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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재신 임경숙 채송년 김창 조돈 추밀원사 최인 마제(除宰臣任景肅蔡松年金敞趙敦樞密院使崔璘麻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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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22 22:47 조회1,9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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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재신 임경숙 채송년 김창 조돈 추밀원사 최인 마제(除宰臣任景肅蔡松年金敞趙敦樞密院使崔璘麻制) 
 
   
하천단(河千旦)

재상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공으로만 하여 사를 잊는 것이요, 임금은 덕을 높이고 공을 갚아야 하므로 예로써 신하를 대우하는 것이다. 짐은 스스로 못난 줄을 아는데, 어진 이가 아니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겠는가. 마땅히 그 오래 벼슬한 사람을 임용하여, 새 도읍주D-001에서 천명을 길게 하려 한다. 이에 감히 위대한 인재를 추천하여 밝은 조정에 고하노라.
구관(具官) 임경숙(任景肅)은 벽수(壁宿)의 동쪽 정기주D-002요, 은황(銀潢)의 왼쪽 물결주D-003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왕의 원구(元舅)가 되어 삼한(三韓)의 울타리가 되었으며, 너의 아버지도 또 세상의 종신(宗臣)으로 백관의 모범이 되었다. 일찍이 집안의 적선한 경사를 이어 받아서, 고관의 반열에서 드날리었다. 두 고을에서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다 소두(召杜)의 부모주D-004라 했고, 한 지방에서 관리들을 규찰할 때에는 능히 옳고 그름을 가려냈다. 서액(西掖 중서성)에서 태(苔)를 음(吟)하고, 북문(北門 한림(翰林))에서 시초(示草)하기에 이르렀다. 평생 비답과 조칙을 맡은 손은 얼마나 윤음을 지었으며, 매 편마다 정직한 말이 나타났으니, 실로 임금을 잘 보좌한 것이었다. 한 번 초빈(初賓)의 길주D-005을 열고 나니 향곡(鄕曲)에서 선비들이 뽑혀 올라왔고, 두 번이나 고시(考試)의 문을 열었더니 구원(丘園)에서 선비들이 달려나왔다. 일을 당하면 터럭 한 올까지 세밀히 분석하였고, 사람을 대하면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대신(大臣)의 절도를 알고 있었으니, 어느 자리에 간들 맞지 않겠으며, 자기 몸을 낮추어 군자(君子)의 겸손한 덕을 길렀으니, 항상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할까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어렵고 위태로운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바루어 주고 구제해 준 힘이 가장 많았다. 아직 비가 오는 철이 되기 전에 일찍이 주공단(周公旦)의 집을 수리함을 힘입었으며, 큰 시내를 건너려 할 때에는 모름지기 부열(傅說)에게 명하여 돛대가 되게 하듯이 하였다.주D-006 드디어 벼슬이 추밀원(樞密院)으로 영전하였다가, 또 정당(政堂)의 높은 자리로 전임하였다. 덕망은 만백성이 목을 늘이고서 바라는 바였고, 재명(才名)은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기울이게 하였다. 돌아다보건대, 조정에서 도를 논하고 나라 일을 경륜하는 이는 모두가 훌륭한 인재이지만, 그 중에 인척으로서 나라와 더불어 혈맥을 같이한 이는 몇 사람이나 있는가. 어찌 임금을 잘 만나서 그런 것이겠는가. 진실로 나라에 대한 걱정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정(大政)에 참여하게 해서 특수한 은혜를 곡진히 보이며 수국사(修國史)의 소임을 겸하게 하기도 하고, 수문전(修文殿) 태학사(大學士)의 직도 띠게 하며, 사부(祠部 예부)에서 예문도 짓고, 동궁(東宮)에서 사도(師道)를 엄히 하게도 한다. 이에 특별히 참지정사 수문전 태학사 수국사 판례부사 태자태보(?知政事修文殿大學士修國史判禮部事太子太保)에 제수하고, 나머지 벼슬은 그전대로 가지게 한다.
구관(具官) 채송년(蔡松年)은 간담이 몸보다도 크고, 정신이 뱃속에 가득히 찼다. 오상(五常)으로 체(?)가 되었으니 어찌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만 갖추었겠는가. 모든 재예(才藝)가 한 몸에 다 있어서 거문고 타기, 바둑 두기, 활쏘기, 말 달리기, 글씨 쓰기 등의 모든 재주를 한몸에 갖추었다. 금중(禁中)의 의장(儀仗)에 참여했을 때부터 항상 나의 몸을 가까이에서 모시었다. 일찍이 홍곡(鴻鵠)이 높이 천 리를 날 적에 경이 함께 출입하는 모습이 서 있는 고니와 같았고,주D-007 용(龍)이 구오(九五)에 날 적에 또한 경이 잘 받들어서 용을 따랐다. 대궐에서 숙위하면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절개가 한결 같았다. 웅걸찬 모습을 보니 옥수(玉樹)가 바람을 맞아 한들거리는 것 같았고, 그로 인해 낭묘(廊廟)의 재목인 줄 알고서 이름을 써놓고 금사발로 서안(書案)을 덮었다.주D-008 관등(官等)을 건너뛰어 자문지유(紫門指諭)를 제수하였고, 특별한 비지(批旨)로서 흑삭장군(黑?將軍)의 벼슬을 더하였다. 인주(麟州)에 가서 성을 지킬 때는 만금을 초개같이 여겨서, 지금까지도 변방의 백성들은 천고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 한다. 나의 은총으로 대장(大將)의 단에 오르게 해서 군부의 일을 통제하게 했더니, 저 오랑캐들이 듣고서 낙담하여 붉은 수염의 노인네와는 싸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청(靑)□을 내리고 다시 황월(黃鉞)을 휘두르게 했더니, 오랑캐들이 남쪽으로 말을 먹이러 오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게 되었다. 어려운 때에 나를 잘 호위해 주었으니, 마땅히 조아(爪牙)의 직임을 전적으로 맡길 것이며, 짐의 일이 되기를 구하는 데는 후설(喉舌)의 권한을 겸하게 하는 것이 옳다. 밀지(密地)에 빛이 더하고, 헌대(憲臺)의 중책을 맡겼다. 보는 자는 다 어진 대부라고 말하고, 나는 우뚝한 참 재상임을 사랑한다. 이러므로 정리(政理)에 참여하게 하여, 그 벼슬과 자급을 높여 준다. 춘궁(春宮)의 스승이 되게 하여 태자를 잘 지도하게 하고, 호부(戶部)의 일을 주관하게 하여 백성의 일을 가벼이 하지 말게 한다. 짐의 명을 공경히 받고 관잠(官箴)에 삼가 복종하라. 이에 특별히 참지정사 판호부사 태자소부(?知政事判戶部事太子少傅)를 제수하고, 다른 벼슬은 그전대로 가지게 한다.
구관(具官) 김창(金敞)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詩)ㆍ서(書)ㆍ예(禮)의 아언(雅言)을 들었으며, 머리털을 맺은 뒤로부터 기국과 학식과 덕행의 대체(大體)를 가졌다. 높은 이름을 일찍이 앵방(鶯榜)에서 드날렸고, 두터운 덕망은 우리 나라에 높았다. 그러므로 원로대신이 추천하니 큰 소임을 맡게 함이 가하다. 긴 날개를 밀어 올려서 활짝 트인 큰 길에 날게 한다. 학(鶴)을 타고 양주(楊州)로 올라가서는 만전(萬錢)을 허리에 차지 않고 왔고,(주D-009)총마(?馬)를 타고 백서(柏署)에 들어가니 여러 벼슬아치들이 눈을 바로보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홍약(紅藥)의 섬돌에 올라서서는 여러 번 청포(靑蒲)의 자리에 엎드렸다.(주D-010) 윤음을 초할 즈음에는 다 입으로 봉황을 토한 것이었고,(주D-011) 인물을 감식할 즈음에는 눈에 온전한 소가 없었다.(주D-012 )도가니와 망치를 손에 맡겨 도균(陶鈞)의 솜씨를 시험했더니,(주D-013 )마음이 저울같이 공평하여 털끝만한 사심(私心)도 용납되지 않았다. 경이 천(天)ㆍ지(地)ㆍ인(人)의 이치를 통한 참다운 선비임을 알았으므로, 경으로 하여금 문(文)ㆍ무(武)ㆍ가(吏)의 선임을 맡아보게 하였다. 삼전(三銓)을 장악하여 사과예(四科藝)를 고사하는데, 밝은 거울로 만물의 형체를 비치는 것 같았다. 과거 시험장에서 선비를 뽑아낸 것이 비록 두 번이나, 훌륭한 인재를 뽑은 것은 만 명을 헤아리겠다. 네가 네 공을 자랑하지 아니하나 천하 사람이 너와 다툴 이 없으며, 짐이 이미 아는 바로 인간 세상에서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부지런한 공이 이미 천고에 짝이 없으니, 포상을 어찌 보통 예로써 논할 수 있겠는가. 태학사(大學士)로 관직과 자급을 높여 주고, 상서(尙書)로서의 칼과 신을 은총으로 준다.(주D-014) 그러나 민심은 아직도 부족하게 여기고 있고, 짐의 마음에도 만족하지 아니하다. 그래서 전의 은청(銀靑)을 새로이 금자(金紫)로 바꾸어 준다.(주D-015 )중추부에 앉았던 자리가 따뜻하기도 전에 중서성으로 제수하는 교서를 내렸다. 정당(政堂)에서 집현전(集賢殿) 직책을 겸하게 한 것은 중서성의 큰 정무를 처결하라는 것이요, 사공(司空)에서 복야(僕射)의 벼슬을 띠게 하는 것은 외성(外省)의 풍기를 맑게 하려는 것이다. 삼선(三善)을 지도하여 더욱 빛나게 하고, 구공(九工)을 주관하여 수리하는 일을 맡게 한다. 짐이 너에게 고하는 것을 듣고 끝까지 삼가하여 처음같이 하라. 이에 특별히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정당문학 상서좌복야 집현전태학사 판공부사 태자소보(金紫光祿大夫守司空政堂文學尙書左僕射集賢殿大學士判工部事太子少保)로 제수하노라.
구관(具官) 조돈(趙敦)은 높은 산과 큰 물의 영기를 받았고, 옥같은 자질을 타고났다. 이마 위에는 사람을 살려낼 관상이 있고, 가슴 속에는 세상을 건져낼 모책을 품었다. 아버지의 유풍을 이어서 사랑스럽고 두려움이 겨울해와 여름해를 겸하였으며, 처음의 음직(?職)을 바꾸어서 관작은 산동(山東)과 산서(山西)를 다 지냈다.주D-016 그로 인하여 알관(?冠)을 쓰고서 임금을 곁에서 가까이 모셨다. 여러 해를 경위(警衛)하여 고아를 거느리고 우림(羽林)에서 훈련하였고,주D-017 반년 동안에 뛰어올라서 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변방에서 수자리를 살았다. 이 때 강한 외적들이 우리 양민을 몰아서 대군(大軍)이 휩쓸고 내려오니 여러 성이 다 항복했다. 그런데, 너는 단기(單騎)로 포위를 뚫고 나왔으니, 그 사세가 가련하였다.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역시 나라의 복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일 좋아하는 자들은 더러 뒷공론이 있었으나, 훗날에 이르러서 경이 또한 잘한 것을 다 알았다. 이에 옛날 벼슬에 다시 불러 올리고, 크게 좋은 계책을 발휘하게 하노라. 소나무는 눈을 견디어야만 다시 무성해지고, 옥은 뜨거운 불을 겪어야만 더욱 참옥이 되는 것이다. 조(趙) 나라에 염파(廉頗)가 있으매 강한 진(秦) 나라에서 감히 덤비지 못하여 위엄이 적국(敵國)에 떨쳤고, 한(漢) 나라에 한신(韓信)이 아니면 일을 계획할 수 없어 장수의 단에 오르게 하는 은총을 내렸다. 변방과 조정에 드나들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하였다. 드디어 우할(右轄) 자리에 벼슬을 올렸다가 조금 뒤에 중추부로 옮겼다. 예조에서 세 번이나 예를 맡으니 누가 쥐가 껍질이 있다는 시(詩)주D-018로써 속였겠는가. 금부(金府)에서 한 번 형벌을 맡으니 참새가 뿔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주D-019 벼슬을 두루 겪은 업적이 있으니 섭리(燮理)하는 직책에 있을 만하다. 높은 품계에 올리고 중요한 자리를 더한다. 문하성의 일을 보게 하고 성중(省中)의 모의(謀議)에 참여하게 한다. 큰 강령을 들게 하여 이전(吏銓)의 직책을 제수하고 여러 사무를 다 고르게 하여 사액(使額)의 일주D-020까지 겸하여 주관 하게 한다. 이에 특별히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이부상서 판삼사사(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吏部尙書判三司事)로 제수한다.
구관(具官) 최인(崔璘)은 덕의가 있는 가문 출신이며 공후(公侯)의 혈통을 타고났다. 나면서부터 담이 크므로 호랑이가 나서 사흘 만에 소잡아 먹을 생각을 하는 것과 같았고, 찬란하게 문채가 있어 봉의 새끼에게 아홉 가지 채색이 있는 봉의 모습이 있는 것과 같았다. 태자(太子)의 우익이 되었을 때에는 사해(四海)에서 홍곡(鴻鵠)이 높이 난다고 노래하였고, 금림(禁林)에 마음대로 드나들 때는 여러 어진 사람이 제비와 참새가 서로 따라다니듯 하였다. 참으로 동량(棟樑)의 큰 재목으로 경륜(經綸)의 대체를 갖추었다. 이 사람을 정승으로 삼으려고 먼저 수령으로 제수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시험하였다. 장단(長湍)에서 쌍오리 신을 신었을 때주D-021는 사나운 범이 강을 건너갔고,주D-022 제주(濟州)에서 오마(五馬)를 탔던 때주D-023는 갔던 구슬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주D-024 일찍이 김해(金海)에서 금을 사양하니 청백하면서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고,주D-025금성(錦城)에서 비단을 재단할 제주D-026 계책이 도적들을 진정시켰다. 이 큰 공적을 아름답게 여겨 아경(亞卿)으로 뽑아 올렸다. 용(龍)아, 너를 시켜 명을 출납하라 하였고주D-027, 호(虎)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여주D-028 왕의 아름다운 명령을 천하에 선양하였다. 또 문형(文衡)을 제수하여 인재를 뽑아내게 하였다. 대국(大國)에서 나를 책하기를 친히 와서 뵈오라 하므로, 조정에서는 종자(宗子)를 가려서 대신 보내기로 하였다. 사신으로 갈 만한 자가 누구냐고 하니 여러 사람이 경이라야 될 것이라 하였다. 사직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서 자기 몸은 잊고, 만 리의 먼 곳에 들어가서 여의(如意)하여 두 나라가 한 집처럼 되는 조약(條約)을 허락받았다. 저 사람들이 경을 신뢰하기 때문인 것이지, 어찌 내가 경에게 직임을 맡겨서랴. 두 번이나 폐백을 받들고 가서 군사를 물리쳐서 큰 공이 세상을 덮었다. 대려(帶礪)의 맹세를 해야 마땅하겠기에 곧 재상의 지위에 올리는 은총을 내렸다. 이는 황각(黃閣)의 바람을 드날리어 청운(靑雲)의 길을 마음대로 걸어가게 한 것이다. 이에 추밀원(樞密院)의 요긴한 지위에 두고 백서(栢署)의 강기(綱紀)를 잡아 쥐게 하였다. 만선(萬選)의 영광으로 태자의 덕을 돕게 하노라. 다시 충절을 다하여 큰 터전을 세우는 데 도우라. 이에 특별히 추밀원사 어사대부 태자빈객(樞密院使御史大夫太子賓客)에 제수하고 그 외의 벼슬은 다 전과 같이 가지게 한다.
아, 위와 아래가 화목하면 태(泰)가 오고 비(否)가 갈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림을 이룩하기 위하여 짐이 장차 서로 논의하겠으니, 명령을 듣고는 더욱 공손하여 경도 또한 보필에 힘쓰라.
 
   
[주 D-001] 새 도읍 : 강화(江華)에 새로 도읍을 옮겼을 때이다.
[주 D-002] 벽수(壁宿)의 동쪽 정기 : 벽(壁)은 하늘 위에 있는 별 이름이다. 《진서(晋書)》 천문지(天文志)에 의하면, “이 별은 동쪽에 있으므로 동벽(東壁)이라고 하고 문서(文書)를 맡은 별이다.” 여기서는 한림원을 뜻한다.
[주 D-003] 은황(銀潢)의 왼쪽 물결 : 은황은 은하수인데, 왕족을 형용하기도 한다. 왼쪽이 길사(吉事)의 뜻이므로, 은황의 왼쪽 물결이라 하면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주 D-004] 소두(召杜)의 부모 : 한(漢) 나라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 두 사람이 다 남양태수(南陽太守)를 지내서 정사를 잘 하였으므로, 남양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앞에는 소씨 아버지가 왔고[前有召父], 뒤에는 두씨 어머니가 왔다[後有杜母].” 하였다. 후세에 선정(善政)의 고사는 “소두(召杜)의 부모”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주 D-005] 초빈(初賓)의 길 : 빈(賓)이란, 주(周) 나라 제도에 의하여 훌륭한 인재를 채용할 적에, 학교에서 생도 중의 수재를 뽑아서 향음주례(鄕飮酒禮)로써 빈례(賓禮)로 대우하여 천거하는 법이다. 초빈지로(初賓之路)라 하면 처음 이 빈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말이다.
[주 D-006] 큰 시내를 건너려 할 때에는 모름지기 부열(傅說)에게 명하여 돛대가 되게 하듯이 하였다. : 《서경》을 보면,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만약 큰 시내를 건너려면 너를 시켜서 배와 돛대의 일을 하게 한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라는 말이 있다. 즉, 제왕을 보좌하는 신하를 비유한 것이다.
[주 D-007] 일찍이 홍곡(鴻鵠)이 높이 천 리를 날 적에 경이 함께 출입하는 모습이 서 있는 고니와 같았고, : 한(漢)나라 고제(高帝)가 태자를 바꾸려 하다가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초청을 받아와서 태자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는 태자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노래하기를, “홍곡(鴻鵠)이 높이 날아 한 번에 천리를 나네.” 하였다.
[주 D-008] 이름을 써놓고 금사발로 서안(書案)을 덮었다. : 당 현종(唐玄宗)이 정승을 새로 내려고 그 후보자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책상 위에 놓았더니, 마침 태자가 들어오므로 옆에 있던 금사발로 그 이름을 덮고 알아맞추어 보라 하였더니 과연 알아맞쳤다.
[주 D-009] 학(鶴)을 타고 양주(楊州)로 올라가서는 만전(萬錢)을 허리에 차지 않고 왔고, : 고을 수령으로 나가서 청렴한 정사를 폈다는 말이다. 옛날에 네 사람이 각각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학을 타고 신선되기를 원하고, 한 사람은 십 만관을 원하며, 한 사람은 양주 자사를 원하고, 한 사람은 허리에 십만 관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로 올라가겠다.” 하였다.
[주 D-010] 여러 번 청포(靑蒲)의 자리에 엎드렸다. : 푸른 부들[蒲]로 만든 자리는 천자가 깔고 앉는 자리라 한다. 한(漢)나라 사단(史丹)이 청포석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는 말을 올렸다 한다. 청포는 천자의 자리로서 황후 이외에는 그 자리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주 D-011] 윤음을 초할 즈음에는 다 입으로 봉황을 토한 것이었고, : 양웅(楊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에 꿈에 봉황을 입에서 토하여 날아나오는 것을 보았다 한다. 명문가(名文家)를 뜻한다.
[주 D-012] 인물을 감식할 즈음에는 눈에 온전한 소가 없었다. : 감식안이 아주 뛰어난 것을 말한다 《장자》에 포정(?丁)이라는 소잡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보는 것이 모두 소 아닌 것이 없더니, 3년을 지난 뒤에는 아직 완전한 소를 보지 못했다.” 하였다. 그것은 소잡는 기술이 숙달하여 소를 보면 뼈나 힘줄들이 낱낱이 떨어져 보인다는 말이다.
[주 D-013] 도가니와 망치를 손에 맡겨 도균(陶鈞)의 솜씨를 시험했더니, : 도균이란 도기(陶器)를 제조하는 데 쓰는 선반(旋盤) 녹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임금이나 정승이 천하를 주물러 만든 것에 비유하였다.
[주 D-014] 상서(尙書)로서의 칼과 신을 은총으로 준다. : 한 고제(漢高帝)가 일등 공신 소하(蕭何)에게, “칼차고 신신은 채로 전(殿)에 오를 수 있는 특전을 허락한다.” 하였다.
[주 D-015] 은청(銀靑)을 새로이 금자(金紫)로 바꾸어 준다. : 고려 시대의 문관 위계(文官位階)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와 금자광록대부가 있는데, 은청과 금자는 의제(衣制)의 차별이다.
[주 D-016] 관작은 산동(山東)과 산서(山西)를 다 지냈다. : 진한(秦漢) 때에 산동에는 정승이 많이 나고 산서에는 장수가 많이 났는데, 여기서는 장상(將相)을 두루 지냈다는 말로 썼다.
[주 D-017] 고아를 거느리고 우림(羽林)에서 훈련하였고, : 한(漢) 나라 때에 종군(從軍)한 병사로서 전사한 자의 유자손(遺子孫)을 데려다가 우림(羽林)에서 교양하여 무술을 가르쳐서 뒷날에 우림랑(羽林郞)으로 삼았으니, 이것을 우림고아(羽林孤兒)라 한다. 우림(羽林)은 임금의 친위대(親衛隊)이다.
[주 D-018] 쥐가 껍질이 있다는 시(詩) : 《시경》을 보면, “쥐를 보니 가죽이 있는데, 사람으로 예의가 없으랴[相肅有皮人而無儀].”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의 지도 밑에는 예의 없는 자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주 D-019] 참새가 뿔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 《시경》을 보면, “누가 이르기를, 참새가 뿔이 없다던데, 어찌 우리 집을 뚫는고, 누가 여인이 남자관 계가 없었다 하랴, 어찌 나와 소송(訴訟)하는고[誰爲雀無角 何以穿我屋 誰爲家無侯 何以連我獄].” 하는 시가 있다. 이것은 강포한 남자가 정녀(貞女)를 모함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그가 형조에서 옥송(獄訟)을 관장하고 있을 때는 조리에 어긋나는 송사를 하러 오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 D-020] 사액(使額)의 일 : 국가 예산을 책정하는 따위의 일이다. 여기서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말한다.
[주 D-021] 장단(長湍)에서 쌍오리 신을 신었을 때 : 한(漢) 나라 때 섭읍(葉邑) 수령(守令)왕교(王喬)는 방술(方術)이 있어 대궐에 올 적에 수레나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명제(明帝)가 괴상히 여겨 태사(太史)를 시켜서 뒤로 살펴보게 하니 그가 올 때면 오리 두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오리가 올 때를 기다려 큰 그물을 쳐서 잡아 보았더니 왕교가 신고 온 신이 걸려 있었고, 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한다. 여기서는 최인(崔璘)이 장단(長湍)의 원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 D-022] 사나운 범이 강을 건너갔고, : 한(漢) 나라 때에 유곤(劉昆)이 홍농태수(弘農太守)가 되어 갔는데, 전부터 그 경내에 호랑이가 많아서 나그네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더니, 곤이 부임하여 3년 동안 어진 정치를 베푼 뒤로 호랑이들이 새끼를 업고 강물을 건너서 다 도망갔다.
[주 D-023] 제주(濟州)에서 오마(五馬)를 탔던 때 : 옛날의 수레는 말 네 마리가 끌고 가게 되었으나, 한 나라 때 태수(太守)가 부임할 때에는 말 한 필을 더하여 다섯 마리가 끌게 되었다 한다. 여기서는 제주의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주 D-024] 갔던 구슬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 : 한(漢) 나라 때에 맹상(孟嘗)이 합포태수(合浦太守)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는 곡식이 나지 아니하고 바닷가에서 구슬만 생산하여 백성들은 그것을 팔아서 살아갔더니, 먼저 온 관리들이 그 구슬 캐는 백성들에게 혹독하게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 구슬이 다른 바다로 다 옮아가고 없어졌다. 맹상이 태수로 와서 전에 해오던 악한 법을 다 고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더니 1년이 못가서 도망갔던 구슬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것을 거주환포(去珠還浦)라 한다.
[주 D-025] 일찍이 김해(金海)에서 금을 사양하니 청백하면서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고, : 한(漢) 나라 때에 양진(楊震)이 동래태수(東萊太守)가 되어 부임하는 길에 창읍(昌邑)을 지나가게 되었더니 창읍의 원인 왕밀(王密)은 전에 양진이 추천한 사람이므로 밤에 황금(黃金) 10근을 가지고 와서 양진에게 주니, 양진이 말하기를, “나는 군을 알아주었는데, 군은 나의 마음을 몰라 주는가.” 하고 받지 않았다.
[주 D-026] 비단을 재단할 제 : 춘추(春秋) 때에 정(鄭) 나라 자피가 젊은 사람인 윤하(尹何)에게 고을을 맡기니 자산(子産)이 말리자 자피가 말하기를, “시험해 본다.” 하니 자산이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아름다운 비단이 있다면 그것을 재봉하는 기술이 없는 자에게 재단을 배우라 하여 시험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다만 시험으로 수령을 임명하였다는 뜻으로 썼다.
[주 D-027] 용(龍)아, 너를 시켜 명을 출납하라 하였고 : 순(舜)이 용(龍)에게 명하기를, “너를 납언(納言)으로 삼으니 나의 말을 출납하기를 잘 하라.” 하였다. 납언(納言)은 후세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주 D-028] 호(虎)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여 : 《시경》을 보면 “호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여 왕의 아름다움을 드날렸다.[虎拜稽首 對揚王休]”란 시가 있다. 호(虎)는 주선왕(周宣王)의 신하 소호(召虎)의 이름인데, 소목공은 소공석(召公奭)의 후손으로 주(周)나라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왕에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왕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하였다는 것이다.
 

▣ 김항용 - 연일 새롭고 귀한 자료를 어디서 이렇게 찾아내시나요. 마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화가 안됩니다. 연락바랍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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