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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의 문인 (25) - 만취당 김사원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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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5-23 02:32 조회1,4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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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의 문인 (25) - 만취당 김사원 행장







■ 퇴계학연구(퇴계선생 제자전기3) 제17집 (1997,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p238

84. 김사원(金士元) ---김종석 (영남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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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고, 자는 경인(景仁)이며, ---처음의 자는 경방(景龐)--- 경상도 안동부 상락(上洛)4)인이다.



증조 휘 ★광수(光粹)는 성균진사로 호은 송은(松隱)이고, 비(女+比)는 영양남씨와 순천장씨이다. 조(祖)는 휘가 당(삼수변唐)인데 참봉을 지냈으며, 비(女+比)는 죽산안씨이다. 부(父)는 휘가 ★세우(世佑)이고 선무랑5) 통례원 인의6)를 지냈다. 비(女+比)는 의성김씨이다.



상락의 김씨는 고려조에 첨의중찬을 지낸 충렬공 휘 ★방경(方慶)이 비조(鼻祖)이다. 5대를 내려와서 휘 ★자첨(子瞻)은 우리 공정왕7)이 전조의 명신의 후예라 하여 관직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가족을 이끌고 문소8)의 사촌(沙村)으로 들어왔으므로 자손들은 이곳에서 살았다.



손(孫) ★극해(克諧)는 알성과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북평사9)를 지냈으며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淸名直節)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송은공은 높은 뜻과 원대한 식견을 갖추이 일찍이 태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연산군의 정란(政亂)을 보고는 드디어 귀향을 결행하여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였다. 사림에서는 서원에 제향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기해년(1539) 10월 2일생으로 어려서는 천성이 인자하였다. 일찍이 아이들과 어울려 나가 놀다가 까마귀와 소리개가 시끄럽게 울면서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가보니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다. 측은한 마음에서 옷을 벗어 덮어 주고는 급히 돌아와서 어른들에게 알려 머슴으로 하여금 수습하여 묻어 주게 하였다.



이웃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 주었다. 공은 부모를 섬기되 안색을 살피고 뜻을 쫓았으며 이유없이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척을 만나면 곡진하게 은혜를 베풀었고 향리에 출입할 때는 공손하게 물러나서 예를 갖추었으므로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매일같이 ★송은공을 모시고 훈계를 들으면서, 조금 자라서는 더욱 향학의 의지를 굳혔다. 경신년(1560)에 문순공 ★李 선생을 도산에서 뵙고, 머물며 수업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선생은 무이(武夷)10)의 관선재시(觀善齋詩)11)를 써 주면서 "그대는 능히 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절하고 받아서는 마음 속에 새겼으며 이로부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爲己之學에 몰두하였다.



신유년(1561)에 성재(惺齋) ★금란수(琴蘭秀)12)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이 도산에 재실을 짓고 학도를 받으면서 편지를 내어 공을 초청하였다. 공은 즉시 노자를 구하여 모임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선생께서 지나치게 번잡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그만 두었다.



갑자년(1564)에 선생께서 청량산 연대사(蓮臺寺)에 유람하였는데, 공은 급문 제공들과 더불어 선생을 모시면서 詩와 題名을 남겼는데 제공들이 화답한 것이 많다. 공의 시는 없어지고 전하지 않는다.



을축년(1565) 겨울에는 만월암(滿月庵)에 머물렀고, 정묘년(1567) 여름에는 연대사(蓮臺寺)에 머물렀으며, 무진년(1568) 봄에는 다시 월란암(月瀾庵)에 머물렀다. 대개 ★간재공과 ★조기백(趙起伯)14)이 함께 유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문이 생기면 바로 표시를 해 두었다가 질문을 하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공책에 기록해 두고 마음 깊히 새겼다. 또 음향오행과 사람이 태어날 때 받은 기질의 청탁 등에 관한 학설로 질문하였고, 선생은 편지를 내어 조목 조목 해답하였는데 끝에는 지나친 사색과 과도한 탐구가 병통이 됨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공은 평소에 병에 잘 걸렸는데 이때와 와서 오랫 동안 山寺에 머물면서 힘든 공부와 부실한 식사로 설사병이 더욱 심해졌다. 선생이 직접 처방하고 약을 지어 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기운이 매우 부실하니 겨울과 여름에 병을 면치 못하겠네. 옛 사람이 학문을 함에 비록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어찌 병을 만들어 부모의 근심을 끼치도록 했겠소." 하였다.



경오년(1570) 겨울에 선생이 후학들을 버리고 운명하시니 공은 급히 가서 곡하였다. 문인들이 服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니, 공은 "옛날에 스승에 대해서는 服制를 정립하지 않았으니 (전례를) 뛰어 넘을 수 없다." 하여 검은 초립에 흰 옷과 띠를 착용하고 장사(葬事)와 대상(大祥)을 치루었다. 동문 제공들과 함께 연명으로 제사를 받들기를 3년 동안 하면서 연락(宴樂)에 참석하지 않았다.



송은공 이래로 가업을 돌보지 않고 부모 봉양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공은 탄식하기를 "선비의 처세가 의롭지 못한 녹을 바래서는 안 되고 오직 본분에 진력해야 과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언행에 삼가고 독서에 열중하며 농사에 힘쓰는 3가지는 우리 스승께서 가르친 바이라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며 독서에 힘쓰는 틈틈이 학동들을 지도하고 밭일에 힘썼다.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고 약간이 남으면 그 남은 것은 흉년을 대비하여 남겨 두었다가, 원근의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 수를 계산하여 빌려가게 하였다. 가난하여 갚을 길이 없는 사람들이 있으면 곧 대중 앞에서 채권을 불살랐으므로 사람들은 김씨의 의창(義倉)이라고 불렀다.



경신년(1580) 6월 ★인의공(引儀公)15)의 상을 당하였고, 임오년(1582) 6월에는 ★모부인이 졸하였다. 縣의 북쪽 禾谷山 아래에 묻었다. 촌민은 겨우 백여 호였는데 모두 양보할 줄 모르고 대립하고 있었다. 겸암(謙庵) ★유운룡(柳雲龍)이 공에게는 아버지의 표제(表弟)17)가 되는데, 당시 珍寶현감의 신분으로 와서 조문하였다.





----- 중간 2페이지 정도 생략, 시간나는 데로 타이핑해서 보충해 놓겠습니다. -----







바야흐로 ★李 선생이 도산에서 講道할 때 옷자락을 거머쥐고 배움에 길에 나섰던25) 선비들은 일세의 영재들을 망라하였는데, 공은 자리를 주선하고 의문스러운 점은 질의를 통하여 배움을 청한 것이 대개 10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동안 배우며 갈고 닦은 내용은 틀림없이 진보를 거듭하여 마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그것은 問答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다섯 조목의 요지는 모두 우주 조화의 근원을 탐색한 것이다. 선생은 이때를 전후하여 경계의 말씀을 자주 하였는데, 매양 지나친 사색이 병을 낳는다고 걱정을 하였으니 (공의) 고상한 정신 경계와 독실하게 노력하는 뜻을 오히려 상상해 볼 수 있다.



건실한 사람으로 중년을 넘기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학문의 세계에 잠겨 있었으니 순수하고 진실한 도의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공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더욱이 집안에 우환이 거듭된 까닭으로 아름다운 말씀과 행적은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니, 어찌 후세에 공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더불어 안타까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공은 아마 <大學質疑대학질의>, <語錄解어록해> 등 여러 저서가 있었던 것 같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없고, <五條問答오조문답>은 선생이 직접 기록하여 갖추어 놓았으나 두 조목은 ★趙공26)의 문답 속에 실려 있다.



생각건대, 공과 조공은 함께 산사에 기거하면서 서로 질문하고 돌려가면서 베껴서 공부의 자료로 삼았으므로, 문집을 만들 때 조공의 편지 속에 섞여 들어간 것으로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의 이름이 문인들의 문답 속에서 나타나지 않아서 학통을 전수한 연원의 진실을 상고할 수 없으니 이는 거듭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李 선생이 일찍이 주자의 문인들에 관해서 논하기를,

"문하에 들어서 수업을 청하고 서찰을 올려 모르는 것을 물어서 스승이 전수하는 뜻을 드러나게 하면, 비록 그 사람이 의문이나 질문의 내용은 수준과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선생이 답변을 통하여 억제하거나 격려하거나 나아가게 하거나 물러서게 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다고 한다면 지극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斯道(사도)에 도움됨이 없겠는가?" 하였다.



무릇 선생의 도는 바로 주자의 嫡傳(적전)으로서 공이 수업을 청하고 의문을 물었던 것은 결국 문하에 들어서 서찰을 올린 것이다. 이 다섯 조목 또한 스승이 전수한 요지를 드러내고 억제하고 격려하며 나아가게 하고 물러서게 하는 가르침을 밝힌 것이니, 어찌 斯道에 도움을 주고 성인의 문도의 반열에 참여한 것이 아니겠는가?



昆孫(곤손)27) 되는 上舍(상사) ★宗德이 비로소 그 부형의 명을 받고 나★象靖(상정)에게 말하기를,

"선조의 사업과 행적이 흩어져서 거의 없어지고 단지 한두권의 家牒(가첩)이 있을 뿐인데다, 미루기만 하고 민첩하지 못하여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고 선배로서 덕망있는 분에게 부탁한다.

지금 시기를 놓쳐 시도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더욱 흔적이 없어질까 두려우니, 그대가 한마디 해주면 좋겠다." 하였다.



조용히 스스로 생각건대 나는 막연하여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루한 언사를 꾸며서 불위의 죄28)를 범하겠는가 하여 일어나서 사양하기를 거듭하니 질책은 더욱 심하였다.



그래서 또 가만히 생각건대, 내가 어려서부터 공의 후손과 교유하면서 그 집안에서 전해오는 오래된 장서를 얻었으므로 그 師門(사문)에서 전수된 사실을 고증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약간 상세할 것이며, 만약 분수와 능력을 헤아리고 겸손과 양보를 위주로 한다면 글을 엮는데 있어 혹 알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곧 글짓는 것을 일에 비유하여 역사가(秉筆者)의 채택에 대비하여, 또한 크게 어려운 것을 없을 것 같기도 하였다.



드디어 참람됨과 외람됨을 살피지 않고 망령되게 순서대로 적어가다가 도산에서 공부하면서 문답한 자취에 이르니 특히 감개가 무량하다. 세상에서 하는 말에도 군자가 혹 취할 바가 있다면, (이 글도) 斯文(사문)의 일단을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韓山 ★李象靖29) 삼가 씀.







***昆孫(곤손)27) : 來孫의 子, 玄孫의 孫

☞☞☞ 子 - 孫 - 曾孫 - 玄孫 - 來孫(5대손) - 昆孫(6대손)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저의 15대조 만취당 부군의 행장을 주회 대부님을 통하여 비로소 읽으니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히 대산 이상정선생의 글솜씨에 또한 탄복할 따름입니다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본 홈에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 솔내영환 - 타이핑하시기에 얼마나 노고가 크셨습니까? 쉽게 읽어보지만 노고를 짐작할 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영 - 귀한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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