불러 사정을 아뢴 다음 모시고 가기를 청하니, 자전은 답하기를,
“누가 이 거사를 하고 곧 받들어 가기를 청하느냐?”
하며, 도리어 진노하는 하교가 있었다. 이때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문안차 와서 아뢰었는데, 대비는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승지는 누구의 명령으로 내게 심부름을 왔는냐? 만약 그렇다면 이미 스스로 선 것인데 나를 불러서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공은 상황에 맞게 둘러대는 말로 대답하기를,
“대장으로써 명칭한 것이지, 어찌 스스로 설 리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승지란 전날 승지를 말한 것입니다.”
하니, 대비가 노여운 기색이 풀린 듯하기에, 공은 또 받들어 가기를 굳게 청하니, 답하기를,
“죄인(罪人 광해군)의 부자 및 모든 당(黨)을 다 효수(梟首)한 다음이라야 마땅히 궁을 떠날 것이다.”
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죄인 부자는 이미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니, 비록 신의 몸을 마디마디 벤다 할지라도 감히 명을 받들어 손댈 수 없으며, 이이첨의 부자와 그 무리들은 막 군사를 동원시켜 잡고 있으니, 잡아오면 마땅히 아뢰고 처치하겠습니다.”
하고, 곧 이런 뜻으로써 상에게 회계하였다.
이때에 박정길(朴鼎吉)이 병조 참판으로서 궐중에 있었는데, 상은 끌어내어 베게 하였다. 이때에 자전이 연흥부인(延興夫人)에게 문안하기 위하여 승지를 보내라고 하였는데, 공은 미처 책립되기 전에는 승지를 보낼 수 없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아뢰었다. 그러자 대비는 노여움을 풀지 않을 뿐 아니라, 미안한 하교를 많이 내렸다. 공은 부득이 아들 이시백을 보내어, 주상이 친히 와서 아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힘껏 아뢰었다. 상은 또 이정귀를 보냈는데, 자전은 분판에다 써서 내주기를,
“좋은 대궐에 앉아 제마음대로 하는데, 무엇이 불가하여 반드시 나에게 청하는냐.”
하였다. 상은 자전이 끝내 뜻을 돌리지 않을 것을 알고 날이 저무는데도 즉시 서궁으로 나아갔다. 대개 상의 뜻도 당초에는 친히 가서 모셔 오려고 하였는데, 일종의 의논에 끌려 이와 같이 된 것이다.
이때 광해군은 몸을 피해서 서민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민가에 숨었는데 고발한 자가 있었으므로, 진선문(進善門) 밖에 가두고 자전의 처치를 기다렸다. 상은 곧 가마를 뒤따르게 하고 서궁에 이르렀다. 이때 폐동궁(廢東宮)이 또 잡혀왔기에 한 곳에 유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상이 서궁에 나아간 후에도 자전은 오히려 노여움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상은 땅에 엎드려 대죄하였는데 밤이 이미 깊었다. 자전은 또 전국보(傳國寶)를 들이라고 재촉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이때에 전국보를 여주(女主)께서 장차 무엇에 쓸 것입니까? 신의 머리가 쪼개질지언정 국보는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자전은 하교하기를,
“오늘날 하는 일을 내가 미처 자세히 알지 못하니, 써서 들이라.”
하였다. 공은 김대덕(金大德)에게 붓을 잡게 하고 전말을 갖추어 써서 아뢰었다. 또 둘러대는 말로,
“도원수 한준겸이 사방의 의병을 거느리고 또한 장차 와서 모일 것입니다.”
하였다. 자전은 친히 내정에 서서 시녀를 시켜 공에게 말을 전하기를,
“대장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의심하느냐. 내가 친자식이 있느냐? 국보를 바치라고 재촉한 것은 국체(國體)를 중히 하고자 함이요, 별다른 뜻은 없소.”
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다면 정전(正殿)으로 나오셔서 주상을 책립하되 대신을 불러서 국보를 전하는 것이 예법입니다. 하필이면 국보를 빨리 들여오라 하시어 의심을 일으키십니까?”
하였다. 상하가 서로 버티어 결정을 못하는 즈음에, 상이 박홍구(朴弘?)에게 명하여 국보를 받들어 드리니, 또 계(啓) 자도 아울러 들이라고 하였다. 이때 주상이 오래도록 뜰 아래에 엎드려 있으니, 자전은 대신 및 도승지에게 명하여 주상을 받들어 들어오게 하고 비로소 책립하는 예를 행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모든 대장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모든 왕자가 들어와 뵙고자 했으나, 김자점이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어느 때라고 모든 왕자가 다 들어오려고 하시오.”
라고 휘둘러 물리쳤다. 이튿날 상은 공에게 점성 호위대장(點城扈衛大將)을 삼고, 하교하기를,
“절제(節制)의 명령대로 하지 않는 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아뢰라.”
하고, 이서ㆍ이괄ㆍ이흥립을 모두 거느리도록 하였으며, 또 공에게 이조 참판과 동지의금부사로 제수하였다. 이때에 조유도(趙有道)가 수원 부사로서 바야흐로 중요한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박승종과 이이첨의 부자는 간 곳을 알지 못하고, 박자흥(朴自興)은 경기 감사로서 양주(楊州)로 달아났으므로, 도성이 의심하고 위태롭게 여겨 인심이 정해지지 않았다. 마침 이때에 한찬남ㆍ이위경ㆍ백대형(白大珩)ㆍ정몽필(鄭夢弼) 등이 먼저 체포되었는데, 공이 명을 받들고 종루 동쪽 저자에서 베니, 온 성안이 모여 보고 기뻐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며, 혹은 칼로 그의 창자를 쪼개어 난도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이첨 부자 등 30여 인이 서로 잇달아 체포되었다. 이이첨은 형벌에 임하여 공을 우러러보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하기를,
“전일에 유순익을 통해 대감의 말을 듣고 힘껏 논의를 정지시켰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하신 것은 모두 나의 힘인데, 어찌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죽입니까?”
하였다. 공은 답하기를,
“네가 그때에 비록 논의를 정지시켰다고 하지만, 당초에 이 의논이 누구에게서 나왔느냐?”
하니, 이이첨은 머리를 숙였다. 그 아들 이대엽(李大燁) 등도 형벌에 임해서 부르짖어 말하기를,
“비록 대관(臺官)은 되었으나 실제 소(疏)에 참여하지 않았소……”
하였다.
이때 일종의 사론(士論)은 ‘우리들이 윤리를 밝히기 위해서 반정을 하였는데, 만약 좋은 벼슬을 차지한다면 이것은 공을 바라는 일이 될까 혐의스러우니, 조정 정사는 딴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앉는 것이 좋겠다.’ 했고 장유와 최명길도 그렇다고 하였다. 공은 그렇지 않음을 힘껏 말하였으나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홍구(朴弘?)와 조정(趙挺)은 그대로 정승 자리에 있었고, 권진(權縉) 역시 그대로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에 박홍구 등이 이조 판서를 추천했는데, 이광정(李光庭)이 수망(首望)으로 낙점되었다. 이날 저녁에 장차 정석(政席)에 나가려 하는데, 김자점이 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정청(庭請)하던 자가 감히 이조 판서가 될 수 있느냐?”
하니, 이광정이 피혐하므로, 공은 혼자 정석을 담당하였다. 정경세(鄭經世)를 부제학으로 삼고, 정온(鄭蘊)ㆍ김덕함(金德?)ㆍ정홍익(鄭弘翼)을 첫머리로 청선(淸選)에 제수되었다. 또 혼조(昏朝)에서 불우했던 사람으로 권도(權濤)ㆍ전식(全湜)ㆍ이준(李埈)같은 이 10여 인을 뽑아 청반(淸班)에 배치시키고, 또 절조를 세우고 이름이 드러난 선비 수십여 인을 한 책에 적어 차례를 뛰어넘어 6품으로 올리기를 아뢰어 빈 수령 자리가 있으면 즉시 메워 보냈는데, 조경(趙絅)ㆍ홍무적(洪茂績)ㆍ김효성(金孝誠)ㆍ이유겸(李有謙)ㆍ윤선도(尹善道)ㆍ조직(趙?) 등이 또한 그들이었다. .......
.......이하 후략..............
▣ 김윤식 - 태서 아저씨 아직 안 주무시나요? 귀한 자료가 봇물을 이루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묵재일기 에 대한 간단 소개 부탁드립니다. ▣ 솔내영환 - 아하!! 이런 귀중한 기록이 있었군요 ▣ 김윤만 - 묵재라하면 어느 분을 말함인가요? ▣ 김항용 - 충무공 김시민의 부친이신 구암 김충갑의 고모부도 호가 묵재이나 생존 연대가 다르군요. * 묵재-이문건(李文楗) : 1494(성종 25)∼1567(명종 22).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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