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역사속으로...(김자점).묵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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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14 17:41 조회1,512회 댓글0건본문
묵재일기 해제
이 《묵재일기(黙齋日記)》는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이 묵재 이귀(李貴)의 사실을 보고 들은 그대로 적은 것인데, 모두가 세 권으로 엮어졌다. 첫째 권은 〈평거언행(平居言行)〉ㆍ〈반정시사(反正時事)〉ㆍ〈치역논변(治逆論辨)〉 세 편, 둘째 권은 〈추숭논변(追崇論辨)〉ㆍ〈편당논변(偏黨論辨)〉두 편, 셋째 권은 〈강화논변(講和論辨)〉ㆍ〈비어논변(備禦論辨)〉두 편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권의 〈평거언행〉은, 선조(宣祖) 8년(1575) 을해년에 조정 당론이 동ㆍ서(東西)로 갈라진 이후부터 인조(仁祖) 1년(1623) 계해년에 반정을 일으킨 사실에 이르기까지 묵재의 말과 행동 중 국가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소상히 적었으며, 다음으로 〈반정시사〉와 〈치역논변〉은, 광해군이 폐모한 이유로 묵재가 인조를 추대하여 반정을 일으킨 내용과 반정 이후에도 폐인 지(祬 광해군의 아들)ㆍ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 같은 반역자가 생기고 또 호병(胡兵)의 난(亂)이 잇달아 일어났을 때에 묵재가 다방면으로 적절히 조처했다는 점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둘째 권의 〈추숭논변〉은, 원종 추숭(元宗追崇)에 대해 묵재가 박지계(朴知誡)의 상소를 중심으로 하여 온 조정 의논을 물리치고 인조에게 적극 찬동했던 사실을 그대로 적었고, 또 〈편당논변〉은, 인조가 반정한 후에 왕정(王政)의 급선무는 당(黨)에 치우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묵재가 힘껏 동조하여, 그의 스승 이율곡(李栗谷)이 쓰던 조정책(調停策)을 끝내 주장했다는 의논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셋째 권의 〈강화논변〉은, 인조 5년(1627) 정묘년에 호병(胡兵)의 난으로 대가(大駕)가 강도(江都)까지 파천했을 때에 묵재가 척화론을 떠나 강화론(講和論)을 내세웠던 사실을 열거했고, 다음으로〈비어논변〉은, 계해년 인조 반정 초기부터 계유년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의 13년 동안, 나라를 위해 방어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던 것을 모두 발취하여 자세히 수록하였다.
이 글은 다만 묵재 한 개인의 언행과 실제를 적은 것이지만, 여러 가지 관련된 점으로 보아 당시의 정치와 풍토도 짐작할 수 있고 역사로서 탐구할 만한 자료도 될 수 있다 하겠다.
묵재의 경력을 대충 소개하면, 성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자는 옥여(玉汝), 귀(貴)는 그의 이름이며 묵재는 호이다. 명종(明宗) 12년(1557) 정사년에 탄생하여 77세를 일기로 인조 11년(1633) 계유년에 서거하였다. 이율곡의 문인으로서 생원을 거쳐 문과에 합격, 현감ㆍ목사ㆍ부사ㆍ호위대장(扈衛大將) 등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작되고, 대사헌ㆍ우참찬ㆍ좌찬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그리고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은 죽산(竹山)이 본관이며 자는 사언(士彦), 은봉은 호인데, 일찍이 정포은(鄭圃隱)과 조중봉(趙重峯)을 가장 숭배하여 이들의 호에서 한 자씩 빌려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으로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등용되어 지평ㆍ장령ㆍ공조 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저서는 《은봉전서(隱峯全書)》가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 글 외에도 《삼원기사(三寃記事)》ㆍ《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등이 있다.
김철희(金喆熙) 씀
▣ 솔내영환 -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묵재일기(古書本)는 우리집에도 전해져온것이 보관되 있군요. ▣ 김윤만 - 묵재가 반정일등공신 이귀이군요. ▣ 김항용 - 아하 ▣ 김태영 - 제가 소장하고 있는 묵재일기는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의 것으로...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태영, 태서 두 분 아저씨 연일 계속되는 노고 감사합니다.
이 《묵재일기(黙齋日記)》는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이 묵재 이귀(李貴)의 사실을 보고 들은 그대로 적은 것인데, 모두가 세 권으로 엮어졌다. 첫째 권은 〈평거언행(平居言行)〉ㆍ〈반정시사(反正時事)〉ㆍ〈치역논변(治逆論辨)〉 세 편, 둘째 권은 〈추숭논변(追崇論辨)〉ㆍ〈편당논변(偏黨論辨)〉두 편, 셋째 권은 〈강화논변(講和論辨)〉ㆍ〈비어논변(備禦論辨)〉두 편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권의 〈평거언행〉은, 선조(宣祖) 8년(1575) 을해년에 조정 당론이 동ㆍ서(東西)로 갈라진 이후부터 인조(仁祖) 1년(1623) 계해년에 반정을 일으킨 사실에 이르기까지 묵재의 말과 행동 중 국가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소상히 적었으며, 다음으로 〈반정시사〉와 〈치역논변〉은, 광해군이 폐모한 이유로 묵재가 인조를 추대하여 반정을 일으킨 내용과 반정 이후에도 폐인 지(祬 광해군의 아들)ㆍ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 같은 반역자가 생기고 또 호병(胡兵)의 난(亂)이 잇달아 일어났을 때에 묵재가 다방면으로 적절히 조처했다는 점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둘째 권의 〈추숭논변〉은, 원종 추숭(元宗追崇)에 대해 묵재가 박지계(朴知誡)의 상소를 중심으로 하여 온 조정 의논을 물리치고 인조에게 적극 찬동했던 사실을 그대로 적었고, 또 〈편당논변〉은, 인조가 반정한 후에 왕정(王政)의 급선무는 당(黨)에 치우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묵재가 힘껏 동조하여, 그의 스승 이율곡(李栗谷)이 쓰던 조정책(調停策)을 끝내 주장했다는 의논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셋째 권의 〈강화논변〉은, 인조 5년(1627) 정묘년에 호병(胡兵)의 난으로 대가(大駕)가 강도(江都)까지 파천했을 때에 묵재가 척화론을 떠나 강화론(講和論)을 내세웠던 사실을 열거했고, 다음으로〈비어논변〉은, 계해년 인조 반정 초기부터 계유년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의 13년 동안, 나라를 위해 방어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던 것을 모두 발취하여 자세히 수록하였다.
이 글은 다만 묵재 한 개인의 언행과 실제를 적은 것이지만, 여러 가지 관련된 점으로 보아 당시의 정치와 풍토도 짐작할 수 있고 역사로서 탐구할 만한 자료도 될 수 있다 하겠다.
묵재의 경력을 대충 소개하면, 성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자는 옥여(玉汝), 귀(貴)는 그의 이름이며 묵재는 호이다. 명종(明宗) 12년(1557) 정사년에 탄생하여 77세를 일기로 인조 11년(1633) 계유년에 서거하였다. 이율곡의 문인으로서 생원을 거쳐 문과에 합격, 현감ㆍ목사ㆍ부사ㆍ호위대장(扈衛大將) 등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작되고, 대사헌ㆍ우참찬ㆍ좌찬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그리고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은 죽산(竹山)이 본관이며 자는 사언(士彦), 은봉은 호인데, 일찍이 정포은(鄭圃隱)과 조중봉(趙重峯)을 가장 숭배하여 이들의 호에서 한 자씩 빌려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으로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등용되어 지평ㆍ장령ㆍ공조 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저서는 《은봉전서(隱峯全書)》가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 글 외에도 《삼원기사(三寃記事)》ㆍ《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등이 있다.
김철희(金喆熙) 씀
▣ 솔내영환 -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묵재일기(古書本)는 우리집에도 전해져온것이 보관되 있군요. ▣ 김윤만 - 묵재가 반정일등공신 이귀이군요. ▣ 김항용 - 아하 ▣ 김태영 - 제가 소장하고 있는 묵재일기는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의 것으로...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태영, 태서 두 분 아저씨 연일 계속되는 노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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