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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5)-金時讓편(번역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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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5-16 20:04 조회1,4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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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5)>-김시양편(번역문1)



  지금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인 김휘(金徽)씨가 기절( 節: 감사의 지휘 깃발)로 조정(朝廷)에 인사하러 지나가는 길에 불초(不肖)한 본인 경(絅)을 용담(龍潭)가로 찾아와, 전임 돌아가신 대부(大夫)의 벼슬한 내력과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을 저에게 주며 말하기를, "돌아가신 분의 묘에 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나 지금까지 아름다운 제사돌을 뚜렷이 새기지 못하였사오니, 원컨대 집사(執事: 13,4세 더 되는 이에 대한 존칭)께서는 불초(不肖)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관대히 여겨 주소서. 저의 돌아가신 군자를 은혜로써 빛내주지 않으시면 저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저는 예로써 사양하기를, "저는 정신이 삭아지고 머리털이 누렇게 되었습니다. 어찌 필연(筆硯: 붓과 벼루)을 다스릴 시절이라 하오리까? 돌아보건대, 공(公)은 나와 세대를 같이 하면서,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을 밝히고 사(私)를 억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나라를 위한 책임을 맡음에 있어서는 억울하게 죽음에 이르더라도 약해지지 않으신 분은 오직 먼저 가신 상공(相公) 한 분 뿐이셨습니다. 불두불결(佛頭不潔)의 꾸짖음을 근심하여 관찰사(觀察使)공(公)이 어버이를 현창(顯彰)하려는 성의와 평생토록 뭇 사람에게 읽히게 하려는 뜻을 막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행장(行狀)을 살피건대 공(公)의 휘(諱)는 시양(時讓)이요, 자(字)는 자중(子中)이다. 처음의 이름은 시언(時言)인데, 중년(中年)의 혐의(試題사건으로 鐘城과 寧海에 유배된 일)를 피해야 했기에 이름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호(號)는 하담(荷潭)이다. 그 선조는 신라왕의 후예이다. 휘(諱) 방경(方慶)이 있는데,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장수와 재상으로 드나들었고, 큰 공과 높은 절의(絶義)는 이하(夷夏: 우리 나라와 중국)에 떨쳐 빛났으며,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그 후 그 자손 중, 10의8·9를 찾아보면 상락(上洛: 安東)에 본을 두고 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말한다면, 좌사간(左司諫) 고(顧)는 감찰(監察) 맹렴(孟廉)을 두고, 감찰이 전농(典農) 철균(哲鈞)을 두고, 전농(典農)이 사의(司儀) 수형(壽亨)을 두고, 사의가 증참판(贈參判) 언묵(彦默)을 두고, 참판이 진사(進士) 석(錫)을 두었는데, 이 분은 외종 기복재(奇服齋)의 기이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은거(隱居)하다가 세상을 마치셨으니, 이 분이 공의 황고(皇考: 先考의 尊稱)를 낳았다. 황고(皇考)의 휘(諱)는 인갑(仁甲)인데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증좌찬성(贈左贊成)이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원주에서 절사(節死)한 제갑(悌甲)의 아우이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서윤(庶尹) 이곤(以坤)의 따님이다.    



   (계속)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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