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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7)-金時讓편(번역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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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5-21 23:40 조회1,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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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묘년(丁卯年: 1627)에 조정과 청(淸)이 조약하여 여러 도에 군병을 없애게 되었는데, 갑자기 급보에 이르기를, "적이 우리의 팔장(八將)을 잡아갔으니 여러 도의 군병을 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총융사(總戎使) 이서(李曙)가 원수(元帥)와 함께 한 장계(狀啓)였다. 공이 마침 호조사(號召使) 정우복(鄭愚伏: 鄭經世. 1563-1633. 학자. 字는 景任. 호는 愚伏) 선생과 함창(咸昌)에서 만날 때인데, 공은 "이 보고는 거짓말이라."하고는 덮어두고 발표하지 않았다. 우복(愚伏)이 이를 미심쩍어 했는데 그 후에 들으니 과연 이(李)의 보고는 거짓이었다.



 을사년(乙巳年: 1629) 정월에 용후(龍喉)에서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平安道 觀察使 兼 體察副使)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평양(平壤)에 도착한 지 며칠만에 변방 아전의 급보가 있었는데, "금병(金兵) 수 천 명이 강을 건너온다."는 것이었다. 공(公)은 "이것은 반드시 금인(金人)이 한인(漢人)을 쫓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큰소리로 떠들썩하게 위에서 듣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 후 금인(金人)이 선천(宣川), 철산(鐵山) 지방을 돌다가 우리 백성을 한 사람도 데려 가지 않고 돌아갔다. 이 때를 당하여 관서(關西)에서는 왼쪽에서는 모문룡(毛文龍)을 접촉하고, 오른쪽에서는 금인(金人)을 대접하면서 그 변화의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였다. 공(公)은 그 정세(情勢)를 자세히 살피고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그것을 알아 맞췄다. 모장(毛將)도 그 기교를 부리지 못하고, 금인(金人)도 역시 시일을 질질 끄는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름 4월에 모장(毛將)이 장차 군문(軍門) 원숭환(袁崇煥: 당시 明의 遼東經略)을 영원(寧遠: 지금의 중국 遼寧省 興城市)에서 군사회담을 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공(公에)게 명하여 섬 안(:  島를 지칭)에 가서 전별하라고 하였다. 공(公)이 접반사(接伴使) 홍착(洪)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모장(毛將)이 이번에 가면 반드시 못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그 후 몇 개월 뒤에 선천(宣川)지방의 보고에, "몇 일 날 군문(軍門: 遼東經略 袁崇煥)이 죄를 선언하며 모장(毛將)을 베었다."고 하였다. 공(公)은 정치(政治)하기를 남(南)에서 시작하여 서(西)에서 마칠 때까지 그 충성(忠誠)을 다하고 지략(智略)을 쌓아 멀리 보는 계책을 도모(圖謀)하였고, 증거를 붙잡는 것과 같은 것은 영남(嶺南)에서 뛰어났다. 공(公)이 오랑캐를 근심한 것이 아마 계해년(癸亥年: 1611) 조천(朝天: 중국 황제를 뵈는 것)하던 날부터였던 것 같다.



 경오년(庚午年: 1630)에 가도( 島)의 졸(卒) 흥치(興治) 적(賊)이 총병(摠兵) 진계성(陳繼盛)을 죽였다. 공이 상소(上疏)하기를, "흥치(興治)는 우리나라 영토에 끼어들어 조천(朝天: 명나라) 대장(大將)을 제멋대로 살해한 자이므로 의리로써 이를 치지 않을 수 없으니 토벌을 청합니다."고 하자, 상감께서는 이서(李曙)와 정충신(鄭忠信)을 장수로 삼아 함대(艦隊)를 통솔하고, 보병으로는 충신(忠信)으로 하여금 치도록 하였는데, 이들이 출정인사를 드릴 때 군사가 적음을 걱정하니 임금은 말하기를 "감사(監司) 김모(金某)는 지략이 충분하여 많은 계산을 했을 것이므로 나는 서쪽은 근심하지 않노라."고 하였다. 이때 조정의 신하 대개가 흥치(興治)의 반란을 우리와 관계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채찍이 비록 길다 해도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함을(역량이 미치지 못 함을) 어찌 하리요. 오직 승평(昇平)한 모습이 되려면 공(公)의 계책일 뿐이었거늘 공이 또 말하되 "노(奴: 金人)가 중국을 어지럽히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한번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가도( 島)를 관(官)이 지키는 지 자주 물었습니다. 지금 만약 흥치(興治)를 도적이라 이름하여 치는 것은 다만 나의 허물을 긁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조천(朝天: 명나라)에서 들으면 반드시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거사라고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며, 충의의 소리가 천하에 은은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상감께서 크게 감동하여 듣고 반드시 공(公)의 말을 쓰고자 하였으나, 원훈(元勳)으로 걸출한 자도 겨우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자가 많았다. 흥치(興治) 역시 듣고 공에게 체념하였지만, 공이 서문(西門: 평안도의 뜻. 이때 김시양(金時讓)은 평안감사(平安監司) 겸 체찰부사(兼 體察副使)였다. 를 떠났으나 반군(叛軍)을 치려는 군사는 드디어 위축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 봄에 특명으로 상감을 대하였는데, 흥치(興治)의 일을 공에게 물으므로 공은 극진히 적의 궁한 것을 다 아뢰며, "금인(金人)에게 투항(投降)하지 않으면 갈 땅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어떤 대신이 나와서 이해(利害)를 비교하며 말하였지만 공이 즉시 조금도 굴함이 없자 어찌 할 수 없었다. 흥치(興治)가 과연 노(奴)에게 투항(投降)했으나 심세괴(沈世魁)·장도(張燾) 등이 모의하여 그를 베어 죽였다. 갑자기 명(明)의 병부(兵部)로부터 공문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흥치(興治)가 가도( 島)를 거점으로 반했는데 여태까지 귀국(貴國)의 일을 맡은 신하가 충성과 용기를 꾀하지 못했다면 제·노(齊·魯: 齊는 큰 나라이고 魯는 작은 나라로 明과 朝鮮을 뜻함)의 국경(國境)이 조금도 마르고 깨끗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하며 크게 표창하자, 임금이 이 공문(公文)을 내려 여러 재상에게 두루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땀을 흘리었다. 여름 4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홍주(李弘胄)가 면직(免職)하니 상감께서 특명으로 공을 발탁하여 대리하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계속>


▣ 솔내 -
▣ 김윤만 -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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